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대학교 때 연극반을 하면서 연기를 시작하게 됐어요. 제가 80년대에 대학을 들어갔는데 당시 사회 분위기가 대학생이라면 운동권 활동을 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던 시기에요. 제가 다녔던 대학의 연극반이 정치 성향이 강했어요. 저는 사회에 대한 불만은 많지만 겁이 많고 육체적으로도 약해서 연기를 학생 운동의 한 부분으로 삼았던 거죠. 육체적으로 힘들지도 않고 재미도 있으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도 있고. 대학을 졸업할 무렵 사상적으로 혼란감도 느끼고 인생에 대한 회의감이 많이 들었어요. 취직할 나이
현재 전통신 시장은 어떠한가.아무래도 전통신은 한복을 갖추고 신어야 해서 갈수록 수요가 줄어든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정성스럽게 만든 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시는 분도 여전히 계신다. 수요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지만 그래도 찾아주시는 분들을 위해 열심히 만들고 있다.화혜를 만드는 기술을 상품화해보자는 권유, 즉 대량생산방식에 장인의 기술을 접목하자는 제안을 거절했다 들었다.이 신을 대량생산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건 지금 생산되는 기성화에 지나지 않는다. 전통신이라 할 수 없다. 수고스럽지만 일일이 손으로 제작하는 데
전통주는 가양주(家釀酒)와 그 문화로부터 비롯된다. 가양주는 말 그대로 ‘집에서 빚은 술’을 의미한다. 전통주의 전성기라 불리는 조선 시대에는 집집이 직접 빚은 술이 있었을 정도로 술은 선조들의 삶, 그 자체였다. 불교 사회였던 고려 시대에는 승려를 중심으로 한 술빚기가 이루어져 사찰에서 빚은 술을 일반에 공급하는 것이 주된 풍토였다. 반면 유교 사회인 조선 시대에서는 조상숭배와 추수 감사제, 명절과 같은 세시풍속을 중시함에 따라 집마다 제사와 같은 가정 행사에 이용하기 위해 술을 빚는 우리의 고유한 가양주 문화가 널리 퍼지게 됐다
부부는 파주에 세운 작은 공장에서 감홍로를 만들고 있다. 공장의 사무실로 들어가자 ‘1980년 감홍로’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는 병이 눈에 띄었다. 이 명인은 그녀의 아버지가 담근 감홍로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증류식 소주의 하나인 문배주 기능 보유자였던 故 이경찬 씨의 딸이다. 故 이 씨는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 평양에서 양조장을 하며 문배주와 감홍로를 만들었다. “감홍로에 들어가는 재료나 제법이 집안 대대로 전해왔어요. 그걸 바탕으로 감홍로를 복원할 수 있었죠.” 이 명인이 어렸을 때부터 가업을 이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 달 14일 무더운 여름날, ‘흥청망청 술 연구소’의 이 열렸다. 두 개의 은은하게 노란 불빛 아래 술을 좋아하는 일곱 사람이 둘러앉았다. 관능 용어 연구모임은 술을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사람들은 총 세 번에 걸쳐 비커에 담긴 정체 모를 술을 음미하고 색, 향, 탁도, 질감, 맛을 적어 내려갔다. 먼저, 그들은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을 배경으로 온전히 술과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다. 모두들 진지하게 술을 음미하고 난 뒤, 농담이 오가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문화거리가 위치한 인사동에는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던 한국 전통주의 맛과 멋, 문화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설립된 전통주 갤러리가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협력해 만든 전통주 갤러리에서는 내·외국민에게 전통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며 전통주와 우리 문화를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다.한옥을 연상시키는 인테리어로 꾸며진 전통주 갤러리에서는 전통주를 체험할 수 있는 컨텐츠가 준비돼있다. 매일 3회씩 진행되는 시음체험 프로그램에서는 우리나라 전통주의 △종류 △제조방법 △특징에 대한 설명이 제공된다. 이어 전통주
그림을 못 그리는 건축공학과 학생“제 고향이 마산이에요. 고등학교 때 신문에서 봤는데 그때 마산에서 유명한 5대 갑부가 다 기업가고 한 분만 건축가였어요.” 박 동문에게 건축에 흥미를 느끼게 된 계기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건축가가 되면 돈을 잘 버는 줄 알고 건축학과를 가고 싶었어요. 건축가는 월급쟁이 같은 이미지가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인 것 같았거든요.” 박 동문은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와 같은 학교에 가기 위해 삼수에 도전했다. 하지만 결국 그 친구와 같은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우리 학교 건축공학과에 입학했다. 건
성대신문, 혼란스러운 대학생활을 풀어냈던 곳박 동문이 대학에 입학한 시기는 군사 정권 시절로 시위와 휴교의 연속이었다. “우리 때는 매년 시위를 했어. 4월이 되면 시위를 시작해서 방학까지 연결돼 수업을 거의 못했지.”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어수선한 시절에 의미 있는 대학생활을 하고 싶었던 박 동문은 2학년에 올라가자마자 바로 성대신문사에 들어갔다. 인터넷도 없고 신문도 많이 없어 읽을 것들이 귀했던 시절, 성대신문은 학우들에게 굉장히 인기 있었다. 신문이 나오는 날은 학우들이 당시 신문사가 있었던 학생회관 앞에 줄을 서서
성우를 희망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중학교 때 짝사랑하던 국어선생님이 있었어요. 수업시간에 돌아가면서 책을 읽어보게끔 시키셨는데 어느 날 제 차례가 왔죠. 그래서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읽었는데 선생님께서 그걸 보시고 나서 ‘우리 재헌이가 글을 참 잘 읽는다’며 ‘다음 시간부터는 다 재헌이가 읽는 걸로 하자’고 칭찬해주셨어요. 그게 너무 좋아서 읽기 연습을 정말 열심히 했죠. 그런데 하다 보니까 이게 굉장히 즐거웠어요. 그래서 목소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냥 책을 읽는 정도가 아니라 목소
영화감독을 꿈꾸다영화를 좋아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주 영화를 접한 장 동문은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특히 그는 어린 시절 ‘에이리언 시리즈’를 가장 인상 깊게 봤다고 말한다. 외계 생물이 나오는 SF공포영화는 그에게 색다른 경험을 안겨 주었다. 그는 군 시절 영화 관련 학과 진학을 결심했다. 제대 후에는 목표한 대로 우리 학교 영상학과에 입학했다. 입학 당시 그의 나이는 25살이었다. 동아리를 하고 싶었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결국, 그는 동아리 활동보다는 주로 영상을 찍고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절대음감의 공대생고교 시절 다른 친구들이 오랜 시간 진학을 고민할 때, 곽 동문은 단숨에 학교를 결정했다. “모의고사 성적이 내신보다 별로였어요. 성대는 가고 싶은데 제 점수로 갈 수 있는 과가 섬유공학과밖에 없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그렇게 곽 동문은 공대생이 됐다.그의 대학생활은 학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1, 2학년 때의 자신의 학점을 ‘선동열 방어율’이라고 표현했다. “그때는 정말 공부에 관심이 없었어요. 전역 후에는 학점 받기 쉬운 과목만 수강했고, 전공선택과목은 하나도 수강하지 않았습니다.” 3학년 이후에는
언제부터 PD의 꿈을 갖게 되었는지.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방송 쪽에서 일하고 싶었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이런저런 하고 싶었던 걸 했다. 음악을 하고 싶으면 음악을 했고, 격투기를 좋아해 격투기도 했다.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다 보니 격투기 웹진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관련 방송에서 일했고 PD란 것도 알게 되었다. 하고 싶은 것들을 좇다보니 끝에 PD가 있었고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나이는 아니고 졸업을 앞둔 상태였다.예능국으로 입사해서 교양국으로 옮기게 된 이유는.입사 때까지만 해도 오로지 예능이었다. 재미있고 즐거운
가난도 앗아가지 못한 열정어릴 적부터 아나운서가 꿈이었던 김 동문은 가난한 집안 사정 탓에 현실적인 이유로 회계학과에 진학했다.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하려고 했는데 성적이 부족한 거예요. 그런데 누가 회계학과에 진학하면 취업이 잘 된다 그러더라고요. 꼭 아나운서가 된다는 보장도 없고 집안이 어려워서 들어가게 된 거죠.” 그렇지만 그가 아나운서에 대한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학업과 성대방송국 활동을 병행하면서 그는 꿈을 키워나갔다.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을 스스로 벌어야만 했다. 과외가 금지됐던 시절, 단 기간에 큰돈을 벌
책을 사랑한 소녀, 수학을 만나다이 동문은 책을 사랑하는 소녀였다. 강남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그녀는 친구들이 학업에 열중할 때 학교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었다. “학군이 좋다는 이유로 위장 전입까지 하며 입학한 친구들이 있었어요. 모두 선행학습은 기본으로 하고 왔죠. 조그마한 구멍가게 딸이었던 전 그때까지 제대로 된 공부란 걸 해본 적이 없었어요.” 입시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던 시절, 신축 건물로 가득한 학교에서 오래된 느낌을 간직한 도서관 건물만이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곳에 있는 책들을 끊임없이 읽었죠. 그냥 도서관
오늘(26일) 4000여 개의 종이비행기의 비상과 함께 새내기의 대학생활도 시작됩니다. 에서는 새내기의 힘찬 비상을 응원하며 홍보 호외판을 제작했습니다. 1면에는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새내기들을 위한 조언을 담은 편집장 칼럼을 담았습니다. 2면에는 기자들의 친절한 설명이 담긴 ‘캠퍼스 가이드’, 3면에는 우리 학교의 한 해 일정을 요약한 ‘성균관 유생들의 한해’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은 새내기의 새 출발을 응원합니다.
1. 셔틀버스△인사캠출근 시간, 지하철 아닌 지옥철을 타고 왔다면 혜화역에서 강의실까지 걸어 올라가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럴 때는 혜화역에서 인사캠 운동장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하자. 혜화역 1번 출구로 나와 직진하면 정류장을 찾을 수 있다. 셔틀버스는 혜화역, 맥도날드 성균관대점 앞, 학교 정문, 600주년기념관 앞, 농구장 옆에서 정차한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운행되며, 평일은 오후 11시까지 운행되나 토요일은 오후 7시까지로 단축하여 운행된다. 요금은 300원이며 현금·학생증·티머니·캐시비·국민은행후
2월입학식(26일) : 자과캠에서 열리며 입학식이 끝난 후 새내기들은 새내기배움터로 바로 출발한다. 4월중간고사(20-26일) : 중간고사 후에 지친 학우들에게 학생회 및 단과대가 간식을 배부한다. 5월대동제(셋째 주) : 3일간 열리는 축제로 주점, 동아리 공연, 연예인 공연 등 즐길거리가 많다. ‘3S’는 벗어난 지 오래다. 6월기말고사(15-21일) & 종강 :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이 곧 종강으로, 시간표마다 종강 날짜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 종강 날부터 9월 1일 개강 때까지가 방학이다. 7-8월국토대장정 : 매년 총학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