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또래 친구들의 주된 대화 주제는 단연 ‘개그콘서트’였다. 일요일 저녁이면 졸린 눈을 비벼가며 텔레비전 앞을 지키고 앉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시절 개그콘서트는 친구들의 대화에 끼고 싶으면 반드시 시청해야 하는 필수 프로그램이었다. 한 주라도 건너뛰는 때에는 월요일 아침에 쏟아지는 친구들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그 시기를 거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웃음이 곧 문화라는 걸 이해할 터다. 이야기를 나눌 소재, 공감대의 형성, 파생되는 요소들에 대한 향유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비슷한 타이밍에 웃음을
본 칼럼은 영화 의 내용과 결말을 담았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영화 은 감상 직후에는 그 여운이, 다른 매체를 통해 전문가의 해석을 들은 뒤에는 해석에 의한 충격이 크기 때문이다. “아빠한테는 뭐든지 말해도 되는 거 알지? 아빠도 다 해본 거니까 뭐든 얘기해도 괜찮아. 그런 일 있으면 말해줘, 알았지?” 두 부녀가 떠 있는 아름다운 바다와도 같이, 부모의 아량은 한없이 넓다. 이 장면을 보며 나의 삶에 절대적인 지지자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말을 남긴 뒤 아빠가 떠나버린다면
음악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지면이 주어졌다. 음악에 대해 쓸 것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음악이 왜 멋진지 설명해보도록 하자.음악은 어떤 시간을 붙잡아버린다. 지금 핸드폰을 들어 음악을 틀어보자. 3분이든 5분이든 8분이든, 일정한 시간이 제시되고 그 시간 동안 음악은 재생된다. 지정된 시간 동안 지정된 속도로 펼쳐진다. 글을 읽거나 그림을 보는 것과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음악에는 ‘속도’라는 속성이 내재해있다. 글이나 그림은 감상자 자신이 임의로 정하는 속도에 맞추어 흘러가고, 이를 통해 작품이 감상자의
조급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성대신문의 기자라 하면 ‘신문 잘 읽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본인은 약간의 망설임 끝에 ‘고맙다’는 답을 하곤 한다. 지면에서 드러나는 본인의 존재감은 너무나 작기 때문이다. 성대신문의 뉴미디어부 기자들은 글을 쓰지 않는다. 지면에 자신의 글을 실을 기회는 있으나 대체로 몇 명의 기자들이 함께 글을 쓰며 그마저 사진이 주류인 기사다. 글을 쓰지 않는 기자는 실로 아이러니하다. 글이 아닌 매체들로 기사를 만들며, 다른 기자들의 글을 피드백하지만 정작 본인은 글을 쓰지 않는다. 우리의 주 무대는 유튜브와 인스타그
여러분은 지난 1707호에 소개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활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폭파 사건에서 결과적으로 어떤 이들이 무고한 죽음과 상해를 입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리하여 그 행위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물론 찬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1970년대에 어떤 일본인들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서 얼마나 철저한 반성적 사유에 이르고 있었는지를 가늠해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과거사 반성에 있어서 종종 일본과 비교되는 독일은 1970년대까지 놀라울 만치 비슷한 경로를 걸어갔습니다. 과거사 극복과
최근 들어, “복수”를 주제로 한 드라마들이 여럿 만들어지고 있다. 현재 ‘더 글로리’, ‘모범택시’ 등의 드라마들이 시리즈물로서 인기를 끌고 있는데 ‘더 글로리 파트 2’의 경우, 넷플릭스에서 3월 4주 차 기준으로 2주 연속 1위를 달리고 있으며, ‘모범택시’는 시즌 1, 2를 통틀어 평균 10% 이상의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더 글로리’는 과거 학교폭력으로 인해 신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은 주인공이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는 과정을 다루고, ‘모범택시’는 법으로 보호받지 못한 여러 주요 인물들이 힘을 합쳐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
성공을 갈망하는 시대다. 성공의 종류는 다양하다. 문제는 성공도 사로잡히면 집착과 중독이 된다. 성공은 더 큰 성공만 갈망하게 하고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다. 심한 경우, 몸과 마음이 힘들어지고, 때론 인생이 망가진다. 그렇다면, 성공하는 인생은 무엇일까? 이점에서 아래 이야기는 Easter(부활절)를 맞아 생각거리를 남긴다. 기원전 9세기 시리아에 한 장군이 있었다. 그는 전쟁마다 거듭 승전해서 육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왕과 백성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의 지위, 부, 명예는 최고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는 나병환자였다.
더 좋은 글감이 있을 듯해 종일 뉴스를 뒤적였다. 한 학기에 8개의 신문을 펴낸다는 건 필자에게 허락된 지면의 기회도 8번뿐이라는 의미다. 편집장직을 맡으며 필자는 감사하게도 8번이나 글문을 열 수 있게 됐다. 문장 하나하나가 치열하게 쓰여야 하는 지면 위에 개인의 의견을 담는 일은 과분하면서도 애틋하다. 그렇기에 주어지는 기회마다 단 한 번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 됐든 지금 하려는 말보다 나은 이야기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더 심각하고, 보다 시의성 있고, 훨씬 중요한 말이다. 이 글을 펴내고 싶지 않아 한참을 고민했다.
거리에서 몸을 숙인 채 괴상한 자세로 멈춰 있는 사람들, 허리가 뒤로 꺾일 정도로 누워 잠든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펜타닐’을 검색하면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마약 중독자들의 모습이다. 지난해 미국에서 10만여 명이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는데, 원인의 67%는 펜타닐 중독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마약이 무엇이길래 저리 처참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퍼지는 것일까?’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면 마약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먀약 중독에 대한 경각심만을 취하길 바란다. 마약 중독은 치료할 수 있지만, 몸은 평생 마약을 기억한다고 한다. 다
누군가에겐 야경, 누군가에겐 야근.
내가 쓴 기사를 잘 읽지 않는다. 애정이 없어서도, 귀찮아서도 아니다. 그 기사들은 사실 내 기사가 아니다. 첫 기사를 쓰던 때를 기억한다. 열정 가득한 모습만이 떠오른다. 문화인들과 메일을 주고받으며 설렘을 느꼈고, 학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간다움을 느꼈다. 기사를 쓰는 건 그런 내 세상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내 세상을 잘 담아낸 만족스러운 기사가 나왔고 성취를 느꼈다. 자부할 수 있는 내 기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다음으로 문제기사를 쓰던 때를 기억한다. 열심히 탐사한 내 세상을 기사에 잘 담았다. 필요한 내용을 잘 다룬 좋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