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태어난 아기들은 모두 열심히 씻겨야 한다. 그리고 갓난아기가 최초로 받은 주변 인상에서 잠시 쉬도록 한 다음에는 매질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촉구하여야 한다. ‘쓰지 마! 쓰지 마! 작가가 되면 안돼!’ 만약 이러한 태형에도 불구하고 이 젖먹이가 작가적 소질을 드러내기 시작한다면, 살살 구슬리기를 시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구슬리기도 도움이 안 된다면 그 때는 단념하고 이제 ‘가망 없음’이라고 써라. 작가가 되고자 하는 열망은 불치의 병이다.” 안톤 체홉 선집『개와 인간의 대화』에 실린「신참 작가를 위한 지침서」의 첫 문단
지난 1달간의 짧다면 짧고, 길다하면 긴 수습 트레이닝이 끝났다. 평소에 실패가 두려워 도전을 잘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나는 성대신문에 지원서를 낸다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떨어지면 어쩌지? 면접에 가서 아무 말도 못하면 어쩌지? 하는 고민 속에 대학생활의 첫 도전으로 택한 것이 성대신문이다. 기자라는 직업을 평생직장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성대신문에 쏟는 많은 시간이 공중으로 날아가는 시간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성대신문의 일부를 체험했던 트레이닝 기간 중에 이러한 두려움이 쓸 데 없었다는 것을
부서배치를 받고 나서는 뿌듯함보다는 당혹감이 밀려들어왔다. 이젠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것만 같아 하루 종일 마음이 뒤숭숭했다.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머릿속의 물음에 걱정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반 생활, 연애, 동아리, 공부.. 괜히 또 일을 ‘벌렸다’ 싶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건 아닐지 걱정이 앞섰다. 이 걱정의 파도가 쓸려 내려가면 다시 밀려오는 파도에는 뒤쳐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실려 왔다. 청년 실업률은 해가 갈수록 사상 최고치를 갱신해 가는데 나는 여기서 이렇게 내 꿈을 찾고 있어도 되는 것일까
4주에 걸친 수습기자 트레이닝이 끝났다. 수습기자 트레이닝을 마치며 소감문을 작성하기 위해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수습기자 트레이닝이 끝났다는 사실이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4주라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숨 가쁘게 트레이닝이 진행된 것 같다. 입학식 때 이후로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자과캠에 트레이닝을 받으러 가기도 하고, 주말에도 나와서 트레이닝을 받았다. 갑자기 바빠진 스케줄에 허둥거리기도 했고, 수업 과제와 트레이닝 과제를 모두 완료하기 위해 밤을 홀딱 새우기도 했다. 트레이닝에 모든 신경을 세우다
과제와 트레이닝이 끝없이 쏟아지던 트레이닝 기간 동안은 제 불평 역시 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트레이닝을 마무리하며 한 숨 돌리는 지금에 와서는, 어느새 힘들었던 기억은 사라지고 ‘그래도 할 만 했다’가 된 것이 사실입니다. 수 차례의 지면평가를 거치면서, 신문을 만드는 법 만이 아니라 신문을 읽는 법 자체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신문의 어떤 요소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왜 필요한지 배워나가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신문의 의미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신문사를 처음 찾아와 시험을 치르던 때부터 신문은 무엇인지,
사실 성대신문사에 들어오기 전까지 나는 내 일 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그저 그런 학생이었다. 남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았고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그래서 학교 일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로 한 학기를 내 일을 하고 수업을 들으면서 보냈다. 이렇게 의미 없이 1학기가 지나갔고, 2학기에도 그러한 생활이 계속 될 것 같아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그러던 중, 성대신문사에 들어오게 되었고 트레이닝을 받았다. 한 달 정도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
트레이닝이 끝났다. 트레이닝을 받을 때는 그리 길게 느껴지더니 막상 끝나고 나니 벌써 끝이라는 게 실감이 안 난다. 기억들이 교차된다. 트레이닝 1주차 땐 오만했다. ‘신문사 할 만하겠네.’라 생각했다. 2주차 땐 다소 겸손해졌다. ‘신문사 쉽지는 않겠네.’ 3주차 땐 실감했다. ‘신문사 되게 어렵구나.’ 4주차 땐 겁났다. ‘내가 이걸 진짜 할 수 있을까?’ 새삼 선배 기자들에게 존경심이 들었다. 트레이닝으로 슬쩍 엿본 것만으로도 그 업무량이나 책임감 등이 숨이 막힐 정도인데 일선에서 뛰고 있는 이들은 얼마나 더할까 싶었다. 특히
“안녕하세요. 성대신문 수습기자에 합격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나는 정말 소리 내어 “망했다”고 중얼거렸다. 수습기자 지원서를 냈을 때는 성대신문사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오히려 아무 고민없이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점점 신문사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면서 후회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 모두 내가 기자에 지원했다 했을 때 동아리나 열심히 하지 1학년이 무슨 그런 걸 하냐고 했었다. 그런 상태에서 논술, 면접을 봤으니 잘 봤을 리가 없는데, 그래서 오히려 떨어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있
시간이 참 빠르다. 학교 홈페이지에서 추가 수습 모집에 대한 공고를 보고 어색하게 성대신문사 문을 두드렸던 것도 벌써 한 달이 지나갔고, 속성으로 진행된 수습 트레이닝도 어느덧 종착역이 보인다. 사실 성대신문사에 지원하기 전에는 성대신문을 제대로 읽어 본 적도 없었고, 학내 언론사에서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도 잘 알지 못했었다. 단지 ‘학생 기자’의 신분으로 학교를 대표하는 신문을 만드는 기관에서 일한다는 것이 막연히 멋져 보였었던 것 같다. 신문사 활동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동아리와 같은 범주 내에서 이해했
성대신문 논술시험 날, 대학신문은 그 구성원이 학업과 신문사 일을 병행해야하기에 어떻게 보면 일반 기자보다 더욱 힘든 자리라고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생각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러 선배들이 신문사 일을 더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휴학을 한 모습에서도 그렇고, 방학 중 슬슬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개학 이후의 활동 계획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든다. 수습기자 때 트레이닝을 위해 여러 장소로 가는 것을 보고 동기들이 많은 농담을 건네곤 했다. 2학기 때부터는 못 보는 것 아니냐는 말부터 신문을 위해 학교를 들어온 것 같다는
수습기자 면접 때 ‘성대신문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기사가 뭐였죠?’라는 질문을 받았었다. 솔직히 그동안 성대신문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몇 번 안됐기에 나는 속으로 많이 당황했었다. 당시 횡설수설하면서 간신히 상황을 모면했지만 집에 오는 지하철 안에서 그 질문을 여러 번 곱씹어봤다. ‘내가 읽었던 기사 중에 뭐가 가장 좋았었지? 아니, 그전에 성대신문을 많이 읽어보기나 했었나?’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신문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으면서 기자가 되겠다고 지원한 내가 창피해졌다. 그리고 성대신문 기자가 된다고 해도 잘할 수 있을
글을 쓰는 것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좋아했고, 그동안 공책에 적어왔던 다듬어지지 않은 나의 생각과 감정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글을 쓰고, 다양하게 경험하고 많은 것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에 성대신문에 지원하게 됐다. 1학년 1학기, 주변 친구들은 처음 대학에 들어왔으니 조금 더 이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라며 말렸지만, 졸업한 후 나는 무언가를 하나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대학 합격 통보를 받은 뒤 시간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가니 어느새 입학식이 와있었다. 길다면 긴 3개월의 시간동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것이 없었다.
전역을 하고 다시 학교에 나온 지 보름을 갓 넘긴 3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수습기자를 모집하는 성대신문 부스를 찾아 “여기... 복학생도 받아주나요?”하며 아직 군인 티가 나는 짧은 머리를 긁적였다. 팜플렛을 건네며 “네, 들어오실 수 있어요”하고 상냥한 웃음을 지어보인 건 김도희 정기자였다. 퇴계인문관 강의실로 향하며 팜플렛을 펼쳐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김태형(철학12) 편집장의 말. 이어서 든 생각. ‘여기 편집장이 철학과 후배였어?’ 스물 셋, 적지 않은 나이의 복학생이 어린 선배들과 부대끼며 학보사 생활을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밥을 먹고 가지고 있는 제일 편한 옷을 골라 입는다. 그리고 신문사로 출근한다. 신문사에 들어서 내 자리를 찾아 앉는 그 순간 ‘아. 오늘도 이렇게 시작이네’ 라는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성대신문에 들어 온지 한 학기 만이다. 누가 그랬던가, 3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3월 4일, 멈춰 있는지 의심이 가던 국방부의 시계도 결국 한 바퀴를 돌았고, 나는 당당한 민간인이 됐고, 학교는 개강을 했다. 남자 동기들은 여전히 칙칙했고, 여자 동기들은
"나 신문사 들어갔다."순간 나를 쳐다보는 눈에 담긴 놀라움과 의아스러움. 그런 걸 왜 하느냐는 반문도, 대단하다는 말들 모두 나에게는 신선했다. 도대체 신문사가 어떠한 곳이길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일까.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많다. 그렇다고 욕심쟁이는 아니다. 순간적인 동기부여에 현혹되어 이것저것 하고 싶은 나는 '하고재비'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린다. 신문사를 지원하는 데 가장 큰 동기부여는 과학 전문기자라는 나의 꿈이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오히려 하고재비의 동기부여에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을 성대신문에서 수습기자로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이거나 신문사 웹사이트를 기웃거리다 우연히 이 글을 보게 된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후자는 관심 밖이다. 그렇다면 역시 당신을 신문사에 대한 궁금증에서 이 글을 클릭하게 된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겠지, 물론 편집장님도 이 글을 보겠지만.8주의 수습기간이 지났다. 부서배치도 끝났으며, 방중활동을 시작한지 보름이 지났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옆에는 이라는 베스트셀러가 놓여있고, 그 옆에는 ‘중앙일보’, ‘시사IN
2013년 10월 나의 성대신문 기자 생활이 시작됐다. 수습기자로서의 한 학기. 배운 것도 느낀 것도 참 많았다. 처음 수습 트레이닝을 해준 이종윤 기자와 문화부로 이끌어준 조수민 기자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종윤 기자는 처음 만나는 수습기자들의 어색함을 달래주고자 고기부터 시작해 치맥까지 배불리 사주셨다. 자유롭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트레이닝을 진행해 줘서 성대신문에 갖고 있던 딱딱한 선입견을 풀어줬다. 처음 시작이 기분 좋아 마지막 트레이닝까지 견뎌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조수민 기자는 문화부로 이끌어 줬다는 점에서
피곤해 보이는 두 명이 강의실로 들어왔다. 그들은 팜플렛을 나눠줬다. 관심 없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만취한 상태로 집에 돌아와 가방을 정리했다. 성대신문 팜플렛을 다시 보게 됐다. 성대신문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틀 후 나는 성대신문 문을 열고 있었다. 나에게 논술은 지옥 같았다. 문제는 평소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관심도 없던 주제가 나왔고 망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면접은 사람 많은 강남역에서 발가벗은 기분이었다. 질문에 대답하면 면접관들은 피식 웃기 시작했고, 역시나 망한 냄새가 내 발끝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성대신
내가 처음 신문사에 들오려고 했을 때, 내 주변 사람들 모두가 나를 말렸다. “거기 엄청 힘들대.” 사실 나에게 그런 말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영부영 보낸 나의 스무 살, 대학교 1학년 1학기를 만회하려면 힘들어도 보람찬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처럼 또 성적을 잘 받기 위해 공부나 하는 세월을 보내기엔 나의 대학생활이 너무 허무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신문사에 지원했고, 60-2기 수습기자가 됐다. 하지만 트레이닝을 해 나가면서 점점 힘들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나의 개인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