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2학기, 대학생활의 반이 거의 다 지나가버린 시기이지만 난 미친 듯이 공부를 해보지 도 후회 없이 놀아보지도 못했다. 그저 빠르게 흘러가버린 시간에 몸을 맡기며 살다가 갑자기 한 느낌이 들었다. 졸업한 후에 떠올릴만한 나만의 역사를 전혀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찾은 길은 성대신문에 입사하는 것이었다. 옛 말에 생각은 오래하되
아니, 학교에 이런 공간이 있고,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니?!신문사 지원을 위해 ‘똑똑‘, 조심스레 신문사 문을 열고난 뒤 들었던 나의 생각이다. 모두가 자기 책상과 자기 컴퓨터를 가진 채 바쁘게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저 겉핥기식으로만 학교를 다니고 있던, 풋내기였던 나에겐 이러한 모습의 신문사란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나의 공간에 옹
글을 쓴다는 것에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대학에 들어와서 그 것을 실현시켜 보고자 했다. 그 중 성대신문사가 내 눈에 가장 먼저 띠었고 기쁘게도 수습기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수습기자로 지내면서 내가 깨달은 점은 기자라는 직업이 기사만을 쓰는 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세상에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취재가 반
나는 내가 ‘어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주 이상한 이야기지만, 초등학생 때는 중학생이 되기 전에 지구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는 20살이 넘기 전에 반드시 어떤 사고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어른이 되기 싫었다거나 일찍 죽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아무 이유 없이, 직관적으로, 발밑에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근질근질, 가끔씩 내 안의 무언가를 밖으로 꺼내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난다.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이 강렬한 감각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언젠가부터 내게 기록은 습관이자 나를 표현하는 방식이 되었다. 내가 기록하는 것들은 순간순간의 어리고 여린 감정들을 나열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지만 나는 쉬지 않고 기록하고 또 기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기. 기자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에겐 이것이 쉽지 않다. 신문사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자란 직업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으로 들어온 신문사는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일을 하려니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신문사의 바쁜 스케줄은 날 가만두지 않았고 나는 일주일에
모든 대한민국 수험생들처럼 내게도 대학생활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별자리 동아리에 들어서 밤마다 별 보러 다니고, 기타 동아리에 들어서 엠티 때 장작불 앞에서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는. 그렇다면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이 기구한 사연은 정말 우주의 계략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내가 처음 성대신문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입학식 때였다.
삼월 이래로 많은 게 변했다. 고등학교 삼학년 때 나는 내가 내 모든 모습을 알았노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보다 자신에게 모진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수능을 앞두고 열심히 쓴 일기장에 아직 그 흔적이 남아있다. ‘오늘 나는 누구에게 어떤 어떤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은 사실 이러쿵 저러쿵한 이유이기에 부당하게 느낀 감정이고
한창 시끄러웠다. 대학에 입학한 후 겪었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학생기자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오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들어가고 싶었던 학보사였고, 대학에 들어간 후 멋지게 캠퍼스 곳곳을 누비면서 취재하는 모습을 꿈꾸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기 때문에 개강 후 설레는 마음으로 개강호 성대신문을 읽고 싶어 배포대를 찾았을 때, 그곳에 떡 하니 놓여있
누구는 잠들 준비를 하거나 누구는 친구와 잠깐 수다를 떨기 좋은 시각. 누구에게는 감성이 높아지는 시각. 바로 오후 11시 59분, 나는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나 생각해 봤다. 돌이켜 보건대, 나는 그때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몇 월 며칠 11시 59분엔 기사를 썼고, 몇 월 며칠엔 트레이닝 과제를 했다. 몇 월 며칠엔 다른 학우들처럼 책상 앞에 앉아 시험
어려웠다. '그'와 친해지는 것은. 1년 반이라는 기간이 무색할 만큼 그와 나 사이의 관계엔 진전이 없었다. 제3자에겐 내가 그에게 속해 있는 사람이라는 게 명백한 사실로 보였을 테다. 실상은 알맹이라고는 없는 형식적인 만남을 반복하고 있었을 뿐. 그랬다. 난 그의 핵심에 좀처럼 도달하지 못한 채 주변인에 머무르고 있었다. 2학년 2학기에 접어들 무렵,
신문사에서 지낸 2개월은 ‘흐려져 가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기자란 어떤 직업이고, 신문은 무엇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 견해는 단단하지만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건축물 같은 것이었다. 매일 신문을 읽었지만, 신문과 독자와 권력 간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성대신문에 내가 왜 지원했지. 정말 간단하게 다른 이유 없이 해보고 싶어서다. 원래 미래의 직업으로 기자를 고려해보기도 했다. 다만 이곳에 들어와서 생각이 바뀌었다. 기자로서 일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이곳에서 조금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기자의 업무는 정말 고된 작업의 연속이다. 처음엔 기사로서 무엇을 쓸 것인지 기사거리를 찾는다. 인터넷은 정보의 바
지난 1월과 2월 방중활동은 나에게 첫 성대신문사 생활이었다. 기대 이상으로 힘들 것이라는 면접 당시의 말은 한 치도 틀리지 않았고 지금 주어진 역할도 다소 버겁다. 글재주가 없는 나에게 기사를 쓰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지금 수습일기를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겪고 있는 것처럼. 지난 두달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신문사에서 과제를 끝낸 후 수원
비밀이랄 것도 없지만 비밀이라 부르고 말하자면 내 꿈은 기자가 아니다. 난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을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기에 기자란 직업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성내신문에 발을 디딘 것은 성대신문 사람들이 맛볼 수 있는 성취감과 이 모든 경험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분야를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기획을 잡고, 학교 구석구석을 찾아가
수습기자 시절 있었던 일련의 일들이 지금은 너무나도 희미한 기억으로 겨우 남아 있다. 시간을 탓할 것인가. 아니다,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나는 여기서 최고가 되겠다는 욕심으로 가득 찬 겁 없는 수습기자였다. 그런데 기억은 거기서 멈췄다. 당시 나는 '최선'보다는 '최고'를 택했다. 욕심의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나는 수습기자 시절에 최선을 다했다고는
나는 천성이 게으르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이 너무 좋았다. 인생 중 가장 힘든 시기라는 고3 시절에도 뭣 하나 치열하게 파고든 적이 없었다. 부모님은 이런 나에게 한 번쯤은 독해보라며 항상 핀잔을 주셨더랬지. 하지만 나는 공부에 대한 열정이 생기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수능공부에 대한 열정. 언어영역에서는 글을 빨리 읽고,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맞다’. 이 의미의 사전적 의미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1. 문제에 대한 답이 틀리지 아니하다. 2. ‘그렇다’, 혹은 ‘옳다’의 뜻을 나타내는 말 3. 외부로부터 어떤 힘이 가해져 몸에 해를 입다. 여기서 내가 사용하고자 하는 사전적 의미는 1번과 2번이다. 처음 신문사를 들어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