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교수님, 저는 2022년 1학기 창의적 글쓰기 강의를 수강한 학생입니다. 교수님께 편지를 남기는 것이 학기 중 질문이 있을 때 외엔 드문 일이기에 좋은 기회라 생각되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의 창의적 글쓰기는 제가 첫 학기에 들은 강의 중 가장 대학 강의 다운 강의였습니다. 힘들었던 고등학교 입시를 마치고 대학 강의에 대한 로망으로 두근댔던 첫 학기에 온라인으로 전환된 강의, 소통할 수 없는 시간이 아쉬웠습니다. 오프라인으로 진행된 교수님의 강의는 제게 대학 강의의 설렘을 다시 안겨주었습니다. 교수님과의 면담, 다
개강할 때가 되니 유난이던 날씨는 온데간데없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캠퍼스에 맴돈다. 학우들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 푸른 금잔디를 본다. 평화로운 초가을 공기를 맡고 있노라면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수도권의 수해는 없었던 일처럼 느껴진다. 비가 오던 날을 기억한다. 비교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학교 근처에 있었음에도 그날의 비는 무서웠다. 학교 후문에서 운동장까지 난 계단을 내려오는 내 발에 뒤에서 밀려온 빗물이 파도처럼 부딪혔다. 영화 기생충에서 본 장면이 얼핏 겹쳐 보였다. 하지만 그 생각이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에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스스로를 전시한다. 피사체는 카메라에 담기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며, 오히려 즐기기도 한다. 많은 경우 피사체는 ‘나’이며, 셔터를 누르는 것도 ‘나’의 역할이다.인스타그램의 사진들은 사진이라는 수직선의 한 쪽 끝을 담당하고 있다. 다른 쪽 끝에는 무엇이 있느냐 묻는다면 아마 그것은 전쟁사진일 것이다. 전쟁사 진에는 절망과 분노, 슬픔과 공허가 담긴다. 그 속의 피사체는 내보여지고 싶은 의지도, 자신을 관음하는 카메라 렌즈에 저항할 힘도 없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은 피사체와는 다른 사람이다. 렌즈를 경
버리기 전 3초간 눈맞춤,당신의 작은 관심이 큰 기적을 만들 수 있습니다.
2학기가 시작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이시점 다시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20~22학번 모두 코로나로 인해 온전한 캠퍼스 라이프를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께 소소한 위로를 전하고자 짧지만,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21학번으로 학교에 들어와서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저는 동아리에 들어가 친구들을 사귀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도중 저학년이 주학년 층인 중앙동아리인 KCC에 눈길이 가게 되었고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는 것을 기대하며 KCC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짐에 따라, 학교
기사란 것은 묘하다. 형태만 보면 글인데 꽉 찬 내용들은 마치 보고서와 같고, 현재의 일들을 담아낸다는 점에선 기록의 기능도 큰 것 같다. 기사는 최대한 간결하게, 어떤 문장도 필요 없는 문장은 없어야 한다. 더 줄일 수 없겠다고 생각한 기사도 또 줄이고 또 줄일 수 있었다. 그렇게 눈에 뭐 하나 걸리지 않는, 매끄러운 기사가 만들어진다. 마감 직전엔 눈물을 머금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부분까지 쳐내며 한정된 지면을 원망하기도 한다.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흥행을 보며 가볍게 ‘발달장애인’을 이번 기사 소재로 담아야겠다고
평온하고조금 신나는
대학은 도대체 뭘 하는 델까? 대학의 가장 큰 역할이 교육과 연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학은 없던 지식을 새로 만들어내는 곳, 인류가 지금까지 거둔 지적 성과를 젊은 학생들에게 전수하는 곳이다. 그리고 적절한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거둔 이에게 학위를 수여하는 높은 권위를 가진 곳이다. 오로지 대학만이 학위를 수여할 수 있다. 학생들은 학기가 끝나면 수강한 과목의 학점이 적혀있는 성적표를 받는다. 학생들은 잘 알지 못하겠지만, 교수도 매년 평가를 받는다. 한 해의 교육과 연구 활동에 숫자로 적힌 점수가 정해진 잣대를 기준으로 주
최근 한 국내 대기업 직원이 수천억 원 규모의 대형 금융사고를 일으켜 화제가 됐다. 아직도 필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 은 그 직원이 수백억 원대의 그 무거운 금 괴를 구매해서 본인과 가족의 집에 숨겨 놓았다는 것인데, 이는 어쩔 수 없는 금 특 유의 높은 희소성과 불변의 가치 때문이 아닐까?금은 철이나 구리와 같은 대표적인 금 속 중 하나이지만 그 아름다운 색깔과 희 귀성,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인 높은 안정성으로 인하여 문명의 발생 과 함께 지금까지 본의 아니게 인류의 숭 배를 받아왔다. 이집트 파라오인 투탕카 멘의
다른 친구들이 쓰는 블로그나 간단한 일기를 읽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왜 쓰는 것보다 읽는 것이 더 좋으냐고 물으니, 다른 사람이 쓴 글들을 읽으면 그 사람을 더 잘 알 수 있어서 좋다고 하더라. 우리는 평소에 많은 대화를 하지만 거기서 드러나지 않는 각자의 생각들이 직접 쓴 글에는 고스란히 나타난다. 그렇기에 나는 글의 힘을 실감한다. 그리고 신문과 기사, 기자의 펜 끝에 매달린 의미들을 생각한다. 나아가 글뿐만 아니라 다른 매체를 통해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뷰파인더 속에 담긴 시선에도 나
언론인이 되고싶다. 중학교 1학년 이후로 항상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나의 언론인이라는 꿈은 바람에 날리는 깃털같다. 멀리서 보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막상 가까이 다가서 잡으려 하면 어느새 저 멀리서 반짝반짝 흩날리고 있다.성대신문은 나의 깃털이 멀리 도망갈 것을 알면서도 지원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언론인이 너무 되고 싶어서, 날 깃털로 인도할 나의 바람이 되어주길 바랐다. 생각보다 치열한 경쟁률에 기대를 놓고 있었지만,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동안 수없이 동경해왔던 단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성대신문의 다양한
모든 글에는 글쓴이의 성격이 드러난다. 내 글에는 섬세함이 없다. 다소 뭉뚱그려져 있고 기사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 내 성격과 맞닿은 부분이라 이 글을 쓰면서도 부끄러워진다. 글을 통해서 나 자신을 알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또 새삼스레 나를 알아간다.나를 알아가는 과정은 신문사 기획 회의를 통해서다. 신문사 모두가 참여하여 내 문건에 피드백 주는 시간 동안 내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 사람들의 시각이 얼마나 다양한지, 반성과 감탄이 동시에 절로 나온다. 전공수업에서 경험해 본 팀플 때문에,
마지막으로 ‘일기’를 쓴 건 아마도 초등학생 때일 것 같다. 일기는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을 기록하는 것인데, 짧은 단어조차 기록하지 않고 너무 많은 시간을 허투루 보내온 것 같았다. 대학교 3학년, 흔히 말하는 ‘취준’을 하며, 현질적인 문제들에 부딪히기 시작했고, 23년이라는 짧지만 바쁘게 살아온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성대신문은 관찰자로서 세상과 학교를 기록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 들어오게 됐다. 합격 후 수습기자 트레이닝이라는 형식의 일기를 쓰며 2022년 봄 학기를 보냈다. 준정기자가 된 지금, 제출했던
방의 가구 배치를 바꾸던 중이었다. 침대를 건드릴 때마다 수상할 정도로 먼지가 심하게 날렸다. 이상함을 감지하고 매트리스를 들어내 보니 시트 아랫부분이 온통 까진 채였다. 품질 탓인지 열에 녹았던 건지 잘게 부서진 얇고 흰 껍질들이 눈처럼 휘날렸다. 눈앞이 아득했다. 시트를 통째로 말아서 버리고 그 잔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돌돌이를 굴리고 청소기로 빨아들여도 자꾸만 어디에서 튀어나온 새로운 조각들이 나풀댔다. 한 시간 남짓을 붙잡고 낑낑댔을 때에야 상황이 대충 갈무리됐다. 더는 쳐다보기도 싫어서 이만 새 시트를 덮으려고 했다. 어
도전이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언제나 두렵고 회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사소한 일에도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 때문에 항상 새로운 도전 앞에서 내가 할 수 있을까 하고 망설이며 지레 겁을 먹곤 했다.성대신문에 지원하는 것도 큰 도전이었다. 그런데도 지원을 결심한 이유는 나에게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끝난 1학년을 되돌아보자 1년 동안 나는 무얼 했나? 하는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나름 학업에 열중했다고 생각했지만, 대학교 4년이 강의와 과제로만 기억에 남고 싶진 않았다. 3학기 개강을 앞두고 새로운 활동
기자가 멋져 보여서 들어왔다. 그런데 그 첫인상이 깨졌다. 이제 글쓰기의 민낯을 본다.유하고 부드러워 보였던 것과 달리 글을 쓰는 일은 거칠고 험궂다. 완성된 기사를 쓰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치고. 기사를 쓰는 일은 생각했던 것 보다 상당히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동시에 그러한 점이 글을 쓰는 일을 고귀하고 정성 어리게 만든다.글쓰기의 민낯은 나의 민낯도 드러낸다. 글은 얼버무리지 않기에 나의 부끄러움을 낱낱이 보여준다. 하지만 모든 만남이 그렇듯이 좋은 첫인상이 있었기에 결단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글 쓰는 일이 해볼 만한
글은 내가 가지지 못한 재능이었다. 내게 글은 처음부터 주어져있다기보다는 끊임없는 구애의 대상이었다. 활자가 좋았다. 더 정확히는 그 안의 세계가 좋았다. 그렇게 매일 책을 읽던 어린이는 키보드 자판 위에 손을 올렸다. 머릿속에 상상하기만 했던 것들이 구체화되는 과정은 경이로웠다. 매일매일 하교 후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썼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넘쳐났다. 결코 고갈되는 법이 없었다. 이야기를 좋아하던 어린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시험이 끝난 후에 몰아서 쓸 글을 기대하며 시험공부를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계속 글을 썼다. 자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글을 쓰기 좋아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였다. 10년전 2012년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단지 몇 백원 받으려고 가족 신문을 멋도 모르고 만들었었다. 그때 신문 이름이 ‘동현 신문’이었다. 동현의 뜻은 아이 동(童)에 내 이름인 어질 현(賢)이다. 어린 내가 어질게 쓰는 신문이라는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세상의 일을 알리는 기자라는 직업을 꿈꾸게 되었었다.글의 힘은 위대하다. 슬픔, 아픔, 행복함, 즐거움과 같은 감정을 담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로 하는 표현과 행동으로 하는 감정의 전달과는
성대신문에 지원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PD를 꿈꿨기에 글쓰기 실력을 키우고 싶었다. 어쩌면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했기에 트레이닝 과정이 나에게 더 무거웠는지도 모르겠다. 초반 트레이닝 과정이었던 지면 평가 땐 그저 다른 사람들의 피드백이 신기했었다. ‘나는 찾지 못했던 부분인데,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트레이닝 후반부가 되어 부서별로 문건을 발표할 때는 나의 부족함을 여실히 느꼈다. 나는 최 씨여서 늘 마지막으로 문건을 발표했는데, 앞의 기자님들이 발표하는 걸 듣고 있으면 내 문건은 너무 초라하게 느껴
2019년. 아직 찾아오지 않은 봄을 애써 흉내 내는 혜화의 쌉쌀한 공기를 마시며 했던 첫 등교가 아득하다.덜컹거리는 셔틀과 아찔한 오르막은 습하고 쓸쓸한 공기를 보낸 것에 비례해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그 익숙함이 권태가 되어버리면 어쩌지 하는 불안한 의문이 들 때쯤에 서둘러 군대에 갔다. 그저 스물하나 였던 그때는 세상을 괴롭히던 역병에 맞서 뭐라도 해내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다.그렇게 일 년뿐이던 익숙함에서 벗어나 또 다른 계절을 보내며 많은 변화를 맞이했다. 정말이지 많이 사유(思惟)했다.강원도 원주 하늘에 박힌 별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