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선조와 광해군의 시대에 김개시(金介屎)라는 인물이 있었다. 천민의 딸로 태어나 선조 때 궁녀가 된 여인으로, 선조가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는 상황에서 광해군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했다고 전해진다. 자칫하면 영창대군에게 밀려 왕이 되지 못한 채 온갖 참소와 비난에 휩싸여 처형당할 수도 있었던 자신의 운명을 왕으로 이끌어준 그녀에게 광해군의 마음이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자연스레 광해군의 즉위 후 그의 총애를 받게 된다. 단순히 사랑받는 궁녀 혹은 애첩이 되었다면 다행이었겠지만, 김개시는 광해군을 등에 업고 국정에 깊
시간이 지나 영원히 올 것 같지 않던 고3 시절의 끝에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마주한 대학 생활은 상상과 많이 달랐다. 낭만적인 캠퍼스 라이프, 잔디밭에서 하하 호호 웃고 떠들던 드라마 속 청춘은 말 그대로 드라마였을 뿐이었다. 교과서 속 사회 운동의 주체였던 ‘대학생’을 동경했던 나는 끝없는 과제와 수업 속에서 낭만보다 피로를 먼저 배웠다. 처음 겪는 대학 생활에 요령도 없이 정면 대결만 하니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바빴던 일상 속에 내가 동경했던 ‘대학생’의 삶은 점점 멀어져 갔다.그랬던 내 인생에서 처음으
고등학생 때 철학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도 철학과에 원서를 넣었었다. 덕분에 주변으로부터 크고 작은 질타를 받은 기억이 있다. 당시 내 고집을 회상해보자면 이렇다. 나는 철학자들의 말과 생각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내가 무지했던 영역에 그들의 통렬하고 예리한 지적이 자리 잡을 때의 희열은 쉽게 느끼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들은 항상 옳았기에, 그들을 통해 더 많은 걸 배우고, 그들의 생각을 훔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렇게 그들의 생각을 배워 나간다면, 나도 위대한 사람이 되겠구나 싶었다.철학과에 가진 못했지만, 대학에 와서도
사람은 하루 동안에도 많은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아침에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며 계획을 곱씹기도 하고,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시계를 바라보며 오늘은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거나, 인터넷 기사를 읽으면서 혀를 몇 번 차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한탄한다. 이처럼 생각의 방향과 무게는 다양하다. 하지만 그 많은 순간 중에서도 가장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순간은 단연 자기 전 이불 속이다. 나는 하루의 일을 마무리하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으면 우선 내가 지금부터 몇 시간 잘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그리고는 빨리 자야
“신념을 위해 목숨을 버린 잊혀진 날의 사람들목숨을 위해 신념을 버린 오늘 이 땅의 사람들죽지 않고 살기 위해 아무런 말할 수 없는두려움에 자신을 숨겨버린 사람들거짓말과 흥정으로 착취하는 사람들사람을 먹는 괴물로 변해버린 사람들소리없이 목을 조르는 숫자들 저편에서 괴물들이 살아 숨쉬는 나라밴드 럭스(Rux)의 ‘괴물들이 살아 숨쉬는 나라’에 나오는 가사의 일부이다. 지금 이 곳은 괴물들이 살아 숨쉬는가, 사람들이 살아 숨쉬는가? 아니, 둘다 같은 문장이 될 수도 있겠다.우리는 보는 것을 믿지만, 보는 것을 모두 믿지
얼마 전 한강에서 열리는 작은 마라톤대회에 다녀왔다. 고등학교 때 체력장을 하면 다른 종목은 몰라도 오래달리기만큼은 반에서 1등을 유지해 오던 나였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마라톤 10km 대회를 신청해버렸다. ‘나 정도면 마라톤에 소질이 있으니까 잘하겠지?’ 공부는 안 했어도 시험은 잘 치고 싶은 은근한 기대처럼, 마라톤 전날 밤까지도 고등학교 졸업 후 뜀뛰기 한번 하지 않은 나는 10km 마라톤에 대한 부담감이 전혀 없었다. 남들보다 빠르고 쉽게 완주하는 것을 꿈꾸며 평소처럼 새벽 2시에 잠들었다. 하지만
역대급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이 시기에 진부한 단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매년 상상도 못할 방법으로 상대방을 깎아 내리고 갈등을 조장하는 풍문들이 퍼졌기 때문이다. 선거철이다.스파링은 언제나 상대방이 명확할 때 벌어진다. 때리기 좋은 샌드백은 재미없다. 승리라는 목표를 위해 달려가는 선거운동본부는 상대선거운동본부라는 거대한 기함을 쓰러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먹을 뻗는다. 상대방보다 역량이 낮은 선거운동본부일수록 상대방을 깎아 내리려는 유혹에 더 취약하다. 그 과정에서 관전하는 학생들은 더티 복싱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
마냥 어릴 때는 세상이 동화와 같을 줄 알았다. 나는 여자였어도 공주이기보다는 기사였고, 용감하게 악당과 맞서 싸워 사람들을 구했다. 글을 더듬더듬 읽었어도 불을 뿜는 용과 모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이 세계에 대한 기대는 내게 마치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것만큼의 신비로운 힘이 있었다. 아쉽게도, 조금씩 커가면서 맛본 가장 큰 배신은 “동화는 동화일 뿐”이라는 것. 이야기책에서 나오듯이 나쁜 악당이 실체화되어 내 앞에 나타난 적도 없었고, 무엇보다 나는 타고난 영웅이 아니었다. 허나 어릴 때는 개의치 않았다. 대신 빨리 어른이 되
지난 10월 27일 목요일 오전 9시에는 우리 학교 교수님들께서 교수회관에서 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규탄하는 시국선언을 하셨고, 같은 날 오전 11시에는 총학생회도 시국선언을 진행했다. 이 뿐만 아니라 11월 3일 목요일에는 다산 경제관과 퇴계 인문관 사이의 필로티에서 사범대 학생회 주관으로 전국 예비교사 동시다발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필자는 10월 27일에 진행된 시국선언에는 수업으로 인해 참여하지 못했지만 11월 3일 기자회견은 지나가는 도중에 우연히 목격할 수 있었다.올해 대학을 입학해서 2학기 째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필자로써는
매일 주말 아침 아홉시가 되면 항상 나는 동네의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편의점으로 들어와 조끼를 입고 나면 나는 그 자리에서는 그저 편순이로 존재할 뿐이다. 담배를 뜯어 진열하고, 진열대를 청소하고, 매장 이곳저곳을 정리하면서 손님들을 응대하다보면 꽤나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어떤 어머니는 ‘편순이’인 나를 무시하며 아이에게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어린 나를 얕잡아 보는 몇몇 어르신과 중장년들은 반말을 내뱉거나 예의가 바르다는 맞지도 않는 칭찬을 읊조리며 내 손을 덥석 잡아 주물럭거리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편순이’
오늘 아침 일어나서 가장 먼저 손에 잡힌 것은 요란하게 알람을 울려주던 나의 핸드폰이다. 빨간색 알람 중지 버튼을 누르고 나서 내 손은 곧장 파란색 SNS 애플리케이션 아이콘으로 향한다. 일어나지도 않은 채 한 손으로 핸드폰을 잡고 한참을 엄지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내리며 보는 것은 3분 남짓한 동영상들, 주변인들의 근황을 알려주는 사진과 글, 자잘한 세상의 소식들, 그렇지 않으면 이런저런 맛 집 광고들이다. 이를 보는 시간 동안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 것 없다.며칠 전 친구들과 영화관에 갔다. 평소의 나
#김밥에_단무지는_빼주세요_소리_나니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화장실 칸에서 김밥 먹는 복학생’ 이야기이다. 1인 가구의 비중이 늘어나고 혼자라는 소재를 다루는 TV 프로그램들이 주목받는 요즘이기에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보단 다들 가볍게 우스갯소리로 웃어넘긴다. 그런데도 이런 얘기가 인터넷에 올라온다는 건 아직도 혼자 밥 먹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필자도 20살까진 편의점에서 라면 먹는 것도 어려워서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빵이나 김밥을 먹곤 했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마주치거나 사람들이 왜 혼자 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