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성장을 개구리의 삶에 비유한다면, 우리가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올챙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될 때, 대학생에서 취업 준비생이 되고 신입 사원이 되는 순간 말이다. 그런데 힘들게 개구리가 되었는데 올챙이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너무 급격한 변화였을까? 올챙이로 돌아갈 때 우리는 마치 넓디넓은 우주에 혼자 던져진 기분을 느낀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고, 아무도 모르는데, 그런 곳에 적응해서 다시 개구리가 되어야 한다니. 절망적일 만하다.그런데 ‘우물 안 개구리’라는 표현을 들으면
스무 살들의 술자리. 지방과 간장 타는 냄새가 뽀얗게 피어오르는 건데, 그 매캐하며 부드러운 냄새는 담배연기를 떠오르게 하는 거다. 희뿌연 연기가 좁은 원형 테이블을 뭉게뭉게 흐릿하게 만든다. 그 뜨거운 연기에 우린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황급히 소주를 뒤로 넘긴다. 소주 때문일 수도 있다, 발간 스무 살 우리들의 얼굴은 말이다. 희끄무래한 연기는 우리의 얼굴을 가려준다. 스무살 대학생인 우리는 기쁘게 그 연기 뒤로 우리의 본 모습을 살그머니 숨기는 건데, 그래서 스무 살들의 술자리는 외롭다. 서로의 내밀한 감정은 고기 타는 연
요즘 고민이 생겼다. 싫어하는 것은 누구에게, 얼마만큼 밝혀도 되는 걸까? 사람을 제외한 대상이라면, 나는 어디까지 표현해도 되는 걸까? 싫어하는 것에 관한 얘기는 사실 나도 엄청나게 말하고 싶은 주제는 아니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먼저 밝혀본다. 나는 웹툰 읽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맛있는 케이크를 좋아하고, 예쁜 가방을 좋아한다. 나는 칵테일을 이것저것 마셔보는 것을 좋아하고, 적당히 어두운 곳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도 좋아한다. 가끔 엘피플레이어를 이용해 노래 듣는 것을 좋아하고, 따뜻함이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좋아한다.
‘시험 종료 5분 전입니다.’ 언제 들어도 긴장되는 이 목소리와 함께, 시험지를 마지막으로 검토하고 내려놓았던 그때였다. 나는 비로소 풀지 못한, 아니 풀지 않았던 마지막 4문제를 발견했다. 3번이나 확인했는데 무엇에 홀려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보지 못했을까. 내 생에 가장 짧았던 5분 동안, 나는 나를 수없이 자책하며 동시에 한 문장이라도 풀자 다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제출 후에는 우느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평소 시험에서 실수하지 않았었기에 나는 나의 실수를 인정하는 데 꽤 힘들었다. 다른 것을 탓해보고자 찾았지만 명백한
자연스럽게 집어 든 카디건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유난히 선선한 바람에 가볍게 동네 한 바퀴만 돌고 집에 들어갈 생각이었던 발걸음이 자꾸 다른 곳으로 튀는 날. 그런 날이면 가로수 가지에는 어느새 꽃눈이 달려있고, 무심코 지나쳤던 아파트 화단은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비꽃 같은 풀꽃까지 벌써 피어있다. 그제야 아 요새 해가 빨리 뜨더라니, 싶어 핸드폰을 켜면 네이버 로고는 귀여운 그림과 함께 오늘의 절기를 알려준다. 춘분. 봄이란다.봄은 꽃의 계절이다. 꽃이야 다른 계절에도 피지만, 하얗고 검은
대한민국에서 조울증 환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경쟁과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대사회에서, 우울증은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지만, 조울증은 생소하다. 사람들은 평소 텐션이 높거나 잘 노는 친구들을 보며 우스갯소리로 “쟤 조울증 아니야?”라며 사소한 농담을 던지지만, 조울증 환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농담은 불편하다. 조울증을 겪은, 그리고 겪고 있는 사람으로서 ‘담소’를 통해 조울증 환자가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풀어내고자 한다.나는 비록 극 조증이나 극 우울증이 온 조울증 환자는 아니지만 (정도를 재단할 수는 없긴 하지만), 주
어렸을 적엔 유난스레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는 총총한 삶을 살았다. 기껏해야 도라에몽을 좋아했고, 나란히 앉아 우유를 마시곤 하던 단짝을 좋아했고, 오디세우스의 여정이 어떻게 끝났는지 두 손 모아 기다리던 만화책을 좋아했다. 그리고 깨물면 이렇게 눅눅할 수가 없는 가지무침을 싫어했고, 아이스크림을 사 먹기엔 모자랐던 주머니 속 동전과, (많은 사람이 그럴 테고 그럴 것인) 엄마의 잔소리를 싫어했다. 다분히 어렸던 취향이었지만 내가 사는 데에 방해가 됐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 그것에 대해 논박하면 나는 생각을 쉽게 바꿨다. 예를 들
대학생이 된 나에게는 매일같이 고통의 시간이 찾아온다. 오늘 뭐 먹지...? 여럿이서 식사 메뉴를 정하기란 쉽지 않다. 먹고 싶은 메뉴가 있어도 혹시 상대방이 그 메뉴를 싫어하지 않을까, 비싸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고민하며 함부로 제안하지 못한다. 그저 친구가 제안해주기를 기다릴 뿐인데,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가만히 있거나, 아무거나 괜찮으니 내가 고른 메뉴를 먹겠다고 한다. 서로 먹고 싶은 메뉴가 다른 것은 당연한데, 왜 먹고 싶은 것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할까? 모두가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말하고 그중에서 고르면
이건 내 실패에 대한 이야기다. 에서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내 ‘개똥철학’을 내 동료들에게 설파하곤 했는데, 대학 신문의 사회부 기사는 르포르타주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면 그만하라는 동료들의 질타가 돌아왔으나, 나름의 변명은 있었다. 우린 분석이 아닌, 이야기를 전달해야 한다는 것. 적어도 나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 쪽이었다. 아무리 견고한 팩트도 사람 사이에 그어진 생각의 선을 넘을 순 없지만, 진솔한 이야기는 그 선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었다. 팩트와 숫자는 강력하지만, 이야기만큼 매력적이진 않으므로. 그런
언제부턴가 어떤 일에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고 느낀다. 어릴 적 꿈꾸었던 여행작가, PD, 변호사 같은 장래희망이라던가, 미드 ‘글리’를 보고 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던가… 꿈들을 어느새인가 잊고 ‘살아지는 대로 살자’같은 마인드를 가진 채 시간을 떠나보내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중학교와는 사뭇 다른 대학 입시의 폐쇄적인 분위기를 갑자기 마주하며 심적으로 홍역을 앓았다. 그때 고등학교 내신이 바닥을 치고 난 뒤 기계적인 입시 공부에 집중한 뒤로는 어른이 된 지금도 어느 일이든지 가슴 뛰는 법이 없다. 아니 애초에 가슴 뛰는 일을 찾기
분명 어제까지 나는 귀여운 스무 살이었는데, 지금은 왜 '에타' 취업 게시판이나 들여다보며 손톱만 딱딱 물어뜯고 있는 거냐. 헌내기가 된 지는 오래요, 두 달 뒤면 '이십 대 중반이냐 아직 초반이냐' 사소하지만 중요하고 상대 없는 싸움을 시작하는 스물셋이자 4학년인 너, 나, 우리.그리고 이건 미래가 두려운 '사망년'의 학교 가는 길마저 낭만으로 점철된 스무 살 회고록.대학생이 되었음을 등·하교를 통해 실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일 아침 6시 반에 기상해 간단히 선크림만 바르고 체육
맛있는 음식, 멋진 풍경, 새로운 환경과 경험. 모두 누군가에겐 여행의 이유가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은 여행을 하며 각자 다른 이유로 행복과 기쁨을 즐긴다. 하지만 나는 남들과 조금 다른 이유로 여행을 좋아했다. “일상의 도피” 이것이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특히 타국을 가면 그 행복감은 극에 달했다. 내가 마주하는 이 환경들이 주는 신선함뿐만 아니라 일상의 압박감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은 나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커다란 기쁨이 되었다. 홍콩의 야시장을 걸으며 밀크티를 마실 때, 밝고 화려한 마카오의 불빛들을 바라보
“아 근데, 나 여자 좋아해.” 커밍아웃을 들었던 처음 들었던 순간은 고등학생 때였다.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친구가 대담하게도 교실 한복판에서 커밍아웃한 것이다. 쉬는 시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연애 문제를 토론하던 아이들 속에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터진 말이었다. 몇 초 전만 해도 자유롭게 대류 하던 공기가 급속도로 멈췄다. 숨이 턱 막혔다. 진공 상태에서 모두가 어안이 벙벙할 때, 그 애는 담담하게 자신의 첫사랑 여자애 얘기를 시작했다. 이윽고 진공 상태가 깨지고 질문들이 사뿐사뿐 도착했을 때도 그 애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을
언니가 식재료를 조금 보내 왔다. 동생 굶고 살까 봐. 괜한 걱정이라고 타박하면서도 숨통이 트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고운 말만 하긴 왠지 민망해 너무 많다는 둥 칭얼거리는 소리를 섞어 언니에게 고맙다고 카톡을 보낸다. 고기부터 바로 냉장고에 넣고 박스 포장을 분해한다. 운송장과 테이프를 깔끔하게 뜯어내고 박스만 차곡차곡 접어 끈으로 묶어 둔다. 쓰레기는 화·목·일요일에 내놓으라고 했지. 오늘은 해당사항 없다. 4평짜리 집에 박스 쓰레기를 보관할 곳이 마땅찮다. 현관 앞에 큰 쇼핑백을 펼쳐 놓고 우선 그 안에 넣는다. 출근 시간이다
자, 약 드세요. 의사가 시계를 보며 말한다. 약을 삼킨다. 물까지 다 드셔야 해요. 입 벌려보세요. 아-. 혀 밑도. 그리고 정해진 시간마다 채혈이 있고, 정해진 시간에 도시락을 먹는다. 조금 식어도 먹을 만하다. 피를 많이 뽑아서 그런지 조금 어지럽다. 병동 안의 병상에는 나와 비슷한 표정을 한 사람들이 빼곡하다.생물학적 동등성 시험. 들어본 사람도 있을 터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임상시험과는 조금 다르다. 생동성 시험은 이미 시판된 약의 카피본이 원본과 생물학적으로 동등한 약효를 가진지를 시험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신약
목적을 불문하고 밖에 나가는 일 자체가 꺼려지는 요즘이다. 오늘은 볼 영화가 없을까, 하고 인터넷을 표류하던 도중 한지민(수영 역), 박형식(인수 역) 주연의 한 단편 영화를 만났다. 는 삼성전자가 저시력 장애인들의 불편을 해소하고자 만든 VR용 애플리케이션 '릴루미노'를 소재로 제작한 31분의 러닝타임의 단편영화다. 그러나 영화 속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 장애인들 간의 감정교류는 이를 단순한 상업 영화로 치부해버리기에는 나로 하여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우리의 통념과는 다르게, 자
아빠는 무작정 수동필름카메라의 레버를 돌리고 급하게 사진을 찍어대는 나를 타일렀다. “필름카메라는 신중하게 아껴서 찍는 거야” 나는 삐죽거리며 뭘 또 아껴야 하는 거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여러 번 찍으러 다녀보고 말뜻을 이해했다. 정성, 시간, 돈, 이 세 가지가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필름을 주문하고 사진관에 직접 필름을 맡기러 가는 정성. 필름이 현상될 때까지 소요되는 시간.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필름 값과 현상 비용.정성과 시간과 돈을 투자하면서 필름 사진을 찍는 이유는, 특유의 감성 때문이다. 수동
“이거 마셔봐” 일하고 있는 수제맥주 펍의 사장님께서 처음 보는 맥주를 한 잔 건네주셨다. 와인과 닮은 검붉은 빛은 어서 마셔보라며 손짓하는 듯 했고, 시큼한 체리의 향은 침이 꼴깍 넘어가게 만들었다. 오묘한 빛깔의 액체를 한 모금 넘겼더니 새콤달콤한 신 맛과 쿰쿰하면서도 깔끔한 풍미가 느껴졌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맥주와는 완전히 달랐다. 감격스러웠다. 그 한잔을 아껴 마시며 맥주의 이름인 몽스 카페(Monk’s Cafe)를 계속해서 되뇌었다.몽스 카페는 시큼함이 특징인 사워 비어(Sour Beer) 중에서 플랜더스 레드 에일(F
‘네가 사회생활을 안 해봐서 그래. 사회는 그런 곳이 아니야.’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초년 직장인들은 직장에 적응한다. 직장에 적응한다는 것은 그 회사의 분위기를 익히고 업무를 배우는 것을 말한다. 때로는 직장 내 부정한 모습도 분위기를 보며 함께 맞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나의 목소리를 잊어버리고 조직의 목소리에 하나가 된다. 국민과 소통해야 하는 정당, 그리고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켜줘야 할 언론마저 이렇다면 민주주의에도 큰 위기가 올 것이다. ICT의 발전으로 뉴미디어의 시대가 도래했다. 유튜브를 통한 개인방송은 민주주의의
학교를 다니다 보면 기다려야 하는 것들이 많다. 점심시간 식당 발권기 앞에서, 혜화역 셔틀버스 정류장 앞에서 그리고 행정실 앞에서도 우리는 기다린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는 때가 있다. 바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이다. 일부 과제 도서와 핫북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책이 서가에 꽂혀있다. 지금까지 300여 권 정도 책을 빌리며(대부분 들으면 아는 책들이다) 기다려본 적은 손에 꼽는다. 학생들이 책을 잘 읽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5월 성대신문 기사에 의하면 학부생 대출 권수는 2008년 이래 10년간 꾸준히 감소해왔다.왜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