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에 동행하면서 가보게 된 소록도의 첫 인상은 ‘아름답다’였다. 남해에 있는 섬답게 바닷물이 맑고 푸르렀는데, 고향인 서해 근처에서 보던 흙탕물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소록대교를 건너 섬에 들어서자 소나무숲길이 보였다. 이어 나타난 소록도 중앙공원에는 수목원을 방불케 하는 다양한 종류의 관상수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공원에는 나무들 외에도 여러 조형물과 돌들이 보기 좋게 배치돼있었다. 소록도 중앙공원 외에 일반인에게 공개된 또 다른 장소인 박물관 역시 깔끔한 현대식 건물로 보기 좋게 지어져있었다.하지만 소록도에 대한 인상은 본격적
우리 신문사에서는 기자단을 대상으로 벌점제를 운영하고 있다. 대개 회의시간을 지키지 않거나, 주어진 시간까지 해야 하는 일을 하지 못했을 때 벌점을 받게 된다. 신문사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들을 지키지 않았을 때 벌점을 받게 되지만, 그럼에도 기자들의 부담은 상당해 보인다. 규정으로 만들기 전에는 융통성을 발휘해 어느 정도 상황을 봐주던 사항들에 대해서도 더 이상 융통성이 발휘되기 어렵기 때문이다.‘융통성’이란 단어는 규정을 집행하는 사람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든다. 지각을 하는 사람에게 벌점을 부여해야 하는데, 만약 가족모임이
올해는 한·중 수교 25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중국과의 수교가 고작 25년밖에 되지 않았냐고 말할 만큼 여기저기에 중국이 있고 중국인이 있다. 사용하는 대부분의 물건에 ‘Made in China’가 박혀있고, 어느덧 캠퍼스 주변에 중화요리가 아닌, 중국식 음식들을 판매하는 식당들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조별과제를 위해 조모임을 하면, 중국 학우를 만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가끔 우리 학교를 ‘작은 중국’이라고 말하는 학우들이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중국에 대해서 잘 아세요?”라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3월의 개강이 9월보다 더욱 설레는 이유는 어쩌면 해가 바뀌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른 기관에서는 한 해의 시작을 한겨울인 1월에 맞이하지만, 대학은 봄기운이 피어오르는 3월에 학기를 시작한다는 점도 개강의 두근거림을 더하는 것 같다. 3월의 대학가는 새로운 사람들이 가득하고, 대학생들은 새로운 후배를 맞이하게 된다.과거 대학에는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밥을 사는 것이 일종의 미덕이었다. 신입생이 3월에 자기 돈으로 밥을 사먹는다면, 그것이 곧 선배들의 잘못이 되는 시기였다. 식구(食口)란 원래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성대신문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학내 문제들로 수많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것을 지켜봐 왔다. 무수한 충돌 속에서 대학언론은 어떠한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는 아직도 고민이 많지만, 언론과 마찬가지로 대학언론도 ‘눈치 없이’ 행동해야 한다는 가치관만큼은 갖게 됐다.흔히 언론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표현된다. 한 번 보도가 되면 걷잡을 수 없기에 오보가 나도 정정하기는 쉽지 않다. 즉 보도하는 행위 자체가 언론의 역할이면서도 권력이 된다. 이 때문에 입법, 행정, 사법에 이어 제4의 권력이라는 언론이 정치권력과 유착한다면 정치권에 대한 파급
지난 15일, 서울 도심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대학생 시위에 취재차 참여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뺨이 얼얼해지는 날씨에, 마로니에 공원에 모인 사람들은 모인 지 한 시간쯤 후에 도로를 걸으며 행진하기 시작했다. 학보사 생활을 하면서 시위 취재에 나간 것은 여러 번이었지만, 이번 시위에 참여하면서는 꽤 놀랐다. 시위 때 도로로 행진하는 것은 경찰의 협조하에 이뤄지는 것이기에 법적으로 문제가 없지만, 교통이 통제된다는 불편함에 버스와 자가용을 타고 있는 시민들의 볼멘소리가 들리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겉으
촛불은 꺼질 줄을 모른다. 꺼지려고 해도 꺼질 수 없는 밤이다. 학내신문이라고는 해도 촛불이 꺼지지 않는 현 시국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생들이 학외에서 참여하는 다양한 활동을 취재하러 가기도 했지만, 우리 안의 목소리는 어떠한가도 들어보고 싶었다. 발간일은 정해져 있기에 주어진 시간은 짧았다. 객관식으로 구성한 설문지라면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응답자를 확보할 수 있었겠지만, 현 상황에 대해 자유로운 의견을 적을 수 있도록 질문지를 구상한 이상 응답자는 더 적을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은 과방, 학생회, 학회, 동아리
누군가 기자는 펜으로 싸우는 직업이라 했다. 기자라는 직군을 묘사할 때 ‘싸운다’는 다소 격한 표현이 사용되는 건 그들의 치열한 삶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그러나 기자 그 스스로 싸운다고 말할 수 없을 때의 무력감은 치열함을 무색하게 한다. 어떤 이들은 그 무력함을 가장 치열해야할 시기에 느꼈다. 언론보도를 통해 비선실세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이 시작되며 ‘언론이 언론다운 일을 했다’며 찬사를 받는 한편, 일부 기자들은 의혹에 대한 취재 건의를 거부한 보도본부를 비판하며 농성을 벌였다. 한 지상파 방송사의 보도본부장은 자사 기자들이
지난 3일, 노벨생리의학상을 시작으로 올해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고 있다. 매년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될 때마다 한국인 수상자가 없는 것에 대해 보도되곤 하지만, 올해는 노벨상이 유독 화두가 되고 있다고 느껴진다. 올해 첫 번째로 발표된 노벨상 수상자가 일본 도쿄공대 명예교수로, 같은 아시아권 국가인 일본은 3년 연속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는 사실이 우리나라의 상황과 대조된 여파다. 보도된 많은 뉴스는 일본이 기초과학 분야에서 현재까지 총 22명의 수상자를 배출한 것과 비교해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국내 학문 풍토에 대한 자성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 같은 학교 행사가 끝나고 학부모들이 준비한 간식을 선생님, 친구들과 나누어 먹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한 번쯤은 이와 비슷한 기억이 있을 정도로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은 이러한 풍경을 학창시절 내내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들과 함께 간식을 드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근 몇 개월간 잊을 만하면 뉴스에 나와 이제는 친숙해진 그 이름, ‘김영란’법이 드디어 시행되기 때문이다. 김영란법은 학교에도 적용되어 교사는 학
평가받는 것이 일상이 된 세상이다. 개인의 일생을 돌아볼 때 ‘평가에서 자유로운’ 시기는 몇 년이나 될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글을 떼는 순간부터 직장에 입사해 끊임없이 경쟁력을 확인받아야 하는 시기까지. 혹은 그 이후까지 평가는 이어진다. 그리고 평가 결과에 맞춰 자신을 정비하는 것은 어린아이에게도 익숙한 일이 됐다. 평가를 받는 것은 개인뿐만이 아니다. 대학 또한 평가의 잣대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대학구조개혁평가 계획이 재작년에 발표되고 작년에 평가 결과가 발표되면서 대학들은 일괄적인 첫 ‘공식 성적표’를 받았다. 지
또다시 개강이 왔다. 방학 말미에는 개강이 싫다는 볼멘소리를 하게 되면서도 개강 후의 캠퍼스를 걸어 다닐 때면 활기찬 분위기가 몸을 감싼다. 새 식구를 맞으려는 학내 단체들이 건물 앞에서 힘찬 목소리로 홍보를 하고 있을 때면 새내기도 아닌데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언제나 그렇듯 ‘시작’이라는 단어는 설렘과 함께 온다. 시작의 설렘을 안은 건 비단 혼자만이 아닌가 보다. 학기 초마다 수습 기자 모집을 할 때면 각자 나름의 희망 사항을 가지고 지원한 이들의 설렘과 마주하게 된다. 자신이 기대했던 바를 신문사 안에서 실현할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