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함께할 공모전 이야기도 나누고, 방학 때 유럽이나 태국 여행을 가자고 대화했다.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Y가 현재의 것들에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고 있음을 보았다. 반면 나는 Y에게 지금 하는 모든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Y는 그런 내가 번-아웃을 겪고있다고 말했다.나는 왜 현재에 행복을 느끼지 못할까. 사실 내가 쫓는 곳에는 행복이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나를 드러내는 말에는 진심이 아닌 알량한 자존심만 담겨 있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흔히 여기는 ‘멋진 생각’을 갖기 위해 발버둥 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수많은 역설적 진리들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안을 비워내야 한다는 사실이나 처음의 시작에는 필연적으로 마지막 이별이 함께한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중학교 문학 시간에 배웠던 ‘역설’의 개념은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완전히 반대된다고 생각했던 모순된 개념들이 사실은 복잡하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내가 소설 속 등장인물의 입체성에 병적으로 주목하는 이유와도 엮어 말할 수 있다.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실망이 두려워 모든 것에 기대를 걸지 않았던
당신과 나는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처음부터 이게 무슨 말이냐며 당황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은 내가 될 수 없다.얼마 전 동생이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언니는 남들이 언니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나도 나를 이해 못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이해 하겠어.”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와 공감은 사람의 관계를 풍족하게 만든다. ‘내가 만약 당신이라면’의 주문을 덧붙이기 시작하면, 관계의 관절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고. 그래서 우리 가족은 여행을 갈 때마다 주변을 눈으로 보기보다 사진 프레임 안에 담아서 봤다. 관광지를 갔다 하면 체감상 열 걸음에 한 번씩 사진을 찍었다. 내 눈에는 이 산이 그 산 같고, 이 나무가 저 나무 같은데 매번 풍경이 달라질 때마다 사진을 찍어야 했다.그런 아버지가 속으로는 답답했다. 어쭙잖게 풍경을 찍어내는 카메라보다 내 눈이 더 정확한데 굳이 사진을 찍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반발심과 오기로 어릴 적의 나는, 사진 명소에서도 가만히 눈으로만 구경하고 서 있었다
가볼 수 없는 곳에 대한 그리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사랑, 겪어보지 않은 것들에 관한 애정. 그런 삶과 사랑의 원천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지닌 예술을 보면서 나는 그런 질문을 했다. 이야기 속의 모든 것들이 현실도 사실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야기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예를 들면 나는 무진이 그립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으며 눅진한 안개가 서린 그곳을, 윤희중이 걸었던 길을, 고향을 맞이하며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받아들
참 모순적이지 않은가.햇빛 쨍쨍하고 높은 하늘을 보고서 우울하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밤에는 죽죽 젖어가며 행복하다는 것이. 인생을 그리 부단히 복잡하게 살아왔다. 뭣하나 좋지 않은 게 없었고 뭣 하나 싫지 않은 것도 없었다. 행복할 때에 걱정에 죽고 걱정할 때에 행복에 미친다.그래서 그런지 사랑도 너무 쉽고 동시에 어렵다. 내 몸과 눈이 어려서, 서로의 반짝이는 눈에 반하기 쉽고, 나의 모든 것을 주기가 너무너무 쉽다. 사랑의 진입이 세밀하게 자극적이고 간단하다. 단 한숨의 눈 마주침으로 인해 나는 푸른 마음을 맡긴다. 단 한
“농구 좋아하세요?” 채소연이 묻는다. “네. 아-주 좋아합니다. 난, 스포츠맨이니까요.” 강백호가 대답한다. 대사나 인물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농구 만화 슬램덩크의 한 부분이다. 워낙 명장면이 많은 만화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손에 꼽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나는 슬램덩크는커녕 농구의 ‘농’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KBL, 국가대표 경기, 심지어 농구 웹툰까지 보는 내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뭔가 엄청난 사연으로 이렇게 된 것 같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시작은 정말 사소했다. 우연히
드라마 은 비단 서바이벌 게임이 줄 수 있는 긴장감 및 서스펜스를 잘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연과 배경을 가진 등장인물들을 조화롭게 배치하였다는 점에서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 중 의학도로서, 참가자로 등장한 의사의 모습을 조금 더 유심히 관찰하고 생각해보았다. 의사는 의료사고로 인해 빚을 진 탓에 오징어 게임에 참가한다.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이 의사는 일부 주최 측과 몰래 연합해 사람들의 장기를 적출하는 수술을 돕고, 게임에 필요한 정보와 물자를 얻는다는 특이점이 존재한다. 이러한 의사로부터 불법적인
인간의 성장을 개구리의 삶에 비유한다면, 우리가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올챙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될 때, 대학생에서 취업 준비생이 되고 신입 사원이 되는 순간 말이다. 그런데 힘들게 개구리가 되었는데 올챙이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너무 급격한 변화였을까? 올챙이로 돌아갈 때 우리는 마치 넓디넓은 우주에 혼자 던져진 기분을 느낀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고, 아무도 모르는데, 그런 곳에 적응해서 다시 개구리가 되어야 한다니. 절망적일 만하다.그런데 ‘우물 안 개구리’라는 표현을 들으면
스무 살들의 술자리. 지방과 간장 타는 냄새가 뽀얗게 피어오르는 건데, 그 매캐하며 부드러운 냄새는 담배연기를 떠오르게 하는 거다. 희뿌연 연기가 좁은 원형 테이블을 뭉게뭉게 흐릿하게 만든다. 그 뜨거운 연기에 우린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황급히 소주를 뒤로 넘긴다. 소주 때문일 수도 있다, 발간 스무 살 우리들의 얼굴은 말이다. 희끄무래한 연기는 우리의 얼굴을 가려준다. 스무살 대학생인 우리는 기쁘게 그 연기 뒤로 우리의 본 모습을 살그머니 숨기는 건데, 그래서 스무 살들의 술자리는 외롭다. 서로의 내밀한 감정은 고기 타는 연
요즘 고민이 생겼다. 싫어하는 것은 누구에게, 얼마만큼 밝혀도 되는 걸까? 사람을 제외한 대상이라면, 나는 어디까지 표현해도 되는 걸까? 싫어하는 것에 관한 얘기는 사실 나도 엄청나게 말하고 싶은 주제는 아니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먼저 밝혀본다. 나는 웹툰 읽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맛있는 케이크를 좋아하고, 예쁜 가방을 좋아한다. 나는 칵테일을 이것저것 마셔보는 것을 좋아하고, 적당히 어두운 곳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도 좋아한다. 가끔 엘피플레이어를 이용해 노래 듣는 것을 좋아하고, 따뜻함이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좋아한다.
‘시험 종료 5분 전입니다.’ 언제 들어도 긴장되는 이 목소리와 함께, 시험지를 마지막으로 검토하고 내려놓았던 그때였다. 나는 비로소 풀지 못한, 아니 풀지 않았던 마지막 4문제를 발견했다. 3번이나 확인했는데 무엇에 홀려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보지 못했을까. 내 생에 가장 짧았던 5분 동안, 나는 나를 수없이 자책하며 동시에 한 문장이라도 풀자 다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제출 후에는 우느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평소 시험에서 실수하지 않았었기에 나는 나의 실수를 인정하는 데 꽤 힘들었다. 다른 것을 탓해보고자 찾았지만 명백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