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함을 찾아 베를린에 왔다. 교환학생 면접 준비를 위해 썼던 메모장엔 온통 그런 문장이 가득이다. 왜 베를린이냐는 질문에 더 다양한 조각을 더 선명하게 모으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나는 쉽게 애틋해지는 습관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쉽게 닮는다. 작년 여름에는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조각 중 어느 하나도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서 베를린에 가고 싶었다. 그 때는 여기서 모을 수 없는 조각이 베를린에 있다고 믿었다.막연한 믿음은 아니었다. 스무 살, 서울을 돌아다니며 어른이 된 기분과 대도시에 접속하는 기분을 즐기던 시절, 처
컴퓨터는 문학 텍스트 100권을 어떻게 읽을까. 작품 하나도 읽는 사람마다 감상이 다르듯이 컴퓨터 역시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텍스트를 읽을 수 있다. 그중 한 가지 방법은 이러하다. 기계는 작품 한 권을 구성하는 수많은 어휘를 가지고 가중치(중요도)를 계산하여 작품을 특징화할 수 있는 어휘 100개 정도(물론 그 이상도 가능하지만)를 추출할 수 있다. 그런 다음 주요 어휘 100개씩을 상호비교하여 100개 작품의 ‘관계’를 파악하여 100*100개 1만 개의 수로 관계성 정도를 측정한다. 결국 컴퓨터는 문학 작품 100권을 1만 개
직관적인 생김새 덕분에 섹스토이의 얼굴마담이 된 딜도는 표피에서부터 페니스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딜도는 그것의 대표성에도 불구하고 반려 테크노로 매끄럽게 전환되지 않았다. 특히 레즈비언 섹스에서의 딜도는 흥미롭다. 욕망의 대상에 기거함과 동시에 자신과 닮은 몸을 욕망한 레즈비언적 몸들은 손목 관절의 통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딜도를 선택하거나 딜도를 결연히 거부하며 자신의 테크닉에 자긍심을 느끼기로 선택했다. 검지와 중지, 중지와 약지 삽입 중 무엇이 왕도인가라는 검중중약 논쟁은 커뮤니티의 화제가 되곤 했으며, 레즈비언 야
올해 1월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렸던 ‘CES 2024’ 에서의 화두는 단연 AI(인공지능)이다. 칩 제조사와 PC, 스마트폰 제조사들도 AI를 활용한 제품을 대거 선보였다. AI기술이 전 산업에 확대되는 조짐이 보인다. 인간의 뇌를 모방한 AI기술은 1960년대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연구되어 온 분야로서 1980년대 전후, 학습에 필요한 엄청난 계산량으로 현실성 없는 기술로 인식되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딥러닝 학습 알고리즘의 개발과 더불어 그래픽 전용 처리장치인 GPU(Graphic Processing Unit) 시스
스캔들은 대중을 현혹하기 쉽다. 가장 흔한 가십거리이자 평생 당사자를 따라다닐 꼬리표이기도 하다. 특히 연예인의 개인사가 대서특필되는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최근 세 명의 배우를 둘러싼 스캔들이 화두에 올랐다. 여태 그랬듯 잠시 오르내리고 사라지나 싶었던 것이 점점 그 부피를 키워 하나의 사건이 됐다. 시작은 당사자들이 SNS에 올린 글이었다. 이를 필두로 며칠 내내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궜다. 필자는 타인의 사생활에 관심이 없는 편이라 무감하게 뉴스를 넘기던 중, 한 기사의 헤드라인에서 눈에 띄는 단어를 발견했다. 한 배우가 다
여기 죽어가는 노작가가 하나 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수십 년 넘게 자택에 틀어박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주의 작가 프레텍스타 타슈다. 타슈는 속칭 연골암이라 불리는 ‘엘젠바이베르플라츠’ 증후군에 걸려 살날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 전 세계의 기자들은 죽음을 앞둔 대문호를 인터뷰하기 위해 새떼처럼 몰려든다. 타슈는 그중 극소수를 엄선해 자신과 인터뷰할 기회를 하사한다. 기자들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은 타슈가 지독한 인간 혐오자라는 사실이다. 허위에 대한 혐오감으로 가득 차 있는 타슈는 문학과 독자, 나아가 인간의 허위를 낱
본인이 택한 길을 본인만의 길로 만드는 것이 정답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오직 언론인이라는 꿈 하나만으로 대학에 입학한 나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성대신문에 지원했다. 처음 입사해 수습기자 트레이닝을 받고 난 후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나는 멍청하다.’ 수많은 선배와 동기 기자들 사이에서 유일한 20살이었던 나는 누구도 부럽지 않게 귀염받았지만, 그런 대우와 내 마음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누가 봐도 질 좋은 선배들의 글에 비해 내 글은 한없이 초라했고 앞으로의 기자 생활이 너무나 막막했다. 길고 긴 회의와 마음에 비수를 꽂는 피드백들에 저항 없이 무너져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첫 기
독자들은 학보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이 질문에 한 독자로서 나는 학보만이 보일 수 있는 고유한 정체성이라 답하겠다. 기사의 완성도는 물론 중요한 문제지만 그것은 우선 독자가 기사를 읽기 시작한 이후의 이야기다. 기성 언론이 비추지 않는 곳을 향하는 시선, 투박할지라도 화두에 대한 ‘성대신문다운’ 통찰을 담으려는 시도는 곧 독자가 ‘굳이’ 성대신문을 펼칠 이유가 된다. 그런 면에서 보도면이 보이는 시선은 날카롭다. 보도 1면의 기사는 소재가 인상적이다. 소재가 신문을 찾아온 경우가 아닌, 기자가 소재를 찾아 나선 경우로 보인다. 앞
필자가 연구하는 분야 중 하나는 다양한 경험과 건강 발달 간 상호 관련성을 규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련성을 연구할 때 많이 사용되는 이론이 생애 과정 이론 (Lifecourse perspective)인데, 이 이론에 따르면, 언제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 전 생애에 걸쳐 발달의 터닝포인트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동기와 청소년기 문제 아동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좋은 선생님을 만나 긍정적인 경험을 통해 자신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이후 성공했다는 사례를, 매체를 통해서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이러한 긍정적 경험
곧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다가온다. 국회의사당을 지나던 나는 문득 ‘과연 우리는 우리의 이익을 대변하는 선거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졌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나부터 큰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우리 모두의 작은 관심으로 첫 단추를 채워야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스코틀랜드는 인구 약 550만 명의 작은 국가이다. 영국 본섬의 일원이지만, 아무래도 그 섬의 중심은 잉글랜드인 탓에 우리의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하는 편이다. 그러나 18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스코틀랜드는 유럽 지성세계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은 다양한 지적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특히 유럽 계몽주의 운동의 선두에 있었다. 이는 수도 에든버러가 “북구의 아테네”라는 명예로운 별칭을 가졌던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국의 토마스 제퍼슨은 “세상 그 어느 곳도 에든버러와 경쟁할 수 없다. 잉글랜드와 미국의 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