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학술부에 들어왔을 때는 내가 학술부 기자로서 어떤 소식을 기사로 전해야 하는지 몰랐다. 첫 방중 회의 때 ‘학술부스럽지 않은 기사다’라는 피드백을 받았던 건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처음 썼던 문건에서 소재를 바꾸고, 첫 학술부 기사로 게임 물리엔진의 원리를 다뤘다. 물리엔진이 게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다루며 ‘이게 학술부 기사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준정기자 생활을 보내면서는 보고서와 학술부 기사가 무엇이 달라야 할지 생각했다. 두 개 다 원리를 설명하지만 기사는 더 쉽게 원리를 전달한다는 것이 다른 점일까? 기사만이 할
삼척의 해변가를 맨발로 걸은 적이 있다. 자잘한 모래들이 발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으나 이내 파도에 휩쓸려갔다. 함께 걷던 이가 말했다. 바다에선 모든 게 부서진다고. 모래도, 파도도. 그는 몇 마디를 더 중얼거렸지만 새하얀 파도에 그 소리마저 부서졌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부서지며 드러나는 바다의 풍경이 제법 멋졌다.수습기간을 마치며 ‘결코 부러지지 않겠다’고 쓴지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내게 그간의 시간은 철저히 부러지고 또 부서지는 시간이었다. 이제는 그 시간의 가장 끝자락에 서 있다.부서진다는 것은 나의 오만함을 인정
깔끔한 기사. 성대신문에서 3학기를 활동하며 내가 쓰고자 했고, 써왔던 기사를 한마디로 정리한 말이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기사는 잘 썼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나의 기사는 잘 썼다고 평가받는 깔끔한 기사와는 달랐다고 생각한다.지금까지는 기사를 쓰면서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현상을 바라보고 이를 기록하는 일에 초점을 맞췄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자로서 기사를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에는 덜 주목했던 것 같다. 혹여나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없는지, 사실을 왜곡하지는 않았는지, 문제를 확대해석하는 것은 아닌지 등을
“다른 건 몰라도 열심히는 하자. 내가 벌린 일에 책임을 져야지.” 처음 신문사에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되뇌었던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열정이 빛을 발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수습기자 시절 처음으로 참여한 편집회의에서 열정적으로 의견을 주고받는 기자님들을 보며 3학기쯤 되면 내 기사에 대한 자신감과 애정이 넘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추측을 하곤 했다. 마지막 부서 기사 발간을 마무리한 시점에서 그런 추측이 낯 뜨거운 생각인 것을 잘 알고 있다.기사를 쓸수록, 다른 기자들의 훌륭한 글을 읽을수록, 내
이번 호의 시각면을 끝으로 나의 마지막 지면 기사가 끝이 났다. 이번 시각면은 뉴미디어부로 입사한 나에게 가장 긴 지면 기사였다. 시각면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뷰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주변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다. 카메라 한 대, 노트북, 녹음용 핸드폰, 그리고 작은 메모지를 들고 인터뷰이를 만나러 가는 길은 익숙하지만 낯설었다. 집 옆 가게의 사장님, 매일 환승하던 지하철 역사 속 공방의 작가님, 성대신문의 이름을 빌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나 혼자였다면 해보지 못했을 귀한 경험이었다. 인
성대신문이 1700호 발간을 맞았다. 그렇게 준비하게 된 1700호 특집에서는 그간 다룰 일 없었던 신문사의, 기자들의 이야기를 싣게 됐다. 여느 때보다 부담스러운 마음을 안고 시작한 취재였지만 인터뷰에 담긴 기자들의 말을 따라가고 있자니 특집 기사는 끝을 보이고 있었다.글은 그 사람의 세계를 닮아 있다고 한다. 기자는 분명 글로 팩트만을 전달하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그 글에는 기자의 세계가 담겨 있다. 이 신문에 담긴 기사들도 꼭 그런 것 같다. 누군가의 글은 사려깊고, 어느 글에는 열심인 모습이 있다. 이제 막 발간을 시작한 준
성대신문 보도부는 지난 호와 이번 호에 걸쳐 양 캠퍼스 단과대 학생회의 공약 점검을 진행했다. 나는 경영대, 정보 통신대, 자연과학대 총 3개의 단과대 학생회장님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고 기사를 썼다. 그간 썼던 기획기사들과는 달리 다소 정해진 형식이 있고 길이도 길지 않아서 큰 어려움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여느 기사를 준비할 때와 다름없는 걱정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어졌다. 기사를 준비하며 가장 어려운 것은 항상 ‘인터뷰이 컨택’이다. 소재를 찾고 흐름을 기획해 글을 써내는 것은 혼자서도 해낼 수 있지만, 내가 쓸 기
이번 호에 실린 기사는 내가 정기자가 되고 쓴 첫 기사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내 기사를 봤으면 좋겠지만 혹시 보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8면을 슬쩍 넘겨서 봐주면 좋겠다. 광화문광장을 재개장 날부터 8월 셋, 넷째 주를 바쳐 취재했다. 광화문광장 재개장 날 열린 빛모락축제는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재개장 ‘첫’날이기에 상기된 표정과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있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확신은 맞아떨어졌다. 밖을 10분만 돌아다녀도 얼굴로 땀이 흘러내렸지만 모두 모여 빛모락축제를 함께했다. 비록 이 장면은 분량상
기사란 것은 묘하다. 형태만 보면 글인데 꽉 찬 내용들은 마치 보고서와 같고, 현재의 일들을 담아낸다는 점에선 기록의 기능도 큰 것 같다. 기사는 최대한 간결하게, 어떤 문장도 필요 없는 문장은 없어야 한다. 더 줄일 수 없겠다고 생각한 기사도 또 줄이고 또 줄일 수 있었다. 그렇게 눈에 뭐 하나 걸리지 않는, 매끄러운 기사가 만들어진다. 마감 직전엔 눈물을 머금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부분까지 쳐내며 한정된 지면을 원망하기도 한다.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흥행을 보며 가볍게 ‘발달장애인’을 이번 기사 소재로 담아야겠다고
이번 발간까지 총 21개의 기사를 쓰면서 나는 계속해 이별을 겪어야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초고를 쓰고 동료들의 교열을 받으며 지면에 기사를 싣는 일은 늘 만족스러운 마침표라기보단 선명한 물음표였다. 인터뷰이의 의견을 충분히 담아낸 걸까? 조금 더 다양한 시각에서 다룰 수 있진 않았을까? 나는 이 기사에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쏟아지는 의문에 당당히 고개를 끄덕인 경험은 많지 않다. 매번 후회와 자책이 남았다.그러나 속상한 마음이 마냥 괴롭지만은 않았다. 다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기사에서는 어떤 소재를 공부하고 어떤
신문사에 지원했던 순간을 묻는다면 특별할 게 없다. 너무나도 하고 싶었기에 결정을 내리기까지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오히려 입사하고 나서부터 고된 선택들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속 깊은 떨림을 고스란히 느끼며 했던 모든 결정이 큰 자산이 됐다. 처음엔 단체 생활에 있어서 나만의 위치를 파악(어쩌면 단정)했고 그에 끼워 맞춰진 채 끊임없이 타협했다. 기자를 꿈꾸며 공들여 세워놓은 철학들이 툭툭 밀쳐질 때도 눈만 질끈 감았고, 공감 능력을 뽐내며 합리화하고 이해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나를 가둔 채 바라만 보기엔 도저히 나 자
‘나는 누구인가?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나의 가치는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가치와 같다. 내가 살리고 전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나다.’ 존경해마지않는 PD 정혜윤 님의 말이다. ‘옳다고 믿는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실천하자’ 아끼는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국회의원 장혜영 님의 말이다. 하얀 정사각형 공책에 사랑하게 된 말들을 훔쳐 온지 2년이 돼간다. 앞선 두 말은 그 중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말이다. 책에서 읽은, 기사에 적힌, 누군가가 나에게 건넨 말... 온갖 말들로 공책 여섯 권을 채우는 동안 나는 참
어떠한 문화 현상을 조명하고 가치를 밝히는 과정에서 전문가의 견해는 필수적이다. 기자는 보도하는 사람이지 논설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자유롭게 나의 생각을 전할 수 없는 것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은 펜을 든 나의 숙고 없는 몇 문장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는 지를 알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됐다.‘의외로 기사는 인터뷰에서 시작해 인터뷰로 끝난다.’ 지난해 겨울에 서울신문과 성대신문의 콜라보 기획 연재 시리즈인 ‘요즘 것들의 문화 답사기’에 참여해 기사를 쓰면서 서울신문 기자님께 들은 말이다. 그때는
기사 쓰기란 쉽다. 그러니까, 적당한 기사를 쓰기란 쉽다. 그건 많은 고민을 요하지 않는다. 전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한 소재들이 있다. 그런 소재를 선택해 관련 내용을 기사의 틀에 맞추면 된다. 어떤 지적이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는, 보기 좋은 기사가 당당히 지면의 한 구석을 차지한다.그리고 그걸 넘어서는 기사가 좋은 기사라는 평가를 듣는다. 어떤 매너리즘에도 갇히지 않고 통찰력 있게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번거롭더라도 최대한 많은 입장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을 들여다봐야 한다. 아이러
작년 1학기 수습기자였던 나는 직전 학기에 신문사 임기를 마친 친구와 학보사 기자 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친구에게 수습기자 트레이닝에서 경험한 기사 작성 과정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고 친구에게 토로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야, 네가 글을 과제처럼 써서 그렇게 느끼는 거 아냐?”라고 일갈했다. 그 당시에는 그 친구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어느 정도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됐다.내 전공 학과인 사회학과에서는 주로 폭넓은 주제에 대한 보고서가 과제로 주어진다. 보고서를 준비하는 과
주어진 지면을 채우는 건 정해진 시간 동안 연설하는 것과 같다. 대중이 나의 목소리를 읽느냐 듣느냐,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신문사에서의 생활은 실수하더라도 실언할 수는 없는 작은 지면 속에서 ‘어떻게 하면 가치 있는 소리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한 시간이었다.어쩌면 내 손에 들린 게 카메라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감사하게도 신문을 펼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곤 하는 사진을 찍는 게 내 일이었다. 성대신문 수습기자로 시작해 사진부 준정기자를 지나 뉴미디어부 정기자가 되기까지 펜을 드는 시간보단 뷰파인더에 세상을 담는 날이
취재 후기를 작성하기 위해 수습일기를 다시 열어봤다. 내 수습일기는 이미 준정기자분들의 수습일기들에 밀려 저 아래에 있었다. 신문사에서 제대로 활동한 기간은 한 학기밖에 되지 않지만 굉장히 오랜 시간이 지난 느낌이다. 몇 년 전에 써놓고 까먹은 일기를 구경하듯 나의 거창했던 포부를 읽어내려갔다. 내 이름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기사, 그것을 나의 이름를 쌓아가는 첫 단계로 생각하고 내 이름에 실례가 되지 않도록, 내 이름에 걸맞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이 적혀있었다.성대신문 홈페이지에서 내 이름을 검색하면 총 16개의 기사가 나
처음 취재를 나갔던 날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찬 바람이 매섭던 2021년 2월, 지난 학기 개강호 나의 첫 기사 소재는 ‘팀빌딩과 온라인 입학식’이었다. 당시 팀빌딩에 참여한 21학번 학우의 멘트를 얻고자 프레스증과 명함을 챙기고서 무작정 자과캠으로 향했다. 그때의 자과캠은 낯설어서인지 긴장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더욱 춥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프레스증을 목에 건채, 한 손에는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새 명함을 다른 한 손에는 멘트를 녹음할 휴대폰을 쥐고 후문에서 1시간가량을 서성거렸다. “안녕하세요 성대신문 보도부 기자 이현정
Der Augenblick은 눈 깜짝할 사이, 순간 또는 찰나를 뜻한다. 모든 시간은 찰나같이 지나가니 매 순간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에서 이것을 내 성대신문 이메일 아이디로 만들었다.사람들은 시간이 매우 빠르게 지나간다고 한다. 나도 성대신문에서의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길 바랐고 그렇게 지나갈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다. 그러나 일 년을 돌이켜보면 그 시간이 짧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지난학기 시각면 취재를 위해 사진부 기자들과 전통시장에 갔던 것은 삼 년 정도 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입학 후 학교 공부만 했던 작
올해 2월 이후, 9개월간 총 열두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취재후기가 실리는 지면에 함께 담길 특집 총론은 내 열세 번째 기사다. 나름대로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고 생각하면서도 확신이 없다. 나는 2월의 내가 바랐던 만큼 우리 사회의 귀퉁이를, 구석진 모서리를 잘 돌아보고 다녔나? 기사를 쓰는 내내, 내가 생각하는 기사의 정의에 대해 고민한다. 정확한 사실과 적확한 언어. 수습일기에도 적었고 취재후기에도 또 적는다. 하나 더 있다. 소수자의 목소리.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모습의 소수자가 존재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지면에 담으려고 애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