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건축과 연합회, UAUS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역사 밖으로 나가자마자 낯선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철제의 거대한 유선형 물체, 천장에 매달려있는 플라스틱 방울들, 의자로 된 새하얀 구조물까지, 신기한 것들이 이곳을 가득 채웠다. 지금 여기에선 제4회 UAUS 페스티벌이 한창이다. UAUS는 2011년 8월에 생긴 대학생 건축과 연합회다. 처음엔 서울 내 8개 대학의 연합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수도권에 있는 19개 학교 건축학도들이 함께한다. 전시회뿐만 아니라 정기총회, 강연 등을 통해 학술적 교류를 한다. UAUS
Section 1 _ Age Of Myth [신화의 시대] 입구를 넘어 어두운 전시장을 해치고 들어가면 표정을 알 수 없는 한 남자와 마주친다. 칙칙한 피부와 비정상적으로 곧은 몸, 감은 듯 반개한 눈을 가진 이 남자는 지하철역 정 중앙에 서 있다. 남자 주위의 사람들은 창백하고 어딘가 불만에 차 있다. 그림 안에 6명은 아무도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1940년대 지하철역은 공허하고 차가우며 지금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하다. 마크 로스코의 초기작인 이 ‘지하철 환타지’는 세계 2차 대전 시기의 미국을 상징한다. 전쟁
지난달 13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마크 로스코의 작품 ‘NO. 10(1953)’이 8,190만 달러(약 896억 원)에 낙찰됐다.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린 마크 로스코 전에 전시된 작품의 총평가액은 2조 5천억 원에 달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로스코의 빨간, 노란 향연 속에서 그런 천문학적 금액의 근거를 찾지 못한다. 아무리 애를 써 해석하려 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고가의 미술 작품은 마크 로스코뿐만이 아니다. 모처럼 미술관을 찾은 우리를 한순간에 바보로 만드는 현대미술, 왜 이렇게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걸까? 현대미술은 매우
마크 로스코 전의 도슨트를 맡았다. 부담스럽진 않았는가. 전시에 따라 도슨트가 관람객에겐 힘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한다. 마크 로스코 전의 도슨트 제안을 받았을 때 처음엔 전시에 독이 될까봐 거절했다. 나는 침묵을 깨고 말을 하는 순간 작품에 담긴 추상이 형태를 갖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술을 좋아하고 자기만의 감상법이 있는 소수는 그 침묵이라는 추상을 충분히 느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을 느끼는 것조차도 어려움을 겪는다. 나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또 한편으로는 마크 로스코와 같은 심오한 작가의
작은 예술 공방과 이색 맛집이 즐비한 연남동 골목에 접어들면, 금방이라도 동화책에서 튀어나올 법한 책방 ‘피노키오’가 보인다. 수백 권의 그래픽 노블과 그림책 앞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손님들의 모습. 알록달록한 책 속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방 지기 ‘피노(본명 이희송)’ 아저씨, 그와 함께 ‘그래픽 노블’ 여행을 떠나봤다. 즐비한 대형서점에 가려 동네서점이 사라져 가는 요즘, 책방 ‘피노키오’는 그래픽 노블과 그림책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인디서점’이다. ‘인디’라는 말에 걸맞게 출판사가 아닌 개인이 제작한 독립출판물, 그
무엇이든 ‘영원히’라는 말이 붙으면 진지해진다. 사람의 몸에 영원히 남는 타투를 새긴다는 것 역시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다. 한 사람의 피부를 캔버스로 일하는 타투이스트들. 이들의 눈으로 바라본 타투는 어떨지 올해로 2년째 타투숍을 운영하고 있는 타투이스트 윤지하(디자인 07) 동문을 만났다. 타투이스트가 된 계기가 있는가. 여성 타투이스트는 흔하지 않은데 힘든 점은 없나.대학에서 섬유 디자인을 전공했다. 사실 미술이 좋았지 전공은 관심 분야가 아니었다. 그래서 진로를 고민하던 중 타투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를 예술과 접목시키고 싶
상처 위에 새겨지는 아름다운 문양, 타투(Tattoo). 오늘날, 자신의 개성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은 타투는 하나의 패션 트렌드이자 문화현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 자과캠과 인사캠 건학기념제에서 약학대학 부스와 중앙동아리 성미회 부스가 진행한 헤나 시술은 학우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타투의 위생문제와 부작용을 두고 다양한 시선이 존재하는 만큼 아직까지 모두가 향유하는 문화로 인정받지는 못한 현실이다. 의료계는 물론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뜨겁게 벌어지고 있는 타투의 ‘합법화’ 논쟁, 그 속을 살펴봤다. 몸에 새겨 넣
광주비엔날레관 뒤 펼쳐진 공원을 따라 걷다 보면 나무 사이로 시립미술관이 나타난다. 이곳에선 광주비엔날레 2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프로젝트 ‘달콤한 이슬 1980 - 그 후’가 열리고 있다. 프로젝트에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세계인의 공유 가치로 전환시키려는 작가들의 노력이 깃들어 있다. 국가폭력과 저항정신의 달콤함과 씁쓸함이 공존하고 있는 이곳의 윤범모 책임 큐레이터를 만났다. 특별 프로젝트 ‘달콤한 이슬 1980 - 그 후’를 기획하게 된 계기와 목적은 무엇인가.1995년 시작된 광주비엔날레가 올해로 2
아시아 최초 순수 예술 비엔날레, 20주년 맞이해 지난 9월 5일부터 오는 11월 9일까지 66일간 ‘터전을 불태우라(Burning Down the House)’라는 주제로 광주 비엔날레가 열린다. 광주 비엔날레는 ‘저항과 민주의 도시’라는 정치적 맥락과 예로부터 뿌리내린 ‘예술적 고장’이라는 문화적 명분을 바탕으로 지난 1995년 개최됐다. 독재에 항거했던 많은 이의 희생과 민주화 투쟁 과정 속에서의 아픔을 치유하고 문화로 계승하고자 함이었다. 광주 비엔날레는 1995년에 출범한 지방자치제도와 맞물려 광주 지역만의 브랜드로 자리
예술인의 더 나은 삶을 만들어주기 위한 복지 노력은 곳곳에서 그 한계와 문제점이 끊임없이 지적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 4월 11일 국회에서는 관련 내용으로 토론회가 진행됐다. 예술인 복지 정책을 둘러싼 주요 쟁점으로 △사회적 인식의 문제 △복지법 자체의 구조적 한계 △복지정책의 철학과 전략 부재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독립성 및 전문성 부족 등이 지적됐다.예술인의 사회적 노동조합인 예술인소셜유니온의 나도원 공동위원장은 “지금 행해지는 복지사업들이 처음에 기대했던 바와 달리 예산규모나 내용 면에서 다수의 예술인에게 혜택을 주지는 못
혜화역 2번 출구에 위치한 광고판, 언제부턴가 이런 문구의 광고가 실렸다. “물감 살 돈이 없어 그림을 못 그리겠다면 지금 당장 연락하세요.” 초록색으로 쓴 글자는 뒤로 갈수록 물감이 부족해 희미해진다. 광고판의 맨 아래에는 흐릿하게 ‘한국예술인복지재단’과 그 번호가 쓰여 있다. 당장에라도 끊어질 듯한 절박함을 표현한 이 광고는 정말 예술인에게 힘이 될 수 있을까?국내 다수 예술인의 창작활동 현실은 이미 온갖 매체에 수없이 노출됐고, 본지에서 다룬 많은 예술가의 상황도 비슷했다. 언젠가 만났던 인디다큐감독은 돈이 부족해 혼자 모든
‘공명’의 출발은 20여 년 전 국악과 복학생들의 창작 음악 정기 연주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네 명의 친구들이 연주한 곡 이름이 공명이었고, 여기서 국악 전공생 타악 그룹 공명이 탄생했다. 전통악기에 서양 악기를 같이 연주하면서 ‘퓨전 국악그룹’으로 불렸고, 월드뮤직이라는 장르가 나타나면서 현재는 ‘월드뮤직 그룹 공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악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시작했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음악의 기저에는 자연스럽게 국악이 스며들어 있다. 1집 주제곡인 ‘통해야’ 에서는 태평소와 가야금, 소금의 선율이 기타와 드럼의 리듬과
‘너무나 당연히’ 취소되는 문화예술공연 지난달 16일 전남 진도군 관매도 인근 해상에서 세월호가 침몰했다. 사건 이후 국민들은 한마음으로 희생자를 애도하고 실종자가 구조되기를 기다렸다. 국가 전체가 슬픔에 빠진 상황에서 ‘세월호 사건을 추모하기 위해’ 예정됐던 문화예술공연은 대부분 취소, 혹은 무기한 연기됐다. 그리고 어느새 문화예술공연은 ‘취소되는 게 당연한’, 더는 취소돼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됐다. “지금도 오면서 또 취소 전화를 받았어요.” 가야금 싱어송라이터인 정민아 씨도 마찬가지다. 정민아는 다른 홍대 음악가와는 조금 다
1995년 6월 29일, 서울 서초동. 지상 5층, 지하 4층 규모의 삼풍백화점 5층에서 심각한 붕괴의 조짐이 감지됐다. 운영진은 영업을 계속 하기로 결정했다. 1천여 명에 이르는 손님과 직원들이 백화점 내에 있었다. 그러던 오후 5시 52분. 딱 20초였다.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데 걸린 시간은. 건물은 사라졌고, 남은 건 ‘사망 502명, 실종 6명, 부상 937명’이라는 숫자뿐이었다. 20초라는 짧은 시간이 우리에게 남긴 결과였다. 1995년 6월 29일 오후 7시. 가수 김광석은 자신의 고별 콘서트를 하고 있었다. 조
우리나라 성우의 시작우리나라 성우의 역사는 방송의 역사와 함께한다. 1927년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방송이 시작됐고, 텔레비전 방송은 1956년이었다. 연출자도, 연기자도 모두 방송에 익숙하지 않던 시절이다. 말 그대로 그 날 만들어 그 날 바로 내보내야 했던 시기. 이런 환경에서 방송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처음에는 연극을 하던 연극인이 주로 이 역할을 맡았다. 그러다 전문적인 인재 양성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고, 방송사는 공채로 성우를 뽑게 됐다. 우리나라 정식 성우들은 각 방송사에 의해 공채로 선발된 후 일
강수진 성우는 88년 KBS 21기 공채 성우로 시작해 25년 넘게 활동해 온 베테랑 성우다. △외화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명탐정 코난’의 남도일 △‘방가방가 햄토리’의 아따아따 △‘원피스’의 루피 △‘이누야샤’의 이누야샤 등 긴 성우 생활만큼 굵직굵직한 목소리를 맡아왔다. 이웃집 아저씨처럼 편안한 인상의 강 성우. 그의 평소 목소리는 기자가 어릴적 듣던 코난의 남도일이였다.현 성우업계는 강 성우가 일을 시작한 80년대보다 열악해졌다. 과거보다 TV 채널이 다양해짐에 따라 외화의 수는 80년대보다 훨씬 늘었으나 더빙양은 오히려
예술인의 반복되는 보금자리 찾기 지나친 상업화와 치솟는 임대료. 2003년 대학로가 문화지구로 지정되며 시작된 거대자본의 유입은 계속해서 대학로 예술인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발표된 서울문화재단의 ‘대학로 연극 실태조사’는 그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조사결과 대학로의 연극시장 자체는 계속해서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은 상업적인 연극의 증가일 뿐 예술성과 실험성 있는 연극은 오히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어느덧 10여 년 넘게 이어진 대학로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연극 지원 정책도 예술인에게는 실효성이 없다.
대양산업, 신신기계, 제일기공, 세현정밀…. 널브러진 용접봉들과 흩어진 목장갑, 그리고 바닥에 튄 쇳밥 자국. 낡은 철공소에 흘러 굳어진 기름때가 철과 함께한 그간의 세월을 담담히 보여준다. 그러던 어느 날, 물감과 붓, 그리고 레코드판을 든 새로운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 그들은 잿빛의 문래에 그들만의 색깔을 덧입히기 시작했고, 그렇게 조금은 어색한 동거가 시작됐다. 철공소 사람과 예술가들, 그리고 관광객 몇 명이 어우러져 밥을 먹고 있는 ‘쉼표 말랑’ 식당을 지나자 소박한 공방 하나가 보였다. ‘태영정밀’ 옆에 나란히
독립다큐멘터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김보람 감독(이하 김) : 우연히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룬 다큐를 본 기억이 인상 깊었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기는 게 신기했다. 내가 찍은 작품에 타인이 공감해주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다.윤다희 감독(이하 윤) : 다른 이야기에 접근하기 전에 내 이야기를 먼저 다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했는데, 혼자선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내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고, 이를 표현하는데 다큐가 가장 적합했다.최근 독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