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피스트리. 이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직물은 신의 창조물이라고 불립니다. 가로 세로 3미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크기와 정밀화에 버금가는 섬세함까지. 다채로운 선염색사가 그려낸 기적은 뭇 화가의 붓놀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요.파리 클뤼니 중세 박물관에는 라는 이름의 매혹적인 태피스트리가 걸려있습니다. 여인이 일각수를 유혹해 길들이는
다 자란 사람이 무엇을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랑말랑했던 가치관은 콘크리트마냥 굳어버린 지 오래. 변화란 안락하게 굳어버린 자신을 모조리 부수고 쓸어내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달갑지 않으며 동시에 어려운, 게다가 그 파편에 주변사람까지 다치게 만드는 위험한 것. 어른의 변화는 그런 것입니다. 영화 속에는 일생일대의 변화를 목전에 두고 발을 담글까 말
자기 자신을 꼭꼭 숨기며 사는 삶, 과연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서 살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우리를 구속하는 수많은 규율과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우리의 입을 스스로 막게 하고 머리를 조여 오지요. 그런데 그 넘을
사막 한복판에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사막만큼이나 메말라 먼지 폴폴 날리는 바그다드 카페가 있었고요. 사고뭉치 남편을 쫓아낸 어느 아침, 가게 안주인 브렌다는 간판 아래 앉아 투박한 눈물을 훔치는 중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남편과 다투고 도로에 버려진 야스민이라는 여자가 양손에 짐을 한가득 들고 총총히 나타났지요. 한 사람은 땀범벅, 나머지 하
누군가를 만났을 때 우리는 으레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상대방은 자연스럽게 대답하겠죠, 자신의 이름을. 그리고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관계를 시작할 겁니다. 그 질서정연한 단계에서 하나라도 어긋나버리면 우리는 혼란에 빠질 테죠. 어쩌면 관계를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 할지도 모릅니다. 영화의 중심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 속 반라의 남자는 흰 셔츠만을 입고 오렌지색 매트리스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습니다. 얼핏 멋진 콧수염을 지닌 것도 좋은 풍채를 가진 것도 같아 보이는 그럴싸한 신사는
혼자서 애달프게 그리던 사랑하는 이의 얼굴, 그리고 달려가 마주한 얼굴. 그 둘이 너무도 달라서 내 감정을 의심해 본 적 없나요? 아무도 자신 있게 “응, 없어”하고 대답할 수 없을 거예요. 우리네 사랑의 작대기는 실재보다는 달콤한 환상을 가리키기 더 쉬우니까요. 한바탕 폭격이 지나간 자리,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비틀비틀 일어서는 이 남자의 이름은 ‘인만’입니다. 남북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지요. 간절히 뻗는 피투성이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흔들리는 흑백 사진이 보이나요. 그 속에는 아름다운 연인 ‘에이다’가 있습니다. 그가 돌아올 날만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당연한 일이라며 무심하게 지나치지는 않았나요.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또 확실히 하기 위해 노력하는 누군가도 있습니다. 영화 의 주인공 데이빗이 그들 중 하나죠. 그가 자신을 알아가는 길에서 희망을 얻고 절망을 받을 때 마주하는 한 편의 시가 있습니다. 라는 시인데요. 이 시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바라보자면 진짜 ‘나’가 누구일지 생각하게 됩니다. 영화 는 사람과 로봇이 함께 생활하는 미래, 그리고 그 미래에
주인공 아멜리에에게 현실은 지루함의 연속입니다. 무뚝뚝한 아버지와 친구 하나 없는 현실 속에서 아멜리에는 상상의 세계로 행복을 찾아 나섭니다. 그 곳에서는 레코드판이 팬케이크처럼 구워지고, 혼수상태의 환자는 나중에 실컷 놀기 위해 평생 자야할 잠을 몰아 자고 있을 뿐이지요. 동화 속 이야기 같은 그녀의 세상은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녀의 상상, 아름다운 색감으로 그려지는 이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자면, 화사한 빛으로 일상의 행복을 채색해 행복의 화가라고 불리는 르누아르의 그림이 떠오릅니다. 아멜리에와 함께 평범하면서도 조금씩 독특한
주인공 토마스 크라운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살 수 있는 억만장자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그의 삶을 따분하게 만들지요. 그는 단순히 삶의 긴장을 위해 미국 최대의 미술관에 있는 모네의 그림을 훔칩니다. 한편 그림을 되찾기 위해 파견된 보험수사관 캐서린 배닝은 기막힌 상황판단 능력으로 토마스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치열한 두뇌 싸움을 즐기면서 모든 일을 해결해 갑니다. 그녀와의 관계로 새로운 긴장을 얻은 그는 그림을 돌려주고 그간 벌였던 게임의 파트너였던 그녀와 즐거운 도피생활을 하게 됩니다.영화 속에서는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와 함께 통금이 발령됩니다. 거리 곳곳에는 카메라와 녹음 장치가 설치돼 시민들을 감시하고 있고요. 어떤 이웃들은 △피부색 △성적 취향 △정치 성향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가 잔학한 처벌을 받습니다. 이런 때 정부를 견제해야 할 언론은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프로파간다(Propa ganda)를 끊임없이 내보낼 뿐입니다. 자, 이것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2040년 영국의 모습입니다.영화 는 파시즘(전체주의)이 만연한 가상의 영국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 V는 아무도 반박하지 않는
동결은 했다지만 여전히 무시무시한 등록금 액수 앞에 한숨짓는 대학생들. 대학의 독립성과 학문의 자유는 △수익 △효율 △경쟁 등 시장의 논리에 묶여 시대착오적인 담론으로 치부된 지 오래입니다. 졸업만 하면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인가요. 청년 실업으로 졸업을 유예하는 ‘대학 5학년생’이 넘쳐나는 것이 냉혹한 현실. 우리의 의지와는 다르게 돌아가는, 탈출구도 없는 난장 속에서 삶과 실존에 대해 절로 의문이 듭니다.이렇듯 답답한 대학가 표정처럼 안톤 체호프의 희곡 의 인간 군상 또한 울상입니다. 이 극은 러시아 지
이미 어긋나버린 사랑이라도 움켜쥔 미련을 놓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사랑했던 이와의 추억은 잔인하게 불쑥불쑥 떠올라 우리를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들죠. 하지만 영화 의 여주인공 조제는 다릅니다. 그녀는 끝이 난 사랑을 뒤로 한 채 담담히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의아스러울만큼 조용하면서도 서둘러서요. 영화 은 평범한 대학생 츠네오와 다리가 불편한 소녀 조제의 귀엽고도 애달픈 사랑 이야기입니다. 일반인과 장애인의 사랑, 조금은 특별할 것도 같은 이들의 이야기는 여
바야흐로 21세기, 현대의 여성시대는 ‘벨 에포크’시대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벨 에포크란 ‘좋은 시대’, ‘아름다운 시대’를 뜻하는 프랑스말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전무후무한 풍요와 평화를 누렸던 파리의 시대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성의 사회·경제적 위상이 남성과 견줄만해진 이 시대는 ‘여성의 아름다운 시대’라고 할 수 있는 거죠.이 벨 에포크 시대에 그려진 그림,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속 여인도 지금까지 자신을 억눌러 왔던 사회를 향해 한껏 당당한 모습으로 마주합니다. 턱을 괴고 정면으로 치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