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언론 쪽으로 진로를 생각하고 있니?”지난 학기, 성대신문 수습기자로 활동한다는 것을 밝히자 주변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내 대답은 이랬다. “뭐, 한 학기 활동하다가 일이 나와 잘 맞으면 그럴 수도 있고...” 사실 지금도 내가 언론직에 적성이 잘 맞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건, 내가 성대신문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학교생활을 누구보다 바쁘고 성실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처럼 동아리도 해보고 이것저것 재밌는 것들을 해봐야지 벌써부터 힘들고 바쁜 기자생활로 고생 하는 것은 아깝지 않느냐고
내 대학생활에는 성대신문이 없을 줄 알았다. 기사 쓰기는커녕 기성 신문을 포함하여 어떠한 글조차 읽지 않는 나에게 이 신문사는 ‘솜’ 같았다. 학교 다니면서 성대신문의 존재감을 체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습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고군분투하니 성대신문은 어느덧 내 관심에 젖어있었다. 그리고 ‘물먹은 솜’의 무게는 나를 짓눌렀다.성대신문은 얕보면 안 되는 곳이었다. 학교의 울타리에 있지만 학생과 학생기자는 달랐다. 기사를 쓰기까지 기획구상도, 취재도, 회의도 그 모든 것들에 장난기 하나 없었다. 회의가 끝나는 시간은 정말 회
글을 쓴다는 것은 수많은, 스쳐지나가는 생각들 중 몇 가지의 꼬리를 잡고 흔들어 다시 내 쪽을 향하도록돌려세우고 내 모든 궁금한 것들을 꼬치 꼬치 캐물으며 결국엔 그 생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나의 감정을 발견하고 마침내 그 어떤 감정들 보다도 순수한, 자아 의식과 마주하는 것이다. 자아 의식과 마주하기 까지 수많은 복잡한 생각들로 인해 혼잡스러운 상태였을지라도, 내 자아는 여전히 순수하다. 글로서 순수한 자아들은 교감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고 싶다. 나를 둘러싼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 하지만 그것들은 내가 아니다.
혼자서 수능을 한 번 더 준비해야 했던 나는 여유로운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모든 계획은 스스로 세워야 했으나 지키지 않아도 혼내거나 잔소리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 잠들고 싶을 때 잠드는 게 습관이었다. 그러나 입학 후,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너무 많은 일을 해야 하는 대학 생활에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었다. 패기와 호기심에 가득 차 뛰어들었던 신문사 역시 어느새 내가 ‘해내야만’ 하는 일들 중 하나가 되어있었다.한꺼번에 많은 양의 추억이 쏟아진 한 학기가 끝나고 겨우 방학이 되어서야 학기 중
새내기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의 시간이 흘러 어느덧 한 학기가 벌써 끝나 있었다. 20년을 채 살지 못한 삶에서도 얻을 수 있었던 시간은 참 빠르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상기한 순간이었다. 한 학기 동안의 수습기자 트레이닝을 거치고 나니 나도 성대신문 준정기자 꼬리표를 달고 나의 컴퓨터 자리가 생겼다. 트레이닝을 받을 때만 해도, 토요일 조판 날 철자오류를 검사하러 신문사를 들락거릴 때만 해도 나는 뭔지 모를 일들로 바쁘게 움직이는 신문사 기자들을 동경하며 나도 언젠간 그들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뽑고 다시 수정하고 검토
성대신문에 들어온 지 아직 2달이 체 안 지났다. 시간적으로 보면 그리 길지 않다. 그런데 왠지 내가 기자라는 사실이 낯설지 않다. 몸과 마음이 이미 성대신문에 가까워 졌기 때문일까. 트레이닝을 위해 인문캠퍼스를 생각보다 많이 왔다 갔다 했다. 그리고 과제를 하면서 기자란 것에 대해 고민하는 밤도 생각보다 많이 보냈다. 사실 처음에는 수습기자로서의 삶이 고역이었다. 끈기로 이어갔다. 그러다 몇 주가 지나니 오기가 생겼다. 한 달이 조금 지나가니 일상이 되었다. 얼마 전 기숙사 입주를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학우들을 봤다.
어렸을 때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글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기자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졌고, 성대신문에 지원한 계기가 되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기사를 쓰면 되니까 부담도 적을 거고 별로 안 바쁠 것 같다’는 예상은 수습기자로서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빗나갔다. 학기 중보다 더 자주 그리고 더 오래 학교에 있어야만 했다. 빡빡한 교육일정과 매일 해야 하는 과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성대신문에 지원했던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글 쓰는 것과 기사를 쓰는 것은 많이 달랐다. 평소에도 글을 쓰는 데 남들보다 오래 걸리지만
새내기, 국문과학생, 동아리 회원... 이러한 역할들은 내게 일상이 되었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었다. 해보지 않았던 것 중 하고 싶었던 것을 찾던 중에 성대신문사 수습기자 모집 공고를 봤고 들어오게 되었다. 다양한 경험, 하고 싶은 것을 해보고 싶어서 들어온 성대신문사의 일은 쉽지 않았다. 트레이닝 수업과 과제, 아이템을 잡아 문건을 작성하기, 직접 취재하기 등은 내게 다 도전들이었다. 모든 기자들이 다 열심히 하는 것을 보면서 ‘못하지만 말자’, ‘해가 되어서는 안 되지’라는 생각으로 임했던 것 같다. 그래도 처음에는 전
방학 동안 수습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체계적이고 빡신 트레이닝에 놀랐다. 3학년에 올라가면서 새롭게 도전한 , 예상은 했지만 내 2016년 겨울은 그 어느때보다 뜨거웠던 것 같다. 처음에는 10명이 넘게 수습 기자로 들어와서 논술과 면접에 변별력이 없는 건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절차들과 트레이닝이 한차례씩 진행될 때마다 숫자가 줄기 시작했다. 매주 학교에 올때나, 밤에 과제를 할 때 생각했던 대로 잘 되지 않으면 그만둬야 하나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왠지 오기가 생겨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통해
한 달간의 트레이닝은 대학 와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강도 높은 활동이었다. 겨울방학동안 거의 매일 학교에 오는 바람에 방학 같지 않았다. 트레이닝 때 처음으로 써본 인터뷰 기사는 5시간 동안이나 체크를 받았고, 앞으로는 이보다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는 말에 지치고 한숨이 나왔다. 그럼에도 내가 신문사 활동을 계속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바로 ‘즐거움’ 때문이다. 신문제작에 참여하는 즐거움과 진짜 기사작성을 배우는 즐거움이 나를 신문사에 잡아두었다. 소재를 잡고, 기획하고,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것, 그리고 내가 쓴 기사를
처음 대학에 들어올 때 나는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한 학기에 동아리를 4개씩 한 적도 있었고 그때만 해도 남들이 왜 하냐고 묻던 대외활동도 가리지 않고 했었다. 하지만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는데 조건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나한테 도움이 될까?’ ‘단체 구성원들은 어떻지?’ ‘시간은 많이 잡아먹지 않을까?’ 생각할 조건이 많아지면서 무엇인가를 선택하는데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동안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 못했다. 그러던 내가 오랜만에 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다른
사실 어릴 때는 기자라는 직업을 싫어했다. 초등학생 때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저 감정적인 편견으로 비롯된 것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제대로 기억이 나진 않지만 기자란 직업이 그저 날로 먹고 일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싫어했다는 표현 보다 미워했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절로 혀를 차게 되지만 그런 생각을 한 것에 대해 나름의 이유는 있다. 자극적인 기사 제목에 제대로 된 내용은 없는 몇몇 기사들이 나의 부정적 인식을 만든 것이다. 어린 아이의 눈에서는 그런 몇몇의 불성실 기자가 전체 기자들을 대변해 버린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