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독서붐이 일어나며 책을 읽고 공유하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지만, 여전히 인문학은 멀리 떨어져 있다.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칸에 가보면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분야는 단연 경제와 관련된 것들. 아무래도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버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인문학의 한 분야를 전공하길 바라는 입장에서 요즘 서점은 너무 차갑다. 쓸데없고 어려워. 언제부턴가 생겨버린 선입견에 사람들은 이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때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시간을 갖고 천천히 살펴본다면 인문학은 결코 쓸데없지 않다. 오히려 실용적이고 일상적이다. 친
오늘날 현대예술은 분명 가장 논란이 되는 뜨거운 화제 중 하나다. 사람들은 현대예술이 난해하기만 한 ‘그들만의 리그’이며, 희대의 사기극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나는 현대예술은 결코 난해하지 않으며 ‘그들만의 리그’는 더더욱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현대예술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 이해하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현대인이지 않은가. 예술은 시대의 자화상이자 세계관의 반영이다. 현대예술을 이해함은 곧 우리 세계를 파악한다는 것이다.일견 성의 없어 보이는 현대예술 작품을 보고 사람들은 ‘이건 예술이 아니다. 예술은 이래
‘내 연인의 눈은 태양처럼 빛나지 않고입술은 산호처럼 붉지 않으며가슴은 눈처럼 희지 않고 거무죽죽하며남들의 머리가 금실이라면 그녀의 머리는 검은 실이다나는 붉고도 흰 장미는 본 적 있지만 그녀의 두 뺨에서 그런 장미를 본 적 없고그녀가 내뿜는 숨결에서보다 향수의 향기에서 기쁜 마음을 얻는다.나는 그녀의 음성을 사랑하지만 음악이 훨씬 듣기 즐겁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여신은 땅을 밟는 일이 없다는데 나의 여신 그녀는 씩씩하게 땅을 밟는다그러나 결단코 내 연인은 그 누구보다 특별하다 거짓 비유로 포장된 이들보다 더.’이 짧은 글은 셰익스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들의 욕망은 단 하나, 푹 자고 싶은 욕망뿐이라고 한다. 그 군인들의 고생이 딱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부럽다. 불쾌하고 번잡한 마음과 근거 없는 생각의 홍수와 깨끗이 결별한 채 그저 수면만을 갈망하는 상태는, 정말 깨끗하고 단순해서 생각만으로도 상쾌해진다. 배불리 먹고 발 뻗고 자는 나는 마음이 번잡해서 온갖 욕망에 시달리고 불안에 떨며 또 하루 살기 위해 고민한다. 왜냐하면… 실존은 본질에 앞서니까.인간에게는 본질이 없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 목적, 기능, 의미 같은 건 없다. 인간은 그냥 존재한다. 존재
세차게 비가 오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쨍쨍한 날씨가 이어진다. 변덕을 부리는 봄날의 날씨처럼 하루를 살아가는 나의 태도도 이랬다저랬다 하는 요즘이다. 어느 날은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함이 찾아오다가도, 때로는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싶다는 갈증이 샘솟기도 한다.변덕스러운 날씨, 오락가락하는 내 기분과 다르게 시간은 진득하리만큼 정직하게 흘러간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였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학원 강사 알바를 하러 지하철에 올랐다. 그때부터 꽤 긴 시간을 가야 했기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음악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지면이 주어졌다. 음악에 대해 쓸 것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음악이 왜 멋진지 설명해보도록 하자.음악은 어떤 시간을 붙잡아버린다. 지금 핸드폰을 들어 음악을 틀어보자. 3분이든 5분이든 8분이든, 일정한 시간이 제시되고 그 시간 동안 음악은 재생된다. 지정된 시간 동안 지정된 속도로 펼쳐진다. 글을 읽거나 그림을 보는 것과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음악에는 ‘속도’라는 속성이 내재해있다. 글이나 그림은 감상자 자신이 임의로 정하는 속도에 맞추어 흘러가고, 이를 통해 작품이 감상자의
예술이 매력적인 이유는 틀린 것은 없고 다른 것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림으로 생각해본다면 연필의 기울기, 세기, 그 마무리, 심지어 그을지 말지에 따라 그려지는 획은 다르다. 물론, 그만큼 내가 표현하고 싶은 바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만큼 위태로운 연필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의 상상력과 표현력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그림의 매력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새롭게 내딛는 한 획은 곧 작품에 숨을 불어 넣는 듯한 느낌이다. 머리카락 한 올, 쌍꺼풀 한 겹, 입술 주름 하나, 어두워지는 그림
책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선박 중개인으로, 자신의 지인과의 모임 중 괴한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이때 자신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권총을 쏘아 그 괴한을 사살한다. 이로 인해 재판을 받게 되며 그는 자신의 행동 모두가 우연의 일치이며 아무런 개연성 없는 행동의 연속임을 이야기한다. 이는 물론 인정되지 않고, 검사 측은 긴밀하고 논리적인 연결로 그의 행동들을 설명하며 그의 범죄가 계획되었으리라 판단한다.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역시 만연하게 보여진다. 사회에서, 각각의 개인이 타인의 행동을 판단할 때, 심지어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볼 때
다음 주면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더라. 곧 겨울이다. 사람들은 초겨울이면 낙엽이 죄다 떨어져 마음이 싱숭생숭 하다던데. 날이 추워지면 마음이 오히려 짱짱해진다.11월이면 트는 캐럴처럼, 겨울에는 겨울의 몫이 있다. 반으로 접어 두르는 체크 목도리도, 보들한 니트도, 밖에 나올 때 코를 찡긋거리며 찬 공기 냄새를 맡는 것도, 손을 잡으며 ‘너 손이 왜 이렇게 차니’라고 건네는 말도 모두 겨울의 몫이다. 겨울이 갖고 있는 것들은 꼭 마음에 드는 것만 있어 날이 추워지면 마음이 들떴다. 차가운 공기에 짱짱해져 마음이 잘도 튀어 오른다. 조
어느 날 나는 ‘자연스럽다’는 말이 새삼스러워졌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친한 언니의 고민을 들으면서.“뭐든 여유롭게 툭 던지는 사람들이 부러워. 일도 인간관계도 별 탈 없이 유연하게 해내더라고. 근데 나는 그러질 못하거든. 이제 좀 자연스러워지고 싶어.” 고민을 털어놓는 언니의 말에 나는 아무런 위로도, 조언도 못했다. 내가 아는 자연스러움은 사진 찍을 때의 ‘그게 뭐야, 자연스럽게 웃어봐’나 삐죽 나온 잔머리를 굳이 정리하지 않는 일 정도였으니까. 그 의미가 풍부해진 건 작은 한지 공방을 다니면서다.인사동 골목을 돌아 한적한 샛길로
나는 일 년에 꼭 한 번씩 배가 크게 아팠다. 그리고 꼭 밤에 앓았다. 그래서 연례행사처럼 치르는 배앓이는 늘 밤을 새워 가며 나를 힘들게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우리 엄마를 힘들게 했다.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내가 처음으로 학교에서 현장체험학습을 갔을 적에 내가 수영장에서 다치진 않을지 걱정이 되어 나 몰래 수영장까지 쫓아오는 사람이었다. 결국 그날 밤 너무 신나게 논 나머지 다리가 아프다며 칭얼거리던 내 옆에서 엄마도 아프다며 웃으셨고 서로의 다리를 주물러준 후에야 우리는 잠에 들 수 있었다. 하지
예전에는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대체재’에게는 각자 그것이 발명된 이유가 있고, 그것들이 구시대의 것들을 밀어내고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내게 오래 되고 불편한 것을 왜 사랑하는 이들 중 아무도, 왜 그것들을 사랑하는가에 대해 구태여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내가 처음 사랑하게 된 ‘오래되고 불편한 것’은 만년필이었다. 열일곱 살 때 처음 접했던 만년필은, 60년대 현대 소설에서나 읽고 상상해왔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백화점의 한 문고에서
Y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함께할 공모전 이야기도 나누고, 방학 때 유럽이나 태국 여행을 가자고 대화했다.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Y가 현재의 것들에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고 있음을 보았다. 반면 나는 Y에게 지금 하는 모든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Y는 그런 내가 번-아웃을 겪고있다고 말했다.나는 왜 현재에 행복을 느끼지 못할까. 사실 내가 쫓는 곳에는 행복이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나를 드러내는 말에는 진심이 아닌 알량한 자존심만 담겨 있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흔히 여기는 ‘멋진 생각’을 갖기 위해 발버둥 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수많은 역설적 진리들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안을 비워내야 한다는 사실이나 처음의 시작에는 필연적으로 마지막 이별이 함께한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중학교 문학 시간에 배웠던 ‘역설’의 개념은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완전히 반대된다고 생각했던 모순된 개념들이 사실은 복잡하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내가 소설 속 등장인물의 입체성에 병적으로 주목하는 이유와도 엮어 말할 수 있다.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실망이 두려워 모든 것에 기대를 걸지 않았던
당신과 나는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처음부터 이게 무슨 말이냐며 당황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은 내가 될 수 없다.얼마 전 동생이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언니는 남들이 언니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나도 나를 이해 못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이해 하겠어.”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와 공감은 사람의 관계를 풍족하게 만든다. ‘내가 만약 당신이라면’의 주문을 덧붙이기 시작하면, 관계의 관절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고. 그래서 우리 가족은 여행을 갈 때마다 주변을 눈으로 보기보다 사진 프레임 안에 담아서 봤다. 관광지를 갔다 하면 체감상 열 걸음에 한 번씩 사진을 찍었다. 내 눈에는 이 산이 그 산 같고, 이 나무가 저 나무 같은데 매번 풍경이 달라질 때마다 사진을 찍어야 했다.그런 아버지가 속으로는 답답했다. 어쭙잖게 풍경을 찍어내는 카메라보다 내 눈이 더 정확한데 굳이 사진을 찍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반발심과 오기로 어릴 적의 나는, 사진 명소에서도 가만히 눈으로만 구경하고 서 있었다
가볼 수 없는 곳에 대한 그리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사랑, 겪어보지 않은 것들에 관한 애정. 그런 삶과 사랑의 원천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지닌 예술을 보면서 나는 그런 질문을 했다. 이야기 속의 모든 것들이 현실도 사실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야기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예를 들면 나는 무진이 그립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으며 눅진한 안개가 서린 그곳을, 윤희중이 걸었던 길을, 고향을 맞이하며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받아들
참 모순적이지 않은가.햇빛 쨍쨍하고 높은 하늘을 보고서 우울하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밤에는 죽죽 젖어가며 행복하다는 것이. 인생을 그리 부단히 복잡하게 살아왔다. 뭣하나 좋지 않은 게 없었고 뭣 하나 싫지 않은 것도 없었다. 행복할 때에 걱정에 죽고 걱정할 때에 행복에 미친다.그래서 그런지 사랑도 너무 쉽고 동시에 어렵다. 내 몸과 눈이 어려서, 서로의 반짝이는 눈에 반하기 쉽고, 나의 모든 것을 주기가 너무너무 쉽다. 사랑의 진입이 세밀하게 자극적이고 간단하다. 단 한숨의 눈 마주침으로 인해 나는 푸른 마음을 맡긴다. 단 한
“농구 좋아하세요?” 채소연이 묻는다. “네. 아-주 좋아합니다. 난, 스포츠맨이니까요.” 강백호가 대답한다. 대사나 인물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농구 만화 슬램덩크의 한 부분이다. 워낙 명장면이 많은 만화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손에 꼽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나는 슬램덩크는커녕 농구의 ‘농’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KBL, 국가대표 경기, 심지어 농구 웹툰까지 보는 내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뭔가 엄청난 사연으로 이렇게 된 것 같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시작은 정말 사소했다. 우연히
드라마 은 비단 서바이벌 게임이 줄 수 있는 긴장감 및 서스펜스를 잘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연과 배경을 가진 등장인물들을 조화롭게 배치하였다는 점에서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 중 의학도로서, 참가자로 등장한 의사의 모습을 조금 더 유심히 관찰하고 생각해보았다. 의사는 의료사고로 인해 빚을 진 탓에 오징어 게임에 참가한다.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이 의사는 일부 주최 측과 몰래 연합해 사람들의 장기를 적출하는 수술을 돕고, 게임에 필요한 정보와 물자를 얻는다는 특이점이 존재한다. 이러한 의사로부터 불법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