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건축을 전공한다. 건축학과에서는 집을 어떻게 지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익히는 과정을 반복한다. 나는 동시에 성균관대 학보사 성대신문 보도부의 기자이다. 기자는 기사라는 글을 어떻게 지을지 고민하고 직접 적는 과정을 반복한다. 두 역할에서의 나는 ‘짓기’를 한다.내가 하는 짓기라는 행위에는 여러 특징이 있다. 먼저, 짓기에는 사실 상대방의 이해가 전제된다. 이에 관련해서 전공 수업때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이 있다. “설계는 너 마음대로 해, 대신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어야 좋은 설계야.” 아무리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는 집을, 글을
어렸을 때부터 의미 부여하는 것을 좋아했다. 평소처럼 맛없는 급식에도 농담 삼아 ‘다시 없을 수능 2주 전 화요일 자 급식’이라며 소중히 한술 뜨라 했던 기억이 난다. 참고로 그 주 내내 그러고 다녔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아무 일도 없는 날에 의미를 담으면 왠지 특별해지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떤 의미도, 이유도 찾지 못한 일은 너무 싫었다. 우리가 더럽힌 교실은 우리가 치우는 것이 맞지만, 교무실 청소를 왜 학생이 하지? 귀한 가르침을 청소로 보답한다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기사 작성으로 밤을 지새울 때
코로나 학번으로 입학한 나는 수업을 위해 학교에 오는 날보다 신문사 일을 위해 학교에 오는 날이 더 많았다. 주변에선 내가 입학한 게 아니라 꼭 입사한 것 같다며 바쁘게 뛰어다니는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어느 정도 각오했던 일이지만 신문사 생활은 정말 힘들었다. 처음에는 억울했다. 이렇게나 바쁘다니! 끝없는 회의와 취재, 기사 작성과 첨삭 과정이 발간이 있는 주마다 반복됐다. 첫 번째 기사가 있던 주에는 며칠 만에 몸무게가 확 줄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내 억울함은 점점 안타까움으로 변해갔다. 이렇게나 열심히 썼는데
‘안녕하세요 성대신문 보도부 조소희 기자입니다.’ 내 이름 석 자 뒤에 따라붙는 기자라는 호칭이 익숙해질 때 쯤 성대신문 정기자가 됐다. 나도 모르게 기사가 술술 써지고 피드백이 쏙쏙 보인다는 신비한 정기자의 경지. 드디어 정기자로 승격한 발간 1주차였다. 준정으로 시작할 무렵 한글 파일에 썼던 내 글이 기사 지면의 모습으로 탄생한 pdf를 보고 신기해서 몇 번이고 들여다본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정기자다. 정기자가 된 것만으로도 실력이 늘었길 내심 기대한 것 같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정기자로서의 1주차는 순탄치 않았다. 코로나19
‘아껴 읽혀지는 글’. 수습기자를 마무리하며 쓴 수습일기의 제목이다. 그 당시에는 스스로 뿌듯해하며 썼던 글이지만, 지금 읽어보면 제목부터 맞춤법을 틀렸다. 준정기자때만 해도 의무학기인 3학기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매일 소재를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피드백을 덜 들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어느덧 정기자가 되어 마지막 의무학기를 바라보는 시점에 서 있다.솔직하게 신문사를 하며 시간이 빠르게 흐르진 않았다. 준정기자로 있었던 작년 한 학기도 그렇고, 앞으로 정기자로서 해나갈 마지막 학기도 사실은 멀게 느껴진다. 소재를 고민하고, 인
얼마 전, 수습기자 생활을 마칠 때 썼던 수습일기를 꺼내 읽었다. ‘취재후기를 쓰게 될 시기가 돌아왔을 때, 내가 더 값진 열매를 얻은 기자가 되어있길 기대한다’는 마지막 문장이 자꾸 눈에 아른댔다. 프레스증을 반납한 뒤, 내 손에는 무엇이 남아있을까.돌이켜보면 나는 신문사 동료 중에서도 가장 많이 ‘발품을 판’ 기자였던 것 같다. 인터뷰하기 위해 왕복 6시간 거리인 진주를 당일치기로 다녀온 적도 있었고, 인천의료원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 서울도 강남과 강북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화상회의나 이메일로 인터뷰하면 되지, 왜 굳이
정기자가 되면 꼭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취재후기였지만, 막상 컴퓨터 앞에 앉으니 한참을 고민해도 글이 써지지 않았다. 문건이 없는 글이 오랜만이어서였는지, 아니면 정말 마지막인 것 같아서였는지는 모르겠다. 결국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취재후기를 써 내려간다.“너는 기자가 꿈이야?” 성대신문에 들어온 이후 수십번도 더 들었던 질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으니까.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겠다는 막연한 마음으로 성대신문에 지원했던 것 같다. 성대신문 보도부 기자 김예
무엇이든 첫 발을 내딛는 것이 가장 어렵다. 기사를 쓸 때도 주제 잡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처럼. 광주에서 서울로 통학하며 트레이닝에 참여해야 했던 신문사 입사를 고민했던 작년 3월엔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트레이닝을 시작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나는 대학생활에서의 첫 발을 잘 내딛을 수 있었다.모든 인터뷰이 컨택은 쉽지 않았다. 내 마지막 기사였던 1678호 명품 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걱정이 많은 탓에 컨택이 안 되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심지어 기사를 펑크낸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신문사에서 무사히 3학기
신문사에 첫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 나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신문사에 입사하기 위한 논술 문제를 풀 때도 이곳에 맞는사람일까 생각했다. 그렇게 카메라 전원 버튼도 찾지 못하던 나는 어쩌다 사진부 기자라는 명찰을 달고 학보사의 일원이 되었다. 제대로 해내고 싶은 마음에 사진 교양 강의도 수강하게 됐다. 1초의 셔터 소리를 내기 위해 왕복 4시간을 달리기도 하고, 1장의 의미 있는 사진을 찍기 위해 3일을 골머리 앓기도 했다. 취재 동행에만 그치고 싶지 않아서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며 인터뷰이의 말을 받아 적었다.
신문사 문을 열면 우측으로 바로 보이는 공간이 사진부 자리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사진부 기자다. 이번 주차 발간을 기준으로 총 네 번의 모모이를 준비해 갔으며, 세 번의 시각면을 기획했다. 보도부, 성균인 등 다양한 장소를 누비며 많은 기자들의 취재 동행도 경험해봤다. 이런 내 모습을 본 누군가가 질문한다. “사진부 좋아요?”“그럴 걸요” 준정기자 때의 내 대답이다. 짧은 글과 사진 한 장만으로 모모이를 준비해 가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수많은 시도를 대변하듯 계속해서 들리는 카메라 셔터소리는 나를 괴롭
취재를 하다 보면 지면 공간의 제약으로 혹은 정제된 언어로 풀기 힘들어 기사에 담기기 어려운 이야기가 많다. 기사 너머 오직 기자에게만 기억되는 이야기들에 종종 아쉬움을 느꼈다.지난 11일에 기사 취재를 위해 자과캠 정보통신팀을 방문했다. 30분간의 인터뷰에서 정보통신팀은 준비한 질문들에 꼼꼼히 답변해주셨다. 그리고 인터뷰를 마친 후 녹음기를 끄자 정보통신팀은 조심스럽게 “저희가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어서 그런데...”라며 입을 여셨다. 이후 정보통신팀은 우리에게 수강신청에 어려움은 없는지, 개선했으면 하는 것들이 있는
신문사에 처음 들어와 첫 기사로 지면에 발을 내디뎠을 때 적잖게 당황했다. 성대신문에는 나의 이야기나 문장이라고 할만한 흔적을 하나도 남길 수 없음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기사의 형식을 띤 글은 결코 나의 글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었고 나는 혼란스러웠다. 당시에 나는 지면에 내 이야기를 쓸 기회가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소망하기도 했다.작년 수습기자 시절 작성한 나의 좌우명은 '오늘을 살아갈 용기를, 내일을 마주할 의지를'이다. 막상 성대신문사 일을 시작하고 보니 '용기'와 '의지' 정도로는
첫 방중 활동 때 소재를 찾으면서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천문학, 도시계획학을 넘어 평생 그 존재조차 몰랐던 학문까지 소재로 거론될 때, 고고학이 아이디어로 등장했다. 예전 기사와 소재가 겹치는지 확인하려 성대신문 페이지에 고고학을 검색하자 ‘수중 고고학’이 등장했다. 상상도 못한 소재가 등장하면서 주변 사람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 기사는 마치 “어지간한 소재는 이미 다 썼으니 꿈도 꾸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 듯했다. 그 엄포가 너무 단호하게 들린 나머지 나도 웃음이 나왔다.이번 기사로 이제 나도 4개의 소재를 후대 성대신문
“그냥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성대신문에 지원했다고 들었다. 성대신문사에서 활동하며 어떻게 도움 됐는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수습기자가 나를 인터뷰 할 때, 첫 질문이었다. 맞다, 나 그냥 지원했었지. 바쁜 생활로 처음 지원했던 이유를 잊고 있었다. 우연치 않게, 이번 학기 마지막 호의 취재 후기를 작성하며 지난 성대신문사의 생활을 돌이켜보기로 했다. 사진부 기자가 되어 했던 일들은 무엇이 있을까? 모아뒀던 신문들을 하나씩 펼치며 ‘박주성’ 세 글자를 찾아본다. 항상 내 이름의 위치는 멋들어진 기사를 작성한 동료 기자 아래, ‘사
늦은 밤 신문사는 적막하다. 타자 소리만 울려대는 이 공간엔 문화부 김선정 기자라고 적힌 명함이 놓여있다. 내 이름 뒤에 적힌 까만 두 글자, ‘기자’로서 사람들을 만났던 기억이 스쳐간다. 1665호에서 인터뷰했던 작가는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면 대부분 아는 사람이다. 예고시절 그의 작업이 좋아 그가 쓴 책을 자주 읽었다. 사실 평소에 그에게 궁금한 것은 준비한 질문보다 더 세세한 것들이었다. 전시장에서 관람객의 동선은 어떻게 고려하는지, 작업이나 주제를 명료화 시키는 방법, 나아가 한국에서 예술로 밥벌이하려면 어떻게 하는지. 하지만
이번 학기 방중 첫 회의 날, 이제는 우리가 취재후기를 써야 한다는 말을 듣고 제목부터 생각했다. 무슨 제목을 지을까 그리고 지금 지은 제목을 과연 쓰게 될까. 쓰게 됐다. 이번이 마지막 기사인데도 그때랑 별반 다르지 않나 보다. 난 여전히 익숙해질수록 낯선 바다에서 파도를 탄다.정기자가 됐으면 익숙해질 법한 일들은 없었고 온통 낯설었다. 그렇다고 준정기자 때처럼 설레는 것도 아니었다. 매번 처음 보는 파도가 밀려왔다. 배경지식을 찾는 일도, 텀 구성을 하는 것도, 인터뷰이 컨택하는 것도, 기사 첫 문장 쓰는 것도 다 해왔던 일이건
'너 에타해?'왠지 우리 학교 익명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을 자주 들락날락한다는 사실을 들키면 민망하다. 이건 비밀인데 댓글도 단 적 있다. '인성;'이라며 상대방을 비방하는 몹시 나쁜 댓글.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벚꽃은 흩날리지만 어쩌다 창궐한 역병으로 학교가 텅텅 빈 지난 4월. 처음으로 지면에 실린 나의 첫 기사 덕택에 오랜만에 가슴이 설렜다. 저 지면 한 켠을 차지하기 위해 지난 겨울을 얼마나 혹독하게 보냈는가. 덜덜 떨며 학교에 전화하고 '김지우 기자입니다'라는 낯선 문장를 입에
이번 학기에 내가 맡은 기사는 총 네 개다. 이번 발간은 그중 두 번째였다. 두 번째로 맞은 신문사 학기지만 아직도 기사를 쓰는 일이 어색하다. 금요일에는 탈고해야 한다. 기사를 위한 기획 문건을 쓰는 내내 의구심에 사로잡힌다. 내가 주제에 관한 대표성을 갖고서 글을 쓸 자격이 되나? 그것도 학교의 이름을 내건 자리에서 말이다. 그 의구심이 기사를 준비하는 내내 나를 짓누른다. 밤을 새워서 기획문건을 쓰고 배경지식을 정리할 때에도, 신문사 사람들에게서 피드백을 받을 때도, 인터뷰이를 컨택할 때도, 기사 본문을 쓸 때도. 매번 솔직하
솔직히 난 이번 호까지 총 8번의 기사를 쓴 보도부 정기자이지만, 기사의 제일 기본적인 토대인 문건을 쓰는 것이 아직도 어설프다. 특히 학교의 어느 부분에서 비판적인 태도 혹은 긍정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헷갈려서 기사 방향의 갈피를 못 잡아 헤맨다. 이번 호의 챌린지스퀘어 관련 기사를 쓸 때 어떤 흐름으로 기사를 쓸지 갈팡질팡했다. 나의 가치관과 판단이 기사에 영향을 주기에 신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기사를 쓰기 위해선 내 생각이 올바르다는 전제가 깔려야 하지만 아직 학생인 나는 그런 전제를 감히 자신할 수가 없다.그런데
타인의 이야기를 하는 건 어렵다. 우리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과학대학 학생인 나는 성대신문에 들어와 지난 학기에는 예술대학의 이야기를, 이번 학기에는 자연과학캠퍼스의 이야기를 썼다. 땡볕 아래에서 날리는 종이를 잡아 물감을 칠하고, 모니터 너머로 프로그래밍을 하는 수업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이야기를 이해하고 확인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취재가 필요했다. 학우, 교강사, 학교 이곳저곳에 한 마디를 묻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나는 자꾸만 스스로의 자격을 묻게 됐다. 그리고 이번 주 기사 취재를 하던 중 ‘자과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