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내가 가지지 못한 재능이었다. 내게 글은 처음부터 주어져있다기보다는 끊임없는 구애의 대상이었다. 활자가 좋았다. 더 정확히는 그 안의 세계가 좋았다. 그렇게 매일 책을 읽던 어린이는 키보드 자판 위에 손을 올렸다. 머릿속에 상상하기만 했던 것들이 구체화되는 과정은 경이로웠다. 매일매일 하교 후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썼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넘쳐났다. 결코 고갈되는 법이 없었다. 이야기를 좋아하던 어린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시험이 끝난 후에 몰아서 쓸 글을 기대하며 시험공부를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계속 글을 썼다. 자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글을 쓰기 좋아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였다. 10년전 2012년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단지 몇 백원 받으려고 가족 신문을 멋도 모르고 만들었었다. 그때 신문 이름이 ‘동현 신문’이었다. 동현의 뜻은 아이 동(童)에 내 이름인 어질 현(賢)이다. 어린 내가 어질게 쓰는 신문이라는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세상의 일을 알리는 기자라는 직업을 꿈꾸게 되었었다.글의 힘은 위대하다. 슬픔, 아픔, 행복함, 즐거움과 같은 감정을 담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로 하는 표현과 행동으로 하는 감정의 전달과는
성대신문에 지원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PD를 꿈꿨기에 글쓰기 실력을 키우고 싶었다. 어쩌면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했기에 트레이닝 과정이 나에게 더 무거웠는지도 모르겠다. 초반 트레이닝 과정이었던 지면 평가 땐 그저 다른 사람들의 피드백이 신기했었다. ‘나는 찾지 못했던 부분인데,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트레이닝 후반부가 되어 부서별로 문건을 발표할 때는 나의 부족함을 여실히 느꼈다. 나는 최 씨여서 늘 마지막으로 문건을 발표했는데, 앞의 기자님들이 발표하는 걸 듣고 있으면 내 문건은 너무 초라하게 느껴
2019년. 아직 찾아오지 않은 봄을 애써 흉내 내는 혜화의 쌉쌀한 공기를 마시며 했던 첫 등교가 아득하다.덜컹거리는 셔틀과 아찔한 오르막은 습하고 쓸쓸한 공기를 보낸 것에 비례해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그 익숙함이 권태가 되어버리면 어쩌지 하는 불안한 의문이 들 때쯤에 서둘러 군대에 갔다. 그저 스물하나 였던 그때는 세상을 괴롭히던 역병에 맞서 뭐라도 해내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다.그렇게 일 년뿐이던 익숙함에서 벗어나 또 다른 계절을 보내며 많은 변화를 맞이했다. 정말이지 많이 사유(思惟)했다.강원도 원주 하늘에 박힌 별들을
전역 후 약 9개월의 시간 동안 퇴보는 있을지언정 발전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나날들을 보냈다. 코로나로 인해 세상이 멈춘 것 같다는 핑계로 나 자신 또한 멈춰있어도 된다고 합리화하며, 매일같이 해가 밝는 것을 보며 잠이 들고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시는 부모님의 도어락 소리에 잠이 깼다. 눈 뜨자마자 어둑해져 가는 하늘이 어느 날부터인가 나의 한심한 삶의 밝기와 동일시되어 갈 때쯤, 더 밝아지기 위한 무언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내가 다시 빛을 낼 수 있도록 하는, 진심으로 열망하는 무언가를 말
내일 내 동기들이 졸업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반대로 이런 날이 올 때도 됐지 싶다. 사실 나 자신도 이제 후자의 생각에 많이 가까워진 것 같다. 축하 꽃다발을 예약하는 것도, 차려입고 오라는 참 어려운 부탁에 옷을 뒤적이는 것도 왜인지 모르게 너무나 익숙하다. 마치 누군가의 졸업식을 여러 번 가본 것처럼.스물, 스물하나라는 어린 나이에 만나 스물넷, 스물다섯이라는 나이에 졸업을 하다니, 내가 그들의 졸업에 해준 게 뭐가 있다고 괜히 뿌듯하다. 음 잠깐 생각해보니 해준 게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너 MBTI가 뭐야? 요즘 어딘가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심심찮게 듣는 질문이다. MBTI 유형으로 궁합을 보기도 하고, 기업에서는 이를 여러 마케팅에서 활용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채용 시장에서도 MBTI 유형을 요구한다니 그 인기와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 없다.MBTI는 일상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자기보고식 성격유형지표로 4개의 알파벳으로 이뤄진 결과를 제공한다. 여러 질문에 대한 개인의 답을 토대로 16가지 유형 중 하나로 개개인을 정의 내린다. ‘너는 이러이러한 유형의 사람이야’라고 말해준다. ‘ISFJ인 당
Y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함께할 공모전 이야기도 나누고, 방학 때 유럽이나 태국 여행을 가자고 대화했다.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Y가 현재의 것들에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고 있음을 보았다. 반면 나는 Y에게 지금 하는 모든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Y는 그런 내가 번-아웃을 겪고있다고 말했다.나는 왜 현재에 행복을 느끼지 못할까. 사실 내가 쫓는 곳에는 행복이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나를 드러내는 말에는 진심이 아닌 알량한 자존심만 담겨 있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흔히 여기는 ‘멋진 생각’을 갖기 위해 발버둥 치고,
때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처럼 꽉꽉 채워나간 스펙, 책임감에 억지로 떠맡은 일들,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는 인간관계, 남들이 내게 하는 숨막히는 기대들. 나도 누군가에게는 버거운 인간관계 중 하나고 내가 남에게 하는 기대가 그 사람을 숨 막히게 한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슬퍼진다. 이런 기분이 들 때면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다. 새로운 생각거리가 있어야 현실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은 책과 감상한 영화들로 이번 학기 기자의 이목을 채워나갔다. 전시회도 갔었다. 내가 정말 좋
어제의 피니시 라인과 오늘의 스타트 라인 앞에 선 그대.당신의 끝과 시작을 응원합니다.
이번 발간까지 총 21개의 기사를 쓰면서 나는 계속해 이별을 겪어야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초고를 쓰고 동료들의 교열을 받으며 지면에 기사를 싣는 일은 늘 만족스러운 마침표라기보단 선명한 물음표였다. 인터뷰이의 의견을 충분히 담아낸 걸까? 조금 더 다양한 시각에서 다룰 수 있진 않았을까? 나는 이 기사에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쏟아지는 의문에 당당히 고개를 끄덕인 경험은 많지 않다. 매번 후회와 자책이 남았다.그러나 속상한 마음이 마냥 괴롭지만은 않았다. 다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기사에서는 어떤 소재를 공부하고 어떤
일간지에 칼럼을 기고하면 자주 접하게 되는 댓글들 중 이런 게 있다. “공산주의가 그렇게 좋으면 북한으로 가라”, “동성애 하든 말든 너네끼리 살아!” 그뿐인가. 한 번은 사석에서, 한국은 소수자의 시민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더니, “허허, 혜진 씨는 프랑스 같은 데서 살아야겠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왜요? 프랑스만 더 좋은 나라 되라고요? 애국자는 아니시네요.”라고 응수하고 말았지만, 그 장면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특정 사상이나 성향을 가진 사람은 이 사회로부터 분리돼 동종집단 내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부럽구만 젊음이..차도 채여도 몇번이고 여름이 돌아오지..뜨거운 계절이 말이야’위 문장은 일본의 만화가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 중 하나인 ‘러프(Rough)’의 결말부에 나오는 대사이다. 나는 야구와 수영 등 학원 스포츠를 소재로 한 청춘물을 그려온 그의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이 대사에 축약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젊음이란 작품의 제목처럼 러프한 것이지만, 다시 여름이 돌아오는 것처럼 러프한 인물들은 성장하며 그것은 곧 청춘이 된다는 청춘의 아름다움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지난 한 주, 아주
누군가는 깨어 모두가 깨어날 아침을 위해 일합니다.
지하철에 몸을 실으면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정장을 입은 직장인부터 등산 스틱을 든 아주머니, 서로의 손을 맞잡은 연인과 책가방을 맨 학생까지. 그들의 목적지는 제각각이지만 시선만큼은 모두 저마다의 스마트폰을 향한다. 스마트폰에 시선을 가두고 이어폰으로 귀를 막은 제각각의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혼자가 된다. 필자 역시 우연히 반대편 누군가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서둘러 시선을 옮긴다. 이어폰으로 눌러 막은 귀 안으로 누군가의 소란스러운 술주정이 들려와도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이곤 한다. 한 공간에 같이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수많은 역설적 진리들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안을 비워내야 한다는 사실이나 처음의 시작에는 필연적으로 마지막 이별이 함께한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중학교 문학 시간에 배웠던 ‘역설’의 개념은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완전히 반대된다고 생각했던 모순된 개념들이 사실은 복잡하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내가 소설 속 등장인물의 입체성에 병적으로 주목하는 이유와도 엮어 말할 수 있다.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실망이 두려워 모든 것에 기대를 걸지 않았던
우리 학교 후문 내리막길을 쭉 걸어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보자. 한때 우리나라에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블루보틀과 담백한 국물이 일품인 칼국숫집을 지나면 여유와 교양이 풍기는 곳에 도착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다. 그곳에서 제일 ‘핫’한 전시는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일 것이다. 삼성전자 故 이건희 회장의 유족들이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것이 시대적 의무’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기증한 소장품 중 일부가 전시됐다. 그곳에서 김기창의 , 김환기의 , 이중섭의 등 우리나라 미술사를
신문사에 지원했던 순간을 묻는다면 특별할 게 없다. 너무나도 하고 싶었기에 결정을 내리기까지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오히려 입사하고 나서부터 고된 선택들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속 깊은 떨림을 고스란히 느끼며 했던 모든 결정이 큰 자산이 됐다. 처음엔 단체 생활에 있어서 나만의 위치를 파악(어쩌면 단정)했고 그에 끼워 맞춰진 채 끊임없이 타협했다. 기자를 꿈꾸며 공들여 세워놓은 철학들이 툭툭 밀쳐질 때도 눈만 질끈 감았고, 공감 능력을 뽐내며 합리화하고 이해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나를 가둔 채 바라만 보기엔 도저히 나 자
물리를 좋아해서 이 직업을 선택했지만, 솔직히 매일이 무지개빛인 건 아닙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 실험결과의 연속을 보며 도대체 몇 명의 어머니를 만나야 성공을 볼 수 있을까 짜증내기도 하고, 쌓여가는 admin work에 징징거리기도 하죠. 하지만 정말 원했던 결과가 나왔을 때, 내가 기다렸던 신호가 나왔을 때의 기쁨은 정말 마약 같은 것이라, 그 한 번의 기쁨으로 100번의 절망을 잊고 나아가는 것 같아요. 오늘은 그 중 가장 특별했던, 인생에서 다시는 없을 “첫 중력파 관측 007작전”에 대해 얘기
지루하고 긴 비행 끝에 집에서 8000킬로 떨어진 섬나라에 첫발을 디뎠을 땐 깜깜한 밤이었다. 공항 밖에서 마스크 없이 얼굴을 훤히 드러낸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마주치고 나서야 내가 영국에 와 있음을 실감했다. 그렇게 도착한 첫 도시인 런던에서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느낀 영국인들의 첫인상은 모두가 하나같이 친절하다는 것이었다. 걸어가다가 길을 조금만 막아도 모두의 입에서 ‘쏘리’가 나왔고, 눈을 마주치면 다들 방긋 웃어 보였다. 사진으로만 보던 유명한 관광지가 눈앞에 펼쳐지고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아름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