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6일과 8일 양 캠 전학대회가 열렸다. 전학대회는 전반적인 학생사업을 논의하는 회의기구로 총학생회장단, 단과대 학생회장단, 학과 학생회장단 등이 참여해 각 단위의 다양한 목소리를 낸다. 이를 통해 ‘학생자치’라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학생사회의 앞날을 결정한다. 이번 전학대회에서 학생자치의 근간을 규정하는 학생회칙을 대폭 개정하는 내용이 논의됐다. 단과대 학생회에 비례대표제 도입을 시도하는 개정안은 세밀한 부분을 보강해 2학기 전학대회에 재상정될 계획이다. 만약 2학기 전학대회에서 비례대표제 안이 가결될 경우 학생회 선거구조에
취재를 하다 보면 귀찮고 속상한 일도 있지만, 한바탕 놀고 와서 기사를 쓰는 일도 더러 있다. 이번 패션 기획이 그랬다. 옷 잘 입는 사람을 만나서 수다 떨듯 얘기하고, 디자이너 분께 옷 선물 받고, 플리마켓에서 쇼핑도 한, ‘데이트’ 같은 취재였다.전국대학생패션연합 O.f.f.의 모토는 Off the fixed idea of fashion, ‘패션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려라’다. 거리에 나가면 이상하게 옷 입는 사람이 천지라 패션만큼 고정관념 깨기 쉬운 분야가 어딨나,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그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다. 나는
기나긴 겨울이 끝났다. 이대로 그냥 가기 아쉬웠는지 겨울은 괜히 심술을 부렸다. 지난 일주일은 봄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씨가 꽤 쌀쌀했다. 특히 일교차가 무척 컸던 탓에 오전의 햇살만 보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외출에 나선 이들은 오후의 칼바람을 맞으며 후회하곤 했다.그날은 특히 추위가 심했다.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가 학교 정문 앞에서 열리던 날이었다. 간담회는 저녁 7시 즈음부터 시작했고, 딱 그 무렵부터 날이 더 심하게 추워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사람들
다시 봄이 왔다. 마치 친한 친구를 오래간만에 만난 것처럼, 어색할 시간도 없이 그렇게 봄은 스며들었다. 기사를 마감하고 커피 한 잔 마시려고 금잔디를 가로질러 갔다. 금색의 잔디는 당분간 초록을 품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길에서 우연히 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친구는 내게 자연스레 뭐 하고 사느냐고 물었다. “철학 공부하며 살고 있어”라고 대답했다. “그래? 그럼 복수전공은 뭘 하고 있는데?” 망설임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 중에서 이 질문 앞에서 망설이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을까. 누군가에겐 몇 날
처음 그들을 홍대 지하의 에스꼴라 알레그리아에서 만났을 때 기자는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1년 전부터 꼭 만나보고 싶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기자는 이들을 작년 초 포천 아프리카 박물관 착취와 관련하여 처음 접했다. 박물관 측의 인종차별과 착취에 분노했고 이들이 한국에 대해 나쁜 기억만을 가지고 가지 않기를 바랐다. 기자는 내심 이들이 다시 한국에 돌아와 공연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엠마누엘 사누와 아미두 발라니는 한국에 진짜 아프리카를 보여주기 위해 그들을 차별했던 땅으로 돌아왔다.‘진짜 아프리카’를 느
기자는 ‘힙합’을 좋아한다. 힙합은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진짜 자신의 속내를 내보일 수 있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많은 말을 삼키곤 했던 기자에게 둔탁한 비트 위 거친 랩은 절로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사람은 원래 상극의 성격을 지닌 자에게 끌린다’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나와는 전혀 다른 이 음악이 좋았다. 고등학교 시절 나를 지탱하게 했던 유일한 끈이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하나의 꿈이 됐다. 많은 독자에게 ‘힙합’이라는 음악 장르를 기사로 알릴 수 있게 된 것. 회의에서 ‘힙합’ 기획이 통과됐을
지난달 28일 자과캠 대강당. 새벽 5시 30분까지 진행된 개표 끝에 ‘스킨십’ 선본이 47대 총학생회에 최종 당선됐다. 길고 길었던 3주간의 총학생회 선거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학보사 기자로서 이번 시각면 ‘학생자치-총학생회 선거’ 기획을 준비하며 두 선본을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일주일에 몇 번씩 자과캠과 인사캠을 오가며 그들의 모습을 한 장의 사진에 담아냈고, 유세와 공청회 등에 참가하며 가능한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 했다. 그 과정 동안 주위에서 정말 많은 말을 들었다. 특정 후보에 대한 인신공격적인 비난과 정책이나 방향
장학금이라는 단어에 민감하지 않은 학우는 없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크게 걱정할 일이 없었지만, 사립대학에 진학한 이상 한 해 800만 원에 달하는 학비는 더 이상 부모님만의 문제가 아닌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등록금 자체를 인하하자는 움직임이 일다가도 현실의 여러 장벽에 부딪혀 등록금 인하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뒤에는 장학금이라도 받기 위해 혈안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내 주변 학우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장학금에 대한 고민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하고 있었다. 삼성장학금을 이미 받고 있는 친구들은 평점평균 3.5를 넘느
“저 여기 붕어빵 6개에 얼마인가요?” “네, 1000원이요.” 군것질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학원 수업이 끝나면 주린 배를 채우러 노점을 자주 이용했다. 값이 싸기도 했지만 점포에서는 느낄 수 없는 노점상분들의 친근함에 이끌려 노점에서 자주 군것질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2005년 어느 날 전날까지 분명히 있었던 붕어빵 아저씨가 없어졌다. 나는 궁금했다. 항상 이 자리에 계시던 분이 왜 사라지셨을까? 다음날이 돼서야 친구들로부터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용역 아저씨들이 노점상 아저씨들을
‘사라지는 총여, 위기의 학내 여성주의.’ 처음엔 사실 각 대학의 총여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여학생 체육대회 등 좋은 취지의 사업을 하는 한양대 총여학생회를 인터뷰하려고만 했다. 내게 총여학생회 학생총투표는 여학우들이 총여학생회에 효능감을 느끼지 못한 결과일 뿐이었다.하지만 취재를 시작하면서 내가 느낀 총여학생회는 학내에서 여성주의 문화 확산을 위해 고안된 기구였다. 백과사전에 나오는 여성주의는 여성 억압의 원인과 상태를 기술하고 여성해방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운동 또는 그 이론이다. 하지만, 남성인 나에게도 여성주의는 귀중
그동안 여러 기획보도 기사를 쓰면서 냉담한 반응의 취재원들과 수도 없이 부딪혔다. 상대가 드러내기 싫어하는 구석을 기어이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태세로 이것저것 캐물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테다. 학생 기자라는 신분에서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인정(人情)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했다. 그렇게 나도 그들만큼 냉담해졌고, 독해졌고, 날카로워졌다. 이번에도 그런 한주를 보내겠거니 준비하고 있었다. Flipped Class에 대해 취재하는 과정에서 해당 강좌를 운영하시는 교수님들께 취재 요청메일을 보내
지난달 25일 취재차 광주에 다녀왔다. 어릴 적부터 가족과 함께 여행을 즐기던 나로서, 광주에 간다는 것은 상당히 설레는 일이었다. KTX로 경부선을 타면 대전은 58분, 부산은 2시간30분이면 도착한다. 서울에서 부산보다 가까운 광주는 당연히 2시간이면 갈 줄 알았다. 웬걸 광주까지 호남선은 3시간40분이 걸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고속버스로도 3시간40분이 걸린다는 것이다. 똑같은 KTX로 달리는데 왜 경부선과 호남선에는 차이가 있는 것인지, 전라도를 대표하는 ‘예향’이자 ‘의향’인 광주 가는 길이 왜이렇게 힘든지 의문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