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의 시각면을 끝으로 나의 마지막 지면 기사가 끝이 났다. 이번 시각면은 뉴미디어부로 입사한 나에게 가장 긴 지면 기사였다. 시각면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뷰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주변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다. 카메라 한 대, 노트북, 녹음용 핸드폰, 그리고 작은 메모지를 들고 인터뷰이를 만나러 가는 길은 익숙하지만 낯설었다. 집 옆 가게의 사장님, 매일 환승하던 지하철 역사 속 공방의 작가님, 성대신문의 이름을 빌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나 혼자였다면 해보지 못했을 귀한 경험이었다. 인
성대신문이 1700호 발간을 맞았다. 그렇게 준비하게 된 1700호 특집에서는 그간 다룰 일 없었던 신문사의, 기자들의 이야기를 싣게 됐다. 여느 때보다 부담스러운 마음을 안고 시작한 취재였지만 인터뷰에 담긴 기자들의 말을 따라가고 있자니 특집 기사는 끝을 보이고 있었다.글은 그 사람의 세계를 닮아 있다고 한다. 기자는 분명 글로 팩트만을 전달하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그 글에는 기자의 세계가 담겨 있다. 이 신문에 담긴 기사들도 꼭 그런 것 같다. 누군가의 글은 사려깊고, 어느 글에는 열심인 모습이 있다. 이제 막 발간을 시작한 준
성대신문 보도부는 지난 호와 이번 호에 걸쳐 양 캠퍼스 단과대 학생회의 공약 점검을 진행했다. 나는 경영대, 정보 통신대, 자연과학대 총 3개의 단과대 학생회장님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고 기사를 썼다. 그간 썼던 기획기사들과는 달리 다소 정해진 형식이 있고 길이도 길지 않아서 큰 어려움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여느 기사를 준비할 때와 다름없는 걱정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어졌다. 기사를 준비하며 가장 어려운 것은 항상 ‘인터뷰이 컨택’이다. 소재를 찾고 흐름을 기획해 글을 써내는 것은 혼자서도 해낼 수 있지만, 내가 쓸 기
이번 호에 실린 기사는 내가 정기자가 되고 쓴 첫 기사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내 기사를 봤으면 좋겠지만 혹시 보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8면을 슬쩍 넘겨서 봐주면 좋겠다. 광화문광장을 재개장 날부터 8월 셋, 넷째 주를 바쳐 취재했다. 광화문광장 재개장 날 열린 빛모락축제는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재개장 ‘첫’날이기에 상기된 표정과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있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확신은 맞아떨어졌다. 밖을 10분만 돌아다녀도 얼굴로 땀이 흘러내렸지만 모두 모여 빛모락축제를 함께했다. 비록 이 장면은 분량상
기사란 것은 묘하다. 형태만 보면 글인데 꽉 찬 내용들은 마치 보고서와 같고, 현재의 일들을 담아낸다는 점에선 기록의 기능도 큰 것 같다. 기사는 최대한 간결하게, 어떤 문장도 필요 없는 문장은 없어야 한다. 더 줄일 수 없겠다고 생각한 기사도 또 줄이고 또 줄일 수 있었다. 그렇게 눈에 뭐 하나 걸리지 않는, 매끄러운 기사가 만들어진다. 마감 직전엔 눈물을 머금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부분까지 쳐내며 한정된 지면을 원망하기도 한다.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흥행을 보며 가볍게 ‘발달장애인’을 이번 기사 소재로 담아야겠다고
이번 발간까지 총 21개의 기사를 쓰면서 나는 계속해 이별을 겪어야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초고를 쓰고 동료들의 교열을 받으며 지면에 기사를 싣는 일은 늘 만족스러운 마침표라기보단 선명한 물음표였다. 인터뷰이의 의견을 충분히 담아낸 걸까? 조금 더 다양한 시각에서 다룰 수 있진 않았을까? 나는 이 기사에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쏟아지는 의문에 당당히 고개를 끄덕인 경험은 많지 않다. 매번 후회와 자책이 남았다.그러나 속상한 마음이 마냥 괴롭지만은 않았다. 다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기사에서는 어떤 소재를 공부하고 어떤
신문사에 지원했던 순간을 묻는다면 특별할 게 없다. 너무나도 하고 싶었기에 결정을 내리기까지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오히려 입사하고 나서부터 고된 선택들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속 깊은 떨림을 고스란히 느끼며 했던 모든 결정이 큰 자산이 됐다. 처음엔 단체 생활에 있어서 나만의 위치를 파악(어쩌면 단정)했고 그에 끼워 맞춰진 채 끊임없이 타협했다. 기자를 꿈꾸며 공들여 세워놓은 철학들이 툭툭 밀쳐질 때도 눈만 질끈 감았고, 공감 능력을 뽐내며 합리화하고 이해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나를 가둔 채 바라만 보기엔 도저히 나 자
‘나는 누구인가?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나의 가치는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가치와 같다. 내가 살리고 전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나다.’ 존경해마지않는 PD 정혜윤 님의 말이다. ‘옳다고 믿는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실천하자’ 아끼는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국회의원 장혜영 님의 말이다. 하얀 정사각형 공책에 사랑하게 된 말들을 훔쳐 온지 2년이 돼간다. 앞선 두 말은 그 중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말이다. 책에서 읽은, 기사에 적힌, 누군가가 나에게 건넨 말... 온갖 말들로 공책 여섯 권을 채우는 동안 나는 참
어떠한 문화 현상을 조명하고 가치를 밝히는 과정에서 전문가의 견해는 필수적이다. 기자는 보도하는 사람이지 논설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자유롭게 나의 생각을 전할 수 없는 것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은 펜을 든 나의 숙고 없는 몇 문장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는 지를 알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됐다.‘의외로 기사는 인터뷰에서 시작해 인터뷰로 끝난다.’ 지난해 겨울에 서울신문과 성대신문의 콜라보 기획 연재 시리즈인 ‘요즘 것들의 문화 답사기’에 참여해 기사를 쓰면서 서울신문 기자님께 들은 말이다. 그때는
기사 쓰기란 쉽다. 그러니까, 적당한 기사를 쓰기란 쉽다. 그건 많은 고민을 요하지 않는다. 전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한 소재들이 있다. 그런 소재를 선택해 관련 내용을 기사의 틀에 맞추면 된다. 어떤 지적이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는, 보기 좋은 기사가 당당히 지면의 한 구석을 차지한다.그리고 그걸 넘어서는 기사가 좋은 기사라는 평가를 듣는다. 어떤 매너리즘에도 갇히지 않고 통찰력 있게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번거롭더라도 최대한 많은 입장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을 들여다봐야 한다. 아이러
작년 1학기 수습기자였던 나는 직전 학기에 신문사 임기를 마친 친구와 학보사 기자 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친구에게 수습기자 트레이닝에서 경험한 기사 작성 과정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고 친구에게 토로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야, 네가 글을 과제처럼 써서 그렇게 느끼는 거 아냐?”라고 일갈했다. 그 당시에는 그 친구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어느 정도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됐다.내 전공 학과인 사회학과에서는 주로 폭넓은 주제에 대한 보고서가 과제로 주어진다. 보고서를 준비하는 과
주어진 지면을 채우는 건 정해진 시간 동안 연설하는 것과 같다. 대중이 나의 목소리를 읽느냐 듣느냐,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신문사에서의 생활은 실수하더라도 실언할 수는 없는 작은 지면 속에서 ‘어떻게 하면 가치 있는 소리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한 시간이었다.어쩌면 내 손에 들린 게 카메라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감사하게도 신문을 펼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곤 하는 사진을 찍는 게 내 일이었다. 성대신문 수습기자로 시작해 사진부 준정기자를 지나 뉴미디어부 정기자가 되기까지 펜을 드는 시간보단 뷰파인더에 세상을 담는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