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글에는 글쓴이의 성격이 드러난다. 내 글에는 섬세함이 없다. 다소 뭉뚱그려져 있고 기사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 내 성격과 맞닿은 부분이라 이 글을 쓰면서도 부끄러워진다. 글을 통해서 나 자신을 알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또 새삼스레 나를 알아간다.나를 알아가는 과정은 신문사 기획 회의를 통해서다. 신문사 모두가 참여하여 내 문건에 피드백 주는 시간 동안 내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 사람들의 시각이 얼마나 다양한지, 반성과 감탄이 동시에 절로 나온다. 전공수업에서 경험해 본 팀플 때문에,
마지막으로 ‘일기’를 쓴 건 아마도 초등학생 때일 것 같다. 일기는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을 기록하는 것인데, 짧은 단어조차 기록하지 않고 너무 많은 시간을 허투루 보내온 것 같았다. 대학교 3학년, 흔히 말하는 ‘취준’을 하며, 현질적인 문제들에 부딪히기 시작했고, 23년이라는 짧지만 바쁘게 살아온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성대신문은 관찰자로서 세상과 학교를 기록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 들어오게 됐다. 합격 후 수습기자 트레이닝이라는 형식의 일기를 쓰며 2022년 봄 학기를 보냈다. 준정기자가 된 지금, 제출했던
방의 가구 배치를 바꾸던 중이었다. 침대를 건드릴 때마다 수상할 정도로 먼지가 심하게 날렸다. 이상함을 감지하고 매트리스를 들어내 보니 시트 아랫부분이 온통 까진 채였다. 품질 탓인지 열에 녹았던 건지 잘게 부서진 얇고 흰 껍질들이 눈처럼 휘날렸다. 눈앞이 아득했다. 시트를 통째로 말아서 버리고 그 잔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돌돌이를 굴리고 청소기로 빨아들여도 자꾸만 어디에서 튀어나온 새로운 조각들이 나풀댔다. 한 시간 남짓을 붙잡고 낑낑댔을 때에야 상황이 대충 갈무리됐다. 더는 쳐다보기도 싫어서 이만 새 시트를 덮으려고 했다. 어
도전이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언제나 두렵고 회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사소한 일에도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 때문에 항상 새로운 도전 앞에서 내가 할 수 있을까 하고 망설이며 지레 겁을 먹곤 했다.성대신문에 지원하는 것도 큰 도전이었다. 그런데도 지원을 결심한 이유는 나에게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끝난 1학년을 되돌아보자 1년 동안 나는 무얼 했나? 하는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나름 학업에 열중했다고 생각했지만, 대학교 4년이 강의와 과제로만 기억에 남고 싶진 않았다. 3학기 개강을 앞두고 새로운 활동
기자가 멋져 보여서 들어왔다. 그런데 그 첫인상이 깨졌다. 이제 글쓰기의 민낯을 본다.유하고 부드러워 보였던 것과 달리 글을 쓰는 일은 거칠고 험궂다. 완성된 기사를 쓰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치고. 기사를 쓰는 일은 생각했던 것 보다 상당히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동시에 그러한 점이 글을 쓰는 일을 고귀하고 정성 어리게 만든다.글쓰기의 민낯은 나의 민낯도 드러낸다. 글은 얼버무리지 않기에 나의 부끄러움을 낱낱이 보여준다. 하지만 모든 만남이 그렇듯이 좋은 첫인상이 있었기에 결단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글 쓰는 일이 해볼 만한
글은 내가 가지지 못한 재능이었다. 내게 글은 처음부터 주어져있다기보다는 끊임없는 구애의 대상이었다. 활자가 좋았다. 더 정확히는 그 안의 세계가 좋았다. 그렇게 매일 책을 읽던 어린이는 키보드 자판 위에 손을 올렸다. 머릿속에 상상하기만 했던 것들이 구체화되는 과정은 경이로웠다. 매일매일 하교 후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썼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넘쳐났다. 결코 고갈되는 법이 없었다. 이야기를 좋아하던 어린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시험이 끝난 후에 몰아서 쓸 글을 기대하며 시험공부를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계속 글을 썼다. 자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글을 쓰기 좋아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였다. 10년전 2012년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단지 몇 백원 받으려고 가족 신문을 멋도 모르고 만들었었다. 그때 신문 이름이 ‘동현 신문’이었다. 동현의 뜻은 아이 동(童)에 내 이름인 어질 현(賢)이다. 어린 내가 어질게 쓰는 신문이라는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세상의 일을 알리는 기자라는 직업을 꿈꾸게 되었었다.글의 힘은 위대하다. 슬픔, 아픔, 행복함, 즐거움과 같은 감정을 담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로 하는 표현과 행동으로 하는 감정의 전달과는
성대신문에 지원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PD를 꿈꿨기에 글쓰기 실력을 키우고 싶었다. 어쩌면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했기에 트레이닝 과정이 나에게 더 무거웠는지도 모르겠다. 초반 트레이닝 과정이었던 지면 평가 땐 그저 다른 사람들의 피드백이 신기했었다. ‘나는 찾지 못했던 부분인데,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트레이닝 후반부가 되어 부서별로 문건을 발표할 때는 나의 부족함을 여실히 느꼈다. 나는 최 씨여서 늘 마지막으로 문건을 발표했는데, 앞의 기자님들이 발표하는 걸 듣고 있으면 내 문건은 너무 초라하게 느껴
2019년. 아직 찾아오지 않은 봄을 애써 흉내 내는 혜화의 쌉쌀한 공기를 마시며 했던 첫 등교가 아득하다.덜컹거리는 셔틀과 아찔한 오르막은 습하고 쓸쓸한 공기를 보낸 것에 비례해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그 익숙함이 권태가 되어버리면 어쩌지 하는 불안한 의문이 들 때쯤에 서둘러 군대에 갔다. 그저 스물하나 였던 그때는 세상을 괴롭히던 역병에 맞서 뭐라도 해내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다.그렇게 일 년뿐이던 익숙함에서 벗어나 또 다른 계절을 보내며 많은 변화를 맞이했다. 정말이지 많이 사유(思惟)했다.강원도 원주 하늘에 박힌 별들을
전역 후 약 9개월의 시간 동안 퇴보는 있을지언정 발전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나날들을 보냈다. 코로나로 인해 세상이 멈춘 것 같다는 핑계로 나 자신 또한 멈춰있어도 된다고 합리화하며, 매일같이 해가 밝는 것을 보며 잠이 들고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시는 부모님의 도어락 소리에 잠이 깼다. 눈 뜨자마자 어둑해져 가는 하늘이 어느 날부터인가 나의 한심한 삶의 밝기와 동일시되어 갈 때쯤, 더 밝아지기 위한 무언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내가 다시 빛을 낼 수 있도록 하는, 진심으로 열망하는 무언가를 말
내일 내 동기들이 졸업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반대로 이런 날이 올 때도 됐지 싶다. 사실 나 자신도 이제 후자의 생각에 많이 가까워진 것 같다. 축하 꽃다발을 예약하는 것도, 차려입고 오라는 참 어려운 부탁에 옷을 뒤적이는 것도 왜인지 모르게 너무나 익숙하다. 마치 누군가의 졸업식을 여러 번 가본 것처럼.스물, 스물하나라는 어린 나이에 만나 스물넷, 스물다섯이라는 나이에 졸업을 하다니, 내가 그들의 졸업에 해준 게 뭐가 있다고 괜히 뿌듯하다. 음 잠깐 생각해보니 해준 게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국어국문학과면 글 잘 쓰겠네?”학과 소개를 하고 나면 꼭 듣는 한 마디였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은 항상 있었지만, 많이 써본 적도, 원하는 만큼 잘 써본적도 없었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은 내게 두려움이기도 했다.그래서인지, 나에게 글은 항상 ‘언젠가는 차근차근 풀어나가야할 숙제’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중, 기자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고, 여러 경험 끝에 직업으로는 나와 맡지 않겠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학보사라는 곳에 들어오게 된 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글을 구성해내는 기사의 매력을 느껴서였다.기사
성대신문 일러스트 제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보사 활동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친구의 제안도 받았다. 하지만 기자 지원까지 하는 선택은 정말이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곧 4학년을 바라보는 입장으로서 3학기를 무조건 채워야 하는 단체에 지원한 것은 휴학을 결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면접 때문에 떨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합격 후에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글기사는 안 쓴다고 해서 지원했지만, 스스로 뉴미디어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 즐거울까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원래 sbs나 kbs 등에서 따로 독립 채널을
대학에 입학한 지 어느덧 3년이 흘렀다. 그 말은 성대신문에의 지원을 2년 가까이 고민했다는 것이다. 나에게 성대신문은 오랜 시간 지원을 고민하다 글 쓰는 데에 재주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내려놓은 지 오랜 낭만이었다.나는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많은 젊은 세대처럼 지면의 글씨보다는 화면의 영상이 더 익숙하고 즐거웠다. 장기화된 바이러스로 방 안에서 즐기는 각종 영상 매체들과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웠던 어느 날, 성대신문 뉴미디어부 모집공고를 보았다. 미처 다 내려놓지 못한 미련이 에브리타임의 성대신문 게시판을 즐겨찾기에서 해제하지 못하고
항상 막연하게 방송, 언론, 미디어 매체와 관련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너무 오래된 꿈이었던 지라 왜, 언제부터 이 꿈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러다 남들보다 긴 수험 생활을 겪으며 입시에 지쳐 잠시 동안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 시기를 지나 대학에 입학한 후, 다시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어린 시절 내가 꿈 꿔왔던 그 분야가 가장 내 심장을 뛰게 한다는 사실이었다.그 후, 이제는
용의 꼬리가 되고 싶어, 뱀의 머리가 되고 싶어?막 13살이 된 겨울에 캠프에서 만난 여자애의 물음에 참 이상한 걸 생각한다 싶었다. 용의 꼬리와 뱀의 머리보다는, 공을 멀리 차서 친구들의 환호를 듣는 방법을 고민하는 게 좋았다. 그 애를 지금 다시 만난다면, 묻고 싶다. 뱀의 머리가 용의 꼬리보다 낫다고 알려주는 속담 책에게도 묻고 싶다. 뱀은 용의 존재를 알까. 안다면, 뱀의 머리에서 안주할 수 있을까.성대신문은 내게 용의 꼬리였다. 다만 조건이 있다. 다시 뱀으로 돌아갈 수 없다. 3학기 의무 활동은 내게 그렇게 들렸다. 한가
고등학교 재학 시절,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아리 중 하나였던 학보사에 들어갔다. 편집부로 2년간 일했고, 애정을 가지고 학보를 제작했다. 하지만 기자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성대신문에 들어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성균관대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성대신문 모집 글도 보았지만, 더는 학보사에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다. 익숙하고 궁금해서 관심은 갔지만, 전공으로 택했던 ‘영상학’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지원하지 않았다.그러다 작년 10월, 성대신문 뉴미디어부의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새
사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초반까지만 해도 학보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내 진로와는 딱히 연관성이 없을 것 같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교에 입학해서 관심 있는 특정 분야와 관련된 활동만 하면서 이유 모를 부족함을 계속 느꼈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고 있음에도 무언가 허기 진 느낌이 계속 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게 된 성대신문 뉴미디어부 모집 글이 나의 알 수 없는 허기를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글을 쓰는 일은 어떤 방면에서든 미래의
믿는 구석은 없지만 스스로를 믿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어제 생각한 건데, 기사 쓰기 전 눈 시릴 때까지 남의 글을 살피는 습관이 생길 것 같아요아직도 저는 제가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이 너무 무겁습니다밤을 쪼개어 쓴 글들이, 진심 어린 말들이 당신께 어떤 형태로 닿게 될까요이왕이면 모르는 상태가 좋습니다정확하게 말하면 ‘모르겠는’ 상태입니다알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잘은 몰라서 괴로운 순간. 머리 아픈 느낌아는 것 없어 겸손할 수 있고 모르니 궁금한 게 많아 힘이 나서요자주 ‘모르겠고’ 싶으며모르기에 쓰고 싶습니다현실들은 제 눈
지난 학기 마지막 1688호, 사회부 지면 0.5p가 남아 ‘스토킹처벌법’이라는 주제로 내가 덜컥 지면 기사를 쓰게 되었다. 원래는 웹기사로만 쓸 예정이었으나 남은 지면을 채우기에 내 소재가 적절하고 시의성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기말고사가 점차 다가오는데 기사를 빠르게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걱정이긴 했지만, 어차피 써야 했을 기사를 더 빨리 마무리해버린다는 점에서 안심이기도 했다. 문제는 ‘기성 기사를 반복하는 수준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지? 내가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지?’ 였다. 스토킹처벌법은 시행 초기에 관심이 뜨거웠지만,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