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는 성대신문이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경계에서 가장 치열하게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던 시기였다. 읽을거리가 많지 않던 당시, 학내 사안을 다루는 독점적인 신문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음에도 성대신문은 사회에 귀를 닫지 않았다. 군사독재를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로 온 대학가가 뒤숭숭했던 그때, 대학이 가야할 방향을 고민했던 ‘젊은 신문’. 바로 성대신문의 모습이었다. 학우에게 인기 많은 성대신문, 영향력도 매우 높아“당시 성대신문 경쟁률은 30대 1까지 되기도 했어” 조시행(섬유 68) 동인은 60년대 말 성대신문의 지원율이 적
‘본지는 교내의 학풍을 더욱더 진작하고 학도들의 팽배한 연구열을 일층 고무하여 그들의 왕성한 활동력을 가일층 격려하여 학도들로 하여금 하루라도 속히 그리고 완전히 그 인격의 완성을 도모하게 하며 또 그들의 연찬된 학술이 본지를 통하여 간접, 직접으로 우리 민중에게 자극을 주며, 자립 자활의 길을 열어주도록 하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산 학문, 산 기술이 되게 하고자 성대 민중들의 열과 성이 마침내 본지를 간행하는 것이다.’ -주간성대 창간호 창간사1954년 9월 20일, 6·25 전쟁 이후 자유당 집권 말기의 불안한 사회 분위기 속
1954. 9. 20김창숙 총장을 발행인으로 하고, 박종화 교수를 편집인 겸 인쇄인으로 한 성대신문이 『週刊成大』라는 제호로 창간, 매주 大판 2면을 발행하다.1955 『주간성대』, 제23호부터 대판 4면으로 증면.1958『주간성대』가 창간 3년 6개월 만에 지령 100호를 돌파하고 부록으로 영자신문 “The Weekly Sungdae”를 타블로이드판 4면으로 발행하다.1961『주간성대』가 창간 8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8면을 발행함과 동시에 영자(英字) 2면, 불자(佛 字) 1면, 독자(獨字) 1면도 부록으로 발행하다.1963『주간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60년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성대신문을 사랑해주시는 성균관대학교 학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1954년 9월 20일『週刊成大』라는 이름으로 창간한 성대신문이 어느덧 6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60주년을 기념해 성대신문의 역사를 다시 되짚어봤습니다. 성대신문의 역사는 곧 우리 성균관대학교의, 그리고 사회의 역사입니다. 신문에 담긴 그것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치열했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그때는 아니었습니다. 과거 선배들이 피와 땀으로 이뤄내는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솔직하
1954년 9월 20일, 김창숙 총장을 발행인으로 하고, 박종화 교수를 편집인 겸 인쇄인으로 한 성대신문이 『週刊成大』라는 제호로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리고 60년이 지난 지금, ‘60주년 기념 특별호’를 통해 그간의 흔적을 되짚어보고자 합니다.
16살. 보통은 중학생일 나이다. 하지만 16살의 나이로 벌써부터 세상의 관심을 받고 있는 수영선수가 있다. 작년 우리 학교 스포츠과학부에 입학한 김세진(스포츠 13) 학우는 선천성무형장애로 다리와 한 손이 없이 태어났음에도 수영선수의 길을 택했다. 더 나아가 △2009 런던 세계장애인수영선수권대회 3관왕 △2012년 전국장애학생체육대회 7관왕 △2013년 통영 오픈워터스위밍 대회 남자 일반부 2등 수상 등 수많은 대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수영선수의 꿈을 가지게 되다어린 시절, 그는 두 다리와 오른손의 세 손가락이 없었다. 지금
“영화 데미지(1992)의 마지막에 줄리엣 비노쉬 클로즈업 장면이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 있어요.” 학창 시절, 수업을 빼먹고 극장에 갔던 정주리(영상 99) 동문은 작품에서 느낀 형언할 수 없는 자극과 색다른 경험에 같은 영화를 3번 연달아 관람했다. 비디오를 좋아하던 아버지 덕에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접했던 그녀는 항상 영화에 매력을 느꼈고 감독의 꿈을 가졌다. 결국, 그녀는 지난 5월 본인의 첫 장편영화 ‘도희야’로 칸국제영화제에 입성했다. 다변했던 대학생활, 무변했던 꿈정 동문은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막연한 꿈을 가지고 재수
곱게 땋은 댕기 머리, 고상하게 차려입은 한복. 그러나 그림 속 여주인공은 속이 훤히 비치는 치마를 입고선 라면을 허겁지겁 먹는다. 그리고 명품 가방 위로 쏟아지는 커피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 순간 ‘아차!’ 하며 당황한다. 이 모습을 화폭에 담은 ‘아차Ⅱ’가 내걸리면서 어느 한국화가는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이후에도 독특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지난 6월 개최한 개인전 ‘내숭 올림픽’도 성황리에 끝마친다. “고답적인 한국화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 작가다.” 한국화의 대중화를 이끄는 선두주자, 한국화의 아이돌로 불리는 김현정 화가를
여러 가지 농작업기를 연결해 동력을 공급하며, 주행 또는 정지 상태에서 작업을 수행하는 농업기계. ‘트랙터’의 사전적 정의다. 바로 여기, 방방곡곡을 다니며 젊음의 동력을 공급하는 인간 트랙터 ‘강기태’가 있다.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꿈’을 선택한 뜨거운 하동 남자. 트랙터 한 대로 전국 일주를 하고, 터키와 중국 횡단을 넘어 브라질 여행을 앞두고 있는 그. 열정, 도전, 온정의 힘찬 바퀴를 굴리며 그가 전하는 시속 30km의 나눔에 대해 들어봤다. ‘트랙터 청년 강기태’의 대학생활은 어땠나.대학 진학부터 내가 원하던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성악을 해온 다른 성악가들과는 행보를 달리해왔다. 어떤 이유로 성악가를 꿈꾸게 됐나어렸을 때는 사실 꿈이 없었다. 워낙 집이 가난해서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만 갖고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폭력과 가난 때문에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의 어려움이 성악가의 꿈을 갖게 한 계기가 된 것 같다. 그 힘듦을 이겨내려고 노래했고 그러다 보니 노래가 좋아졌고… 그게 결국 꿈이 됐다. 서울로 올라와서도 교회에서 기타를 치며 꾸준히 노래했다. 본격적으로 성악가
다음달 4일에 있을 지방선거를 맞아 서울시장 후보 두 명을 만났다. 인터뷰는 본지를 포함한 서울지역 16개 대학 학보사의 연합체인 서울권대학언론연합회의 주관으로 열렸다. 정몽준 후보의 인터뷰는 지난 20일 숙명여자대학교 강의실에서 진행됐으며 박원순 후보와의 인터뷰는 지난 22일 서면으로 이뤄졌다. 두 후보 모두 대학생의 주요 관심사인 △주거 △등록금 △교통 △일자리 △문화를 중심으로 인터뷰가 진행됐으며, 질문지는 사전에 전달됐다.
지난 20일, 숙명여자대학교 강의실에서 서울시장후보인 새누리당 정몽준 후보를 만났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안타까움과 어른의 책임감을 말하며 그는 기숙사 개발과 대학관광문화특구 신설로 서울시의 도시계획을 말했다. 자신을 ‘알부자’로 칭하는 정 후보에게 서울권 대학생의 미래를 들어봤다. #서울권대학언론연합회는 서울지역 16개 대학 학보사의 연합체다. 학보의 주 독자가 대학생과 20대인 만큼 20대에게 정몽준 후보가 어떤 후보인지 말해 달라. ‘정을 몽땅 준 사람’이다. 별명은 ‘알부자’로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다. 2002년 월드컵
지난 22일, 새정치민주연합 박원순 후보로부터 답신 메일이 왔다. 바쁜 일정으로 인해 만나지는 못했지만, 답변의 글귀로부터 그가 구상하는 서울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 등록금과 취업, 그리고 청년 주거 전반에서 공약을 내세우는 ‘social designer’, 박 후보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서울권대학언론연합회는 서울지역 16개 대학 학보사의 연합체다. 학보의 주 독자가 대학생과 20대인 만큼 20대에게 박원순 후보가 어떤 후보인지 말해 달라. ‘20대의 삶을 바꾼 첫 시장’이다. 서울시립대(이하 시립대)에서 처음으로 반값등록금을
대학생의 사회참여가 줄고 있다는 요즘, 기죽지 않고 학내외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대학생들이 있다. 경희대학교 용혜인 씨, 우리 학교 신민주(유동13), 한상호(철학07) 학우가 그 주인공이다. 용 씨는 세월호 사고에 대한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을 처음 제안했다. 신 학우는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에 함께 참여하고 있으며 이전에도 학내에 안녕들 하십니까(이하 안녕들) 대자보를 게시하거나 침묵행진 참여 유인물을 배포했다. 한 학우는 지난 2월 ‘올바른 학생주권 지킴이’를 설립하고 매주 월요일 인사캠에서 진행되는 ‘지속가능한 등교를
대학생은 고달프다. 졸업해도 갈 곳은 마땅치 않고 학자금 때문에 진 빚은 줄 생각을 않는다. 소위 386세대는 얘기한다. 힘들다면서 거리로 나오지 않는 ‘너희에겐 희망이란 없다’고. 그들의 말처럼 대학생의 사회참여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이처럼 대학생과 사회가 멀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비단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정치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대학생의 탈정치를 촉진한 정치적 요인으로는 △거대 야당의 정치적 독점 구조 △대안정당 부재 △시민단체 무력감 등이 꼽힌다. 직선제 개헌으로 ‘민주 대 반민주’의 프레임이
학생회는 우리 학교 학생을 대표하는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들의 ‘정부’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린 그들을 우리 손으로 뽑는다. 총학생회는 학생을 위해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 학생에게 가만히 있으라 해서도, 그렇게 있게 해서도 안 된다. 명색이 총‘학생’회지 않은가. 이런 분위기 속에 학교 마저 가만히 있으라고 종용한다. 2013년, 시국선언2013년 국정원 사태.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 후 서울대 총학생회가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대학가에 국정원 사태에 대응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우리 학교 양
본지에서는 지난 7일부터 3일간 우리 학교 학우들을 대상으로 ‘대학생의 사회참여와 학내 참여’에 대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에는 인사캠과 자과캠에서 각각 108명, 57명 총 165명의 학우가 참여했다. 말은 해야겠지만…입 안 여는 대학생들우리나라의 정치·사회 이슈에 관심이 있느냐에 대한 질문에 절반이 넘는 56.4%의 학우가 ‘그렇다’고 답했다. 또한,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는 문제에 대학생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에 ‘필요하다’ 혹은 ‘사안에 따라 필요하다’고 답한 학우는 90.3%에 달
‘가만히 있으라’지난 4월 16일 진도군 해상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기울기 시작했다. 잠시 뒤 안내방송이 나왔다.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안전우려사고에 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순응했던 이들은 목숨을 잃었다. 구조부터 실종자 통계까지 어느 하나 제 역할을 못하는 정부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역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돌아온다. 과거 대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은 그들에게 ‘가만히 있으라’했으나 그들은 순응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직접 사회와 부대끼며 고민하던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책을 좋아하던 소년, 아름다운 사회를 꿈꾸다 이 동문은 경상남도 거창에서 상경해 서울 중동고등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삭막한 서울 생활에 힘들어하던 그에게 큰 힘이 된 것은 책이었다. “우연히 서점에서 ‘논어’를 뽑아서 읽었는데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그래서 유학의 전통이 있는 성균관대가 더욱 가고 싶어졌어요.” 그러나 꿈에 그리던 대학에 들어와 마주한 현실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고향에 있을 때는 접하지 못했던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사진을 보게 됐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 데모
‘희생’과 ‘노력’으로 프로의 세계에 서다 “대학생활을 해보고 싶었어요” 한화 이글스에 2차 4번으로 지명받았지만 고 동문은 프로가 아닌 대학교를 선택했다. 당시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프로에 입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대학교 진학은 의외의 선택이었다. 타석에서의 투지 넘치는 모습과는 달리, 서글서글한 인상과 차분한 말투에서 대학생활의 낭만을 좇는 인간적인 면을 느낄 수 있었다. 전력 보강에 한창이었던 우리 학교 야구부는 고 동문이 2학년이 되고부터 우승하기 시작했다. 프로에서는 날렵한 몸매로 테이블 세터로 활약하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