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대신문을 읽는 사람은 드물다. 교직원, 학생회 인원들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학회실이나 과방에서 배달음식 받침용으로는 요긴하게 쓰인다고 한다. 읽히지는 못할망정 짬뽕 국물에 젖어드는 활자들의 비명이 애처롭다. SNS는 지면과 상황이 다르다. 페이스북 성대신문 페이지에는 ‘좋아요’가 수십 개 이상 달리는 게시물도 있고 페이지 ‘좋아요’수는 수천 개를 넘어섰다. 학생들이 댓글로 토론을 벌이는가 하면 이따금 싸우기도 한다. 이를 보면 성대신문을 향한 학생들의 관심이 적은 것도 아닌 듯하다. 수북이 쌓인 성대신문에 먼지마저
주변에서 말한다. 요즘 너 답지 않다고, 돌아오라고. 스스로도 그렇게 느낀다. 1학기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돌아가기는 싫다. 지금의 바쁨이 좋다. 1학기의 나는 친구들이 뭐하냐고 물으면 항상 “침대에 누워있지.”라고 답했다. 지금은 “신문사 일해.”라고 답한다. 삶이 바빠졌다. 빈 여백이 많던 시간은 어느새 촘촘히 신문사 일들로 채워지고 있다. 이런 변화가 나를 힘들게 하다가도 돌아보면 뿌듯하다. 트레이닝 기간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신문사에서 무엇을 하는지부터 기사 작성법, 언론관, 사진 찍는 법까지 매주 끊임없이 새
평소에 새로운 것을 잘 시도하려 하지 않는 성격인 나는 성대신문에 지원서를 낼 때도 많은 고민을 했었다. 바쁘지는 않을까.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괜히 민폐가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걱정 속에서 시작했던 수습기자 트레이닝의 스케줄은 정말 빡빡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서 쉬고 싶어도, 친구들과 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고 트레이닝에 참여했다. 2주에 한 번 정도 갔던 자과캠 트레이닝 스케줄도 너무 힘들었었다. 그러나 수습기자 트레이닝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운 것 같다. 트레이닝 스케줄을 먼저 잡으니까 트레이닝을 하지 않는 시간에
논술 시험을 보러 여러 학교에 갈 때마다 그 학교의 신문을 펼쳐보며 빨리 불안한 수험 생활을 끝내고 대학에 다닐 날들을 꿈꾸곤 했었다. 결국 그토록 원하던 성대에 합격해서 오게 되었고 난 망설임 없이 성대신문에 지원했다. 그저 우리 학교가 좋았고, 내가 기획해서 쓴 기사를 신문에 싣는다는 것이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논술과 면접을 봤고, 그 동안 전혀 고민해본 적 없던 바람직한 기자상이나 언론관 등에 관한 질문을 받으며 ‘아, 쉽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합격 여부를 알려주겠다던 주말, 엠티에 가서 놀다가 틈틈이
수습기자로서 트레이닝을 받았던 지난 6주간은 마치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일상이 사라졌고, 일주일이 신문사 일정으로 빼곡히 채워졌다. 매주 쏟아지는 과제에 내가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걱정하는 것도 잠시, 한 주 한 주 당장 닥친 과제를 해나가다 보니 어느 새 끝에 이르러있다. 사실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했던 신문사였다. 떨어지면 어쩔 수 없지, 지원이나 해보자는 심정으로 원서를 넣었다. 논술시험에서도, 두 시간을 꽉 채워 글을 썼는데 떨어진다면 억울할 것 같아 부러 일찍 끝내고 나와버렸다. 다른 더 좋은 활동은 없을까 찾아
한 달여의 트레이닝을 마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나는 신문사라는 공간이 더 두렵고, 신문사에서 보낼 날들이 더 부담스러워졌다. 트레이닝을 처음 시작했던 무렵에는 트레이닝을 마칠 즈음이면 기사를 쓰는 것이 수월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게 힘들다고 하는 이유는 기사를 쓰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 기사를 쓰는 데 능숙해지면 신문사 생활도 편해질 것이라고 짐작했다. 트레이닝을 마친 지금, 기사를 쓰는 것이 수월해진 건 맞다. 그러나 신문사 생활은 더 힘들게 느껴지고, 그래서 다가올 날들이 부담스럽다.부담을 느
일주일에 세 번씩 트레이닝. 그 중 하루는 무조건 자과캠에서 트레이닝. 될 것이라고 기대조차 하지 않은 신문사의 트레이닝 일정이었다. 2월 중순부터 직립보행이 가능했던 나로서는 학교 생활은 그저 고난이었다. 항상 지하철역에서 내려 셔틀을 타고 수업이 다 끝나자마자 셔틀을 타고 다시 지하철역에 내린다. 그렇게 아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친한 친구들은 학교활동 중에 뭐라도 해보라고 하도 권유를 해서 학교에서 처음 들어오라고 홍보 받은 신문사에 지원을 했다. 1차 논술에 2차 면접이어서 엄청나게 들어가기 힘든 곳인 줄 알았다. 첫날에
처음 수습기자 트레이닝 계획을 들었을 때는 좀 놀랐다. 앞으로 좀 빡세겠구나. 이게 신문사에 들어와서 든 첫 번째 생각이었다. 트레이닝을 한 주 한 주 받으면서 든 생각은 ‘생각보다 다들 열심히 하는구나‘였다. 나와는 다른 관점으로 글을 읽고 다른 방향으로 열심히 써오는 모습이 좀 놀라웠다. 나는 주로 말할 것을 생각하고 간단하고 내가 알아보기 편하게 글을 썼었다. 그러나 다른 친구들은 뭔가를 다들 길게 써왔다. 1년 동안 발표위주의 수업을 듣던 나로서는 그렇게 글을 쓰는 것이 좀 힘들었다. 그러나 내가 쓰던 방식의 글은 내가 말하
4주간의 트레이닝이 끝났다. 솔직히 말해 힘들었다. 매 트레이닝 때마다 해 와야 하는 과제들이 있었고, 과제들 중에는 열심히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것도 있었다. 과제를 하며 내가 과연 이곳에서 제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은 쌓여만 갔다. 이제 개강을 했고, 준정기자가 된지 3일 정도 됐다. 하지만 이 얼마 되지 않는 3일 동안 난 실수를 했고, 끊임없이 버벅거렸다.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주변 친구들도 이런 나에 대한 걱정이 많다. 전공 수업도 빡센데 할 수 있겠냐는 둥 벌써부터 바빠서 어떻게
방학이 사라졌다. 망나니 같이 놀았던 일학년이 종강하고 방학이 되었을 때, 처음 한 달은 열심히 놀았다. 연애 빼고 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2015년이 되고 한 달간은 열심히 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성적표를 보고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회의감에 대외활동부터 교내활동까지 시작했다. 그러다 성대신문에 들어왔고 2월은 성대신문에 다 뺏겼다. 수습 트레이닝을 하면서 한 달을 보냈더니 개강을 했다. 이제는 준정기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아직은 모든 것이 어리둥절하다. 신문사에 들어가는 것도 부끄러워 실기실에서 노트북에
치열했던 지난 2014학년도 2학기를 보내고 방학을 어떻게 보내야 잘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대외활동을 찾아보기도 하고, 영상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아보기 했다. 하지만 조건을 재다보니 두려움이 커지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홧김에 1월에 친구가 제안한 신문스터디를 하게 되었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학기 중에 하던 신문읽기를 조금 더 강제적으로 해보자는 의도였을 뿐이다. 그렇게 한 달간 꾸준히 신문을 읽고 매일 글을 썼다. 매일 아침 일어나는 것도 힘들고 신문 위의 생판 처음 보는 단어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만만치 않을 일이다. 쉬워 보이는 일도 막상해보면 어렵다는데 신문사일은 해보기 전부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처음 지원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었다. ‘과연 여기에서 잘 활동할 수 있을까?’, ‘신문사에서 하게 될 활동이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보고 내린 결론은 ‘일단 해보자’였다. 신문에 대한 그리고 언론에 대한 거대한 꿈과 야망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학교에 대한 불만이 가득해 이를 표출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도 아니었다. 전역했으니 내가 갈 길을 찾기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