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을 시작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생겼다.그럴듯한 대회와 학회에 무작정 지원했다. 그리고 벌여 놓은 일을 수습하는 마음으로 활동에 참여하며 약력을 한 줄씩 늘려갔다.성대신문 수습기자 모집 공고를 봤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지원해서 활동하면 뭐라도 얻어가는 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처음 성대신문에 들어와 뉴미부 수습기자로서 활동한 한 학기동안은 크게 부담되는 일이 없었다. 그간의 문건과 영상들을 보며 내가 언젠가 하게 될 일이라는 막연한 느낌만 있었다.하지만 준정기자로 방중활동에 임하자마자, 학보자 기자라는 자리가
답이라고 생각하며 오랜 시간을 준비했던 고시 공부를 포기하고, 다른 길의 출발점에 서니 막막했다. 아무것도, 심지어 학점조차도 준비가 되지 않았던 내가 과연 기자라는 새 길로 잘 나아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그래도 뭐든지 한 번 해보기로 했다. 그 첫걸음이 성대신문이었다.민망하고, 불편했다.다들 졸업하는 나이에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점이 참 민망했고, 그런 나를 동료들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마음이 참 불편했다.그러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다들 나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주었고, 각자의 속마음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누구도 내게 왜 지
처음에는 그저 멋있어보인다는 막연한 관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학교의 모든 게 신기할 1학년 때, 교내에 있는 성대신문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대학언론의 형태는 물론, 발간과정 전체를 잘 몰랐던 터라, 정말 기성신문 같은 외관에 '진짜' 신문 같다고 생각했었다.그렇게 몇 달 후, 유튜브에 업로드 된 성대신문 수습기자 모집 홍보영상을 접했다.그러던 어느 순간, 성대신문 유튜브의 다른 브이로그 영상들까지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재미를 가진 영상이면서도 자신만의 생각을 담고 학보사의 가치를 챙기는 영상을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수습
지금까지도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억이 있다. 스무 살 무렵에 나는 밖에서 사람들과 옷깃을 스치며 걷는 것조차 힘들던 시기를 겪었다. 그런 시기의 나를, 나와 네 살 터울인 언니는 그림 재료를 사러 화방을 가는데 함께 가자며 안국동으로 데려갔다. 언니는 우울감이 나아지는 방법을 나보다 먼저 알았던 것 같다. 그렇게 나를 이불 밖으로, 집 밖으로 끌어내줬다.처음 가본 안국동에서 나는 화방도 처음 가보게 됐다. 어릴 때 언니가 미술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이면, 연필의 흑심 냄새, 먹 냄새 같은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
경험은 사람을 노련하게 하지만, 동시에 틀에 가두기도 한다.스물셋 평생을 글 좀 쓰는 애로 살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별별 활자를 다 끼고 산 탓이다. 학창시절엔 교내외 글쓰기 대회에서 종종 입상했고, 대학 입학 문도 논술로 뚫었다. 2년을 바친 학생단체에서는 사람 몇백 명을 운용할 대행사 기획서를 썼고, 신문사에 들어온 직후 한 학기의 수습 트레이닝도 큰 문제 없이 마무리했다. 웹하드에 첫 수습 웹기사 완고를 올리던 순간까지 생각했다. 아, 이거 괜찮네. 생각보다 할 만한데? 그렇게 나도 모르게 다져 온 편협한 틀을
지금껏 내게 글쓰기는 얄궂은 일이었다. 나의 글은 너무 추상적이고 감정적이라 느꼈다. 그래서인지 남이 쓴 글은 매번 흥미롭게 읽으면서도, 내가 쓴 글은 스스로 보기에 부끄러웠다....지난 겨울방학에 추가 수습기자 지원을 앞두고 무수히 고민했다. 7학기를 바라보는 내게 신문사 활동은 약간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이 아니면 더 망설여질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 하나로 성대신문에 입사했다. 방중의 끝에 다다른 지금에는, 앞으로 펼쳐질 신문사 활동이 나의 대학 생활에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되리라
준대구인이요.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항상 덧붙이는 말이다. 대구에서 태어나고 대구에서 쭉 살았음에도 나를 완전한 대구인으로 소개할 수 없는 건 고등학교 3년을 안동에서, 대학교를 서울에서 진학 중인 탓이다. 완전한 사투리도, 완전한 서울말도 구사할 수 없는 난 현재 이도저도 아닌 제3의 언어를 구사 중이다. 상경한 지방 사람들의 특징처럼 나 역시 사투리를 남들에 비해 안 쓰는 편이라는 알량한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그치만 한편으론 사투리가 언젠가 완전히 사라지게 될 미래를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도 들기도 한다.준(準). 어떤 명사
나는 늘 오늘보다 내일의, 내일보다 내년의, 내년보다 10년 후의 내가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어쩌면 아-주 막연한 기대를 품고 살아왔다. 이런 막연함은 만족하지 못한 하루를 보낸 나 자신을 반성하게 만들었고, 현재의 나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다가왔다.그래서였을까, 분명 남들과 다르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자꾸만 내가 부족해보였고 아직도 갓 고등학생 티를 벗은 어린 아이 같았다.별안간 신문사에 지원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막연함이 꿈꾸는 나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보단 나은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대학교에 입학하고 어느덧 2년. 하루하루에 충실하며 게으르게 살지 않았다고 자부했다. 캘린더 앱은 알록달록한 색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하루 할 일을 마치면 미래를 걱정할 새도 없이 잠에 들었다. 그러나 9월의 어느 날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게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할 일을 한없이 미루다가 후회하고 자책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고, 다이어리엔 매일을 반성한 감상은 찾아볼 수 없고 시간대별로 빼곡한 스케줄에 죽죽 줄이 그어져 있어 지저분할 뿐이었다.성대신문에 지원한 것은
성대신문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좌우명이 무엇인지 제출하라는 얘기를 들어서, 갑작스럽게 생각해보게 되었다.좌우명, 늘 자리 옆에 갖추어 두고 가르침으로 삼는 말이나 문구라는 의미라는데 생각해보면 늘 자리 옆에 갖추어 두는 것은 스마트폰밖에 없다.하지만 좌우명을 스마트폰이라고 적어낼 순 없기에 인생의 모토같은 것 정도를 생각해보았다. 잠깐의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수면과 휴식은 충분히” 였다.사실 충분하다고 하기보단 과분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수면과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 삶에 있어서는 그만큼이나 중요한
하필(何必). 달리 하거나 달리 되지 않고 어찌하여 꼭. 하필이면.개강 직후 떠난 일본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하필이면 킹고 m 알림이 떴다. 23-2 성대신문 추가수습 모집 마지막 날이라는 알림이었다. 평소 알림을 대충 보는 나인데 하필이면 그날따라 그 알림이 눈에 들어왔다. 공항버스에서 돌아오는 내내 성대신문 기사를 읽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급하게 지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떨어질 게 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열심히 지원서를 작성했다. ‘이번에 떨어져도 3월에 다시 도전하면 된다’는 생각 하나로 지원서를 제출하고 논술 시
얼마 전 성대신문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진행한 인터뷰를 마쳤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열심히 조사도 하고, 질문도 만들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2시간 조금 안되는 시간은 나에게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나의 설레임에는 연구실 보드에 적혀있는 '백지원 기자'와의 일정, 준비해주신 쿠키와 초콜릿, 박사님의 작은 화분 선물도 몫을 보태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보다도 더 나를 설레이게 만든 것은, 오랜만에 느끼는 살아있다는 감정이었다.대학교에 들어와 한동안 처음으로 무력감을 느꼈다. 어느 정도 잘해왔다고 믿어온 나에게, 대학이라는 더 큰 사회는
참 흉흉한 세상이다.눈을 뜨면 사람이 사람을 짓밟고 있다. 그때마다 나는 참으로 무기력해진다.서울에 오고 나서 참으로 무기력한 적이 많았다. 자신에 대한 확신도 미래에 대한 어떠한 기대도 들지 않았다. 그때 내가 본 서울은 미세먼지가 그득했다. 참 잿빛이었다.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세상은 나에게 참 모질게 굴었다. 그때마다 나는 울컥거리는 상처를 상처로 덧대고, 덧대고, 또 덧댔다. 더는 그곳에서 아무런 감각도 나지 않을 때까지.그런데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깨달았다.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홀로 외롭게
고등학교 내내 언론인을 꿈꾸며 공부해온 나는 경험의 한계가 있었다. 항상 매체에만 갇혀 사회를 바라봤을 뿐 내가 직접 뛰어들어 볼 기회도, 그 기회를 만들 용기도 없었다. ‘이렇게 계속 뒤에 서 있기만 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냥 이런 생각이 어느 순간 들었다. 그렇다. 난 어쩌면 세상에 더 뛰어들고 싶었던 것 같다.대학에 들어오기 전부터 성대신문에 들어오고자 결심했다. 내가 직접 주제를 찾고, 기사를 쓰고, 인터뷰이를 찾아 인터뷰하고, 그 기사가 학교 내에 퍼진다는 것이 나에겐 큰 매력이었다. 세상에 뛰어들고자 했던
대학교에 들어온 후의 일상을 돌아보면, 나는 점점 도피형 인간이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부정이 두려워 시작조차도 않고 무조건적인 안정과 현상 유지만을 추구하였다. 잉여로운 방학을 보내던 중, ‘어바웃 타임’이라는 영화를 통해 주어진 현재의 시간이 보이지 않더라도 내게 주어진 그 무엇보다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걱정 때문에 주어진 현재의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지금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다.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자는 생각으로 성대신문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결과물에 대해 계속해서 평가를 받아야 하고, 평가를 바탕으로 더
힘들다. 주말을 제외하고 10시까지 학교에 출근하는 것도, 게다가 방학에. 매일매일 생각하고, 쓰고, 찍고, 편집하고, 수정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게. 다른 사람들을 계속 만나야 한다는 게.미래를 차츰 생각해야 한다고 강요받는 시기인 3학년 1학기에 이것저것 열심히 시도하고 있는 주변 친구들을 보며 나는 문득 조급해졌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평소 학과에서 해오던 활동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성대신문 뉴미디어부에 지원했다. 사실 나는 항상 저지르고 후회하는 스타일이었다. 최근에는 저지르기
나름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편이고 주어진 일을 미루지 않고 성실히 끝내려고 하는 편이지만, ‘해야할 일’이 주어지지 않으면 한없이 게을러진다. 1학년을 보내며 느낀 점이었다. 끊임없이 할 일이 주어지던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대학교 생활은 온전히 나의 선택의 연속이었다. 크게 엉망으로 산 것은 아니었지만 별다르게 바쁜 일 없이 1학년을 보내며 남은 대학 생활은 허무하게 보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생하더라도 조금 바쁘게 살면 뭐라도 남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성대신문에 덜컥 지원하게 됐다.성대신문에 들어와 보니 생각보다 할 일이 많
폭풍 같던 새내기 시절이 지나고 2학년으로서의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성대신문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와 다짐이 필요했다. 혼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고, 책 읽고, 일기 쓰며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어느새 기자가 되고 싶어 하는 학생이 되어있었고, 기자가 되기 위한 노력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기자’의 피상적인 이미지는 평생 공부하면서 세상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직업이었고, 이는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성과 완전하게 부합하기 때문에 나는 생각보다 기자에 진심인 사람이 되었다.
무언가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멋이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진 나는 쉽게 얻어지는 것들만 얻으며 살았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얻어지는 것들이 있는데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애를 쓰는 걸까? 추하게 버둥거리며 애쓰는 것이 ‘노력’이라는 빛나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내가 무언가를 위해 힘껏 노력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정도면 됐어.’ 부끄럽지만 지금도 내가 정말 많이 하는 생각이다. 나는 열정적인 사람, 에너지가 많은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생각해 보면 1년 동안 대학에 다니면서 한 번도
"만나이로 23살이니깐 우리는 아직 젊은거야". 올해 초, 같이 밥을 먹던 대학교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꽤나 안심했었던 기억이 든다. 왜냐하면 당시의 나는 학교에 입학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이렇다 할 경험을 쌓지 못했다는 사실에 안절부절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졸업까지 얼마남지 않은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할지 항상 고민했었다. 그런 와중에 우린 아직 젊다는 친구의 말은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여럿 보면 공통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바로 젊을 때 하고싶은 일에 도전하라는 조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