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의 신문사에서의 여정이 끝났다. 막상 마지막이라고 하니 더 열심히 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남는다. 성대신문이라는 그릇을 내가 채우기에는 너무 컸다. 내 능력이 뒷받침 해주지 못했다. 그만큼 부족하고 어린 나였다. 다행히도 선배 기자들과 동료 덕분에 성대신문에서 큰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선배 기자들은 나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주었다. 편향되고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던 나에게 매번 진심 어린 목소리로 내 생각을 수정해 줬었다. 또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쓸 때에도 선배 기자들은 나의 그릇된 생각에 대해서 다그치지 않고 올바
제목 그대로다. 발간 주 수요일 밤, 내 방에서 시도했던 첫 번째 취재후기가 산산이 부서졌다. 지금까지 써온 수많은 내 기사들처럼 편집회의를 거치지도, 체크를 받지도 않으며 단지 내 생각을 적어 내려가는 것인데도 말이다.자자 다시 집중해 보자. 내 취재후기의 제목이 ‘세 번째 취재후기’가 되는 건 전혀 원하지 않는 방향이니까. 여느 때와 같이 발간 주 금요일이 가는 줄도 모르고 내 마지막 부서 기사를 마친 뒤에 마주한 토요일 새벽, 이는 분명히 내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다.돌이켜보면 평범했다. 하루하루 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
성대신문의 기자라 하면 ‘신문 잘 읽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본인은 약간의 망설임 끝에 ‘고맙다’는 답을 하곤 한다. 지면에서 드러나는 본인의 존재감은 너무나 작기 때문이다. 성대신문의 뉴미디어부 기자들은 글을 쓰지 않는다. 지면에 자신의 글을 실을 기회는 있으나 대체로 몇 명의 기자들이 함께 글을 쓰며 그마저 사진이 주류인 기사다. 글을 쓰지 않는 기자는 실로 아이러니하다. 글이 아닌 매체들로 기사를 만들며, 다른 기자들의 글을 피드백하지만 정작 본인은 글을 쓰지 않는다. 우리의 주 무대는 유튜브와 인스타그
내가 쓴 기사를 잘 읽지 않는다. 애정이 없어서도, 귀찮아서도 아니다. 그 기사들은 사실 내 기사가 아니다. 첫 기사를 쓰던 때를 기억한다. 열정 가득한 모습만이 떠오른다. 문화인들과 메일을 주고받으며 설렘을 느꼈고, 학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간다움을 느꼈다. 기사를 쓰는 건 그런 내 세상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내 세상을 잘 담아낸 만족스러운 기사가 나왔고 성취를 느꼈다. 자부할 수 있는 내 기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다음으로 문제기사를 쓰던 때를 기억한다. 열심히 탐사한 내 세상을 기사에 잘 담았다. 필요한 내용을 잘 다룬 좋은
취재후기를 쓰기 위해 수습일기를 다시 읽는다. 수습을 거치며 내가 설정했던 목표가 얼마나 이뤄졌을지 확인한다. 당시에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전달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무엇이 바뀌었는가.바뀐 것은 없다. 그저 이야기를 잘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졌을 뿐이다. 기꺼이 시간을 내어 자신의 소중한 생각들을 한 학보사의 기자에게 나누는 다정함을 왜곡하고 싶지 않았다. 기사란 무엇인가를 고민할 때 누군가가 내게 해주었던 말을 기억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담아내는 글이 기사라 했다.
자수할 것이 있다. 그것에게 애정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의 움직임을 내 손으로 멈추게 한 적이 있다. 살아있는 것을 기계처럼 대했다. 나는 기사를 죽인 적이 있다.기사는 살아있는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생각의 움직임, 취재의 움직임 그리고 글을 쓰는 행위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숨을 쉬게 된다. 부끄럽게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 게으름이라는 오만한 핑계에 애써 지기를 자처하며 숨을 멎게 했다. 기계처럼 기사를 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글쓰기에만 매달리는 것이다. 처음 신문사에 들어
처음 학술부에 들어왔을 때는 내가 학술부 기자로서 어떤 소식을 기사로 전해야 하는지 몰랐다. 첫 방중 회의 때 ‘학술부스럽지 않은 기사다’라는 피드백을 받았던 건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처음 썼던 문건에서 소재를 바꾸고, 첫 학술부 기사로 게임 물리엔진의 원리를 다뤘다. 물리엔진이 게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다루며 ‘이게 학술부 기사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준정기자 생활을 보내면서는 보고서와 학술부 기사가 무엇이 달라야 할지 생각했다. 두 개 다 원리를 설명하지만 기사는 더 쉽게 원리를 전달한다는 것이 다른 점일까? 기사만이 할
삼척의 해변가를 맨발로 걸은 적이 있다. 자잘한 모래들이 발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으나 이내 파도에 휩쓸려갔다. 함께 걷던 이가 말했다. 바다에선 모든 게 부서진다고. 모래도, 파도도. 그는 몇 마디를 더 중얼거렸지만 새하얀 파도에 그 소리마저 부서졌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부서지며 드러나는 바다의 풍경이 제법 멋졌다.수습기간을 마치며 ‘결코 부러지지 않겠다’고 쓴지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내게 그간의 시간은 철저히 부러지고 또 부서지는 시간이었다. 이제는 그 시간의 가장 끝자락에 서 있다.부서진다는 것은 나의 오만함을 인정
깔끔한 기사. 성대신문에서 3학기를 활동하며 내가 쓰고자 했고, 써왔던 기사를 한마디로 정리한 말이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기사는 잘 썼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나의 기사는 잘 썼다고 평가받는 깔끔한 기사와는 달랐다고 생각한다.지금까지는 기사를 쓰면서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현상을 바라보고 이를 기록하는 일에 초점을 맞췄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자로서 기사를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에는 덜 주목했던 것 같다. 혹여나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없는지, 사실을 왜곡하지는 않았는지, 문제를 확대해석하는 것은 아닌지 등을
“다른 건 몰라도 열심히는 하자. 내가 벌린 일에 책임을 져야지.” 처음 신문사에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되뇌었던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열정이 빛을 발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수습기자 시절 처음으로 참여한 편집회의에서 열정적으로 의견을 주고받는 기자님들을 보며 3학기쯤 되면 내 기사에 대한 자신감과 애정이 넘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추측을 하곤 했다. 마지막 부서 기사 발간을 마무리한 시점에서 그런 추측이 낯 뜨거운 생각인 것을 잘 알고 있다.기사를 쓸수록, 다른 기자들의 훌륭한 글을 읽을수록, 내
이번 호의 시각면을 끝으로 나의 마지막 지면 기사가 끝이 났다. 이번 시각면은 뉴미디어부로 입사한 나에게 가장 긴 지면 기사였다. 시각면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뷰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주변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다. 카메라 한 대, 노트북, 녹음용 핸드폰, 그리고 작은 메모지를 들고 인터뷰이를 만나러 가는 길은 익숙하지만 낯설었다. 집 옆 가게의 사장님, 매일 환승하던 지하철 역사 속 공방의 작가님, 성대신문의 이름을 빌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나 혼자였다면 해보지 못했을 귀한 경험이었다. 인
성대신문이 1700호 발간을 맞았다. 그렇게 준비하게 된 1700호 특집에서는 그간 다룰 일 없었던 신문사의, 기자들의 이야기를 싣게 됐다. 여느 때보다 부담스러운 마음을 안고 시작한 취재였지만 인터뷰에 담긴 기자들의 말을 따라가고 있자니 특집 기사는 끝을 보이고 있었다.글은 그 사람의 세계를 닮아 있다고 한다. 기자는 분명 글로 팩트만을 전달하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그 글에는 기자의 세계가 담겨 있다. 이 신문에 담긴 기사들도 꼭 그런 것 같다. 누군가의 글은 사려깊고, 어느 글에는 열심인 모습이 있다. 이제 막 발간을 시작한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