성균관 유생들의 나날들 기고를 준비하며 저 이전에 기고해 주신 회장분들의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다들 너무 멋있고 깔끔한 글이어서 어떤 글을 적어야 할지 고민만 한참을 한 것 같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능력이 엄청나게 뛰어나거나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회장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 멋있는 회장의 글은 저에게 무리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가볍게 회장이 되기 전 가지고 있던 생각, 회장이 된 후 깨달은 여러 가지 생각 정도를 적어보려 합니다.회장이 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회장”에 대한 생각… 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주로 회
누군가 말도 없이 탕수육 위에 소스를 붓는다면, 아마 난리가 나지 않을까? 중국집에서 밥 한 끼를 먹을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화해야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보다도 중요한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우리의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대화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여기, 다름을 배우고, 이야기하는 한 동아리를 소개하려고 한다. 바로, 성균관대 토론동아리 SKFC다.학기 중 매주 수요일, SKFC는 경제, 정치, 법 등 다양한 주제로 토론한다. 민감한 주제도, 생소한 주제도, 복
단체라는 건 가끔 자석처럼 찰싹 붙어 단단한 유대감을 형성하기도 하고, 함께 있지만 각자 다른 곳을 향해 가기도 합니다. 단체를 이끌기 위해 장이 해야 하는 가장 큰 일은 다른 목적과 의도를 가진 이들을 공통된 목표를 향해 움직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활동 인원이 200명이 넘는 동아리를 운영하며 제가 느낀 점은 모두 이 단체에 대한 생각과 애정도 그리고 단체에 쏟을 수 있는 열정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누구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연습에 참여하고 기획에 도움을 주지만 누군가는 와서 시간만 채우고 가거나 노력 없이 무대에 서는 경우도
대학 생활을 막 시작한 스무 살의 나는 로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동아리에 대한 로망이 가장 컸다. 교내 동아리에 들어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동아리 홍보 부스를 통해 풍물패 얼을 알게 되었고, 얼의 화목한 분위기에 이끌려 가입했다. 그렇게 나는 로망의 대부분을 풍물패 얼에서 이루었다.장구를 제대로 쳐 본 적도 없이 무작정 들어온 동아리였지만, 가을 정기 공연을 진행하면서 풍물놀이에 점점 빠져들었다. 다 함께 만든 공연은 풍물놀이와 풍물패 얼에 많은 애정을 갖게 하였다. 힘들었던 순간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악기로 서로 다른 음을 내고 그 음들은 하나의 곡으로 수렴한다. 엉망진창이던 첫 합주에서 몇 번의 합주를 거쳐 완벽하게 들어맞는 박자와 음정을 몸소 느낄 때면 짜릿하다. 밴드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2년 전에 동아리에 들어와 그저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처음 베이스를 잡았다. 처음 베이스를 잡았을 땐 내가 맞는 소리를 내고 있는지, 제대로 된 자세를 잡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악보가 지시하는 대로 손을 프렛에 가져다 댄 채 줄을 튕겼다. 나는 그럴듯하게 연주는 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였다.작년
‘머릿속이 새하얘진다’는 말은 단지 비유뿐인 말이 아니다. 백지에만 집중하고 있다 보면 자연 머리가 하얀색으로 가득해진다. 허공을 채워야 할 것 같은 압박 속에서는 아주 작은 생각 하나도 써 내리기 어렵다. 무언가를 써야 하는 모두가 겪는 일이고, 특히나 이 글을 읽고 있을 성균관대 학우들을 포함해 모든 학생들이 흔히 겪을 일이다. 나 역시 백지 위에서 차마 헤매지도 못하고 가만히 멍만 때리는 일이 잦다. 특히나 입시를 막 끝낸 신입생 때가 더욱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글쓰기를 아주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신입생 시절
Do It Yourself: DIY! 무엇이든 한번 스스로 해보자는 말입니다.익히 들어봤을 대부분의 밴드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범한 학생, 직장인, 교사, 엔지니어가 악기를 잡고 멋진 곡을 써내어 성공했다는 것이죠! 영화 로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던 밴드 ‘퀸’도 대학원생, 교사, 디자이너와 같은 범인(凡人)들이 모여 결성한 밴드입니다. 유명한 브릿팝 밴드 ‘오아시스’ 역시 악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는 노동자 계층의 형제가 주축이 되어 성공한 그룹이고요, 음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2학기가 시작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이시점 다시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20~22학번 모두 코로나로 인해 온전한 캠퍼스 라이프를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께 소소한 위로를 전하고자 짧지만,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21학번으로 학교에 들어와서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저는 동아리에 들어가 친구들을 사귀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도중 저학년이 주학년 층인 중앙동아리인 KCC에 눈길이 가게 되었고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는 것을 기대하며 KCC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짐에 따라, 학교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자면 그것은 언제인가?예상컨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각기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진짜로 소중한 추억을 떠올렸을 수도 있고, 혹은 이런 오글거리는 도입부는 뭐냐며 진저리를 떨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벌써 이 페이지를 나가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도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적자니 다소 부끄러워진다. 하지만 소리사랑에 대한 글을 쓰며, “반짝이는 순간”이라는 말을 뺄 수는 없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이 바로 소리사랑과 함께했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눈부신
가을이 왔다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겨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S-ANGEL에 들어와 새로운 환경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마음속에 온난한 설렘을 아로새기던 작년 가을과는 달리, 올해는 그런 설렘을 느낄 틈도 없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인지 혹은 보고 싶은 사람들을 더는 볼 수 없다는 허탈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한랭할 듯 보입니다. 올해 S-ANGEL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두 번의 기부 캠페인을 진행하였고, 여러 의전 활동과 온라인 활동을 동시에 진행하였습니다. 그중 1학기에 진행
농구 동아리 이름이 ‘농성회’라니. 입학 후 농구 동아리를 찾던 중 농성회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무슨 사회 운동 동아리도 아니고. 그럼에도 ‘중앙동아리’라는 매력적인 타이틀에 설레는 마음으로 지원 문자를 넣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회장이 되어 있었다. "Ball is Life". 내 삶에 참 잘 어울리는 말이다. 기숙사에 살았던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아침 농구, 점심 농구, 저녁 농구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한여름에 땀에 찌든 옷을 입고 수업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포기 못했던, 한겨울에 손발이 다 얼어가
꽉 막힌 벽면에 작은 구멍을 내어 창문을 만들어내면서, 비로소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더 넓은 공간을 바라보게 된다. 이렇듯 창문은 종종 바깥의 세상으로 연결하는 하나의 창구로 비유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더 넓은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바깥에서도 방안의 공간을 바라볼 수 있게 되듯이, 두 공간을 통합하여 서로를 연결해주는 소통의 창구가 된다. 우리 학교에도 교내 소식과 여러 학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교외 사회 문제, 국제 이슈에도 집중하여 이를 전달하는 ‘창문’이 있다. 공식 교내 언론 3사인 성대신문,
코로나19 사태는 당연했던 사람 사이의 교류를 많이 지웠습니다. 다같이 동방에서 공부하다 공부하기 싫다며 조잘대던 순간 같은 것들이요. ‘만나지 못함’은 일상뿐만 아니라 봉사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봉사에서 ‘사람과 사람의 시너지’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우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봉사활동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소미 내에서도 ‘타인을 돕는 보람돼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의무라서’ 등 각자 봉사하는 동기가 다르니까요. 저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 배우고 싶어서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만큼 봉사에서 ‘사
처음 투고 요청을 받았을 때, 어떤 내용으로 쓸지 고민하기에 앞서 내가 글을 써도 되는가에 대한 우려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저를 사학과 학생회장이라고 소개할 때면 아직까지 귀가 빨개질 정도로 그 직함이 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2019년 3월, 새내기들이 천천히 학교에 적응할 무렵 제72대 사학과 학생회 사(史)필귀정이 출범했습니다. 사필귀정이라는 조금은 거창한 이름과 함께 나오면서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 크고 작은 기복이 존재했던 사학과이기에 이 학생회 이름이 자칫 오해를 살지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모든 것은
며칠 전 기자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성대방송국 국장님…” 으로 시작한 말은 오는 금요일까지 원고를 보내주실 수 있냐는 문의 요청이었다. 겁이 났다. 남이 작성해준 방송 멘트는 분석해서 잘 전달할 수 있었지만 내가 무언갈 먼저 창작해내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사실, 이 글도 몇 번을 썼다 고치길 반복했다. 어떤 얘기를 담아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은 이에 이르게 됐다.정식으로 인사를 드린다. 평소완 다르게 드리는 게 옳을 것이다.“성대신문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색다르게 글로 인사드리는
3월이 되면서 학교에는 한 학번이 더 늘어났다. 그들을 보면서 치열한 대학입시를 뚫고 아름다운 대학의 캠퍼스를 누리는 설레는 마음이 되살아나는 시기다. 군대에서 수능을 준비하면서 남들보다 조금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성한 나에게는 그 설렘이 크게 느껴졌다.많은 대학생들은 대학에서의 버킷리스트를 가지고 있다. 작게는 학점을 잘 받아 장학금을 받아보자 같은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크게는 유럽여행이나 세계일주 등이 꼽힐 것이다. 내가 대학에서 가장 해보고 싶은 일은 외국인과의 교류였다. 세계는 넓고 사람은 많다는
4.19혁명 당시, 그리고 5.18 민주 항쟁 때, 한국의 민주주의를 앞당기며 폭압적인 정권에 희생된 민주화 열사들. 모두 우리가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한 번쯤 봤던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우리에게 열사라는 말은 무척이나 낯설고 무겁다. 아마도 1991년의 평범했던 성균관대 학생들에게도 열사라는 말은 무척이나 무거웠을 텐데 그 무거운 말을 나의 동기, 나의 선배, 나의 후배에게 불러야만 했던 우리의 선배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순식간에 열사가 되어버린 프랑스어문학과 김귀정 선배는 노태우 정권의 공안통치 속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다
4월 11일 금요일 자연과학캠퍼스 학생회관 1층에 위치한 소강당에서 18주기 황혜인 열사 추모 문화제가 열렸다. 준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많은 사람이 모였으면 했기에 여기저기 홍보를 하고 다녔다. 그러던 중 같이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한 고등학교 동창들에게 황혜인 열사에 대해, 추모 문화제에 대해 이야기 해봤다. 여기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5년이나 학교를 다닌 고학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조차 몰랐다는 것이었다.황혜인 열사는 95년에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로 입학한 우리의 선배님이다. 입학한 다음 해인 96년에는 동아리 연합회 선전국장을
봄기운이 울렁이며 여름 같은 날씨를 연상시켰던 4월 2일 수요일 12시 생공대 학우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들어달라며 한자리에 모였다. 80명도 채우지 못하고 안타깝다는 말로 결말이 날 것이라는 나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11시 반부터 시작된 학생총회는 12시에 내가 도착했을 때쯤 이미 100명을 넘어섰고 12시 40분 무렵 121명을 기적적으로 채움으로써 학생총회가 시작됐다.학생총회의 가장 주된 안건은 생공대 등록금 인하다. 등록금 산정기준도 제대로 설정하지 않고 생공대 학생들을 이과대 학생과 차별하며 더 높은 등록금을 받다가
“나는 전태일이다”. 혹시 학우분들께서는 셔틀버스 종착역 농구 코트 쪽에 걸린 거대한 현수막을 보셨거나, 자보에 적힌 “나는 전태일이다”라는 문구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이는 이번에 중앙동아리 노동문제연구회 주최로 열게 된 제11회 전태일 열사 추모제의 제목입니다. 그런데, 전태일 열사의 추모제 제목인데 굳이 “나는 전태일이다” 이라는 말이 들어가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태일 열사가 온몸에 불을 붙이고 돌아가신 1970년 11월 13일. 열사의 몸은 타들어 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마저도 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