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1월 1일 0시가 땡 하는 순간 들을 노래를 준비하는 게 습관이 됐다. 새해 첫 곡대로 한 해가 풀린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얘기를 전해 듣고는 실천한 게 그 시작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성대신문에 지원했던 작년에는 가호의 이라는 노래를 들었다. 그래서인지 길었던 휴학을 끝내고 복학생으로 첫 수업을 들었고, 수습기자로서 신문사 생활을 시작했고, 또 이런저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그렇게 맞이한 시작들은 불안하고 조마조마했다. 기사는 생각처럼 풀리지 않았고
살면서 많은 글을 쓰게 된다. 개인적인 일기부터 논술 시험, 리포트, 친구에게 전하는 편지 등 많은 글들을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쓰게 된다. 그 글이 만족스러울 수도,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성대신문에 들어오기 전의 나의 글은 지극히 나만을 위한 글들이 많았다. 내 생각을 정리하거나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그러나 대학교에 온 이후 색다른 목표를 위한 글들을 써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성대신문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학교의 언론인 만큼 독자인 학우들에게 학교 소식을 알리고 여러 생각들을 재고
또다시 펜이 부러졌다.'벌써 몇 번째인지 몰라...'하고 중얼거린다.펜을 특이하게 쥐는 나는 글을 쓰다 종종 뚝- 하고 플라스틱 펜을 부러뜨린다.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탓이다. 못쓰게 된 펜을 보니 속이 쓰리다. 그러나 이내 은근한 자부심마저 든다.'글 쓰다 펜이 부러지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걸.'부러진 펜은 버리지 않고 필통에 모아둔다. 펜들의 무덤이다."서현아, 넌 힘을 좀 빼야 돼."생각이 많던 나에게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은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생 별거 없다고, 너무 끙끙대며 살면 부러지기
1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게시판에 붙어있는 성대신문 포스터를 보았다. 영화 공부를 시작하면서 기자라는 직업은 더 이상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포스터를 보고 나니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6년 동안 나의 꿈은 기자였다. 많고 많은 직업 중에 왜 기자가 되고 싶었는지는 명확히 잘 모르겠다. 그냥 막연히 기자가 되고 싶었고, 20대가 된 후 어느 순간 그 마음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2년 동안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기자라는 꿈은 마음 한편에 남아있었고, 정
글 쓰는 것? 싫어하진 않았다. 학교 선생님들이 딱 좋아할 정도. 글에 나의 생각이 넘쳐날 정도로 가득히 채워 넣고 최대한 길게 쓴다. 교과서적임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나에게 글을 쓰는 것은 스트레스가 아니고 오히려 쉬웠다. 시를 쓰는 것도, 에세이를 쓰는 것도 그저 생각나는 것을 쓰는 것이니까.뭣도 없이 오만에 찬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대학교 글쓰기 교양 수업은 b+을 나에게 던져 줬다. 학점에 그다지 흥미가 없던 터라 학점이 문제가 되진 않았다. 다만 내 능력을 직시하는 순간이었다.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는지 글 쓰는 능력을 키
수습일기를 쓰기 전에 성대신문사 입사지원서를 찾아봤다. 당시 성대신문사에 지원하는 것은 큰 도전이었다. 아무런 경력도 없었고, 어렸을 때부터 기자를 꿈꿔왔다는 등의 화려한 스토리도 없었다. 정말 값진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성대신문사에 지원했다. 그리고 벌써 준정기자가 됐다.지난 한 학기 수습기자로 생활하며 가장 많이 되뇌었던 말은 ‘신기하다’였다. 취재하는 과정, 기사를 작성하는 과정 등 기사가 지면으로 나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새롭고 신기했다. 신문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모든 것이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었고 모두가 발
성대신문에 지원한 건 지금 생각해도 충동적이었다. 수습기자 모집 포스터가 멋있어서. 그런 단순한 이유로 지원했고 면접을 봐서 덜컥 붙었다. 또 면접에서 만난 편집장이 멋있어 보여서 성대신문에 입사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수습 트레이닝을 거치고 나와 달리 진지한 동기들을 보며 몇 번이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기자가 꿈이라 입사했다는 동기 언니의 말을 듣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온 내가 진중한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그래도 어쨌든 계속하고 싶었다. 인터뷰 컨택이 성공했을 때의 쾌감
항상 내 생각과 글이 정리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대학 입학 직후만 해도 이건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문제 삼을 여유가 없었다. 늘 무언가에 쫓기듯 시간에 휘둘렸고 걱정과 고민, 망설임으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니 정돈되지 않은 생각은 정돈되지 않은 글로, 마음으로, 생활로 이어지는 꽤 심각한 문제다.집 안에 틀어박혀 얌전한 방황을 지속하던 중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누구보다 분명하고 정확한 언어로 전하는 사람들을 보게 됐다. 나도 저 사람들과 같은 일을 하면 이 혼란스러운 상태에
어쩌면 가장 솔직한 수습일기일지도 모른다. 특히 신문사에서 함께 일하는 기자들이 읽기에 더 불편한 글일지도 모르겠다. 수습 기간을 거치며 더는 기자의 꿈을 꾸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고3 수험생활이 시작될 즈음 ‘사회적인 일을 하고 싶다’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기자의 꿈을 꾸게 됐다. 돌이켜 보면 고등학교 2학년 끝 무렵에 있었던 촛불집회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할 것 같다. 그렇게 생활기록부 진로희망란을 채웠다는 안도감과 함께 진로 고민은 나중에 시간 많을 때 하겠다고 미뤄둔 채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크게 달라진 것은
수습, 학업이나 실무 따위를 배워 익힌다는 뜻이다. 닦을 수, 익힐 습 두 한자로 이어진 단어다. 동음이의어로 어수선한 사태를 바로 잡음이라는 뜻의 수습이 있다. 그 단어는 거둘 수, 주울 습 두 한자로 이어져 있다. 내 삶은 사실 뒤에 이어진 수습으로 가득 차 있다. 하고 싶은 일에는 참을성을 보이지 못하지만, 하기 싫은 일은 뒤로 미루고 나중에 얼기설기하게 수습하기 일쑤다. 당연히 대학에 와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더 해졌다.스스로 ‘대학에 왔으니까 놀아야지’라는 핑계를 댔지만 실은 살면서 놀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고등학생 때까지 평생 써온 일기는 ‘기록’ 그 자체였다. 그러다 스무 살이 되어 일기장을 펼쳤던 어느 날, 몰아치는 감정을 담아낼 표현을 찾고 글을 완성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고민하면서 나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했다. 그리고 그 문장들은 마침내 내 인생에 새로운 출발선을 그었다. 그날부로 과학 전문 기자를 꿈꾸기 시작했다. 동시에 일기는 ‘대화’로서의 의미를 얻었다. 언제고 불러낼 수 있는 대화상대가 생긴 것이다.그런 내가 수습기자가 되어 처음 써 본 기사라는 글은 느낌이 사뭇 달랐다. 대화는 철저히 걷어내고 오로지 사실과 자료를 기반
내 이름은 昰(옳을 하)자, 辰(별 진)자를 써 옳은 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辰이 다섯째 지지, 용이라는 뜻으로도 쓰일 수 있다고 한다. 항상 마지막의 설명까지 들으면 옳은 별, 옳은 용이라는 이름에 부응하는 삶을 꾸릴 수 있을까 의문이 들고는 한다. 그래도 아버지가 고심해 지어준 이름이니 나름대로 만족하면서 내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나니, 나를 온전히 나타내주는 단어는 내 이름 석 자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등학교 2학년 때, 생활과 윤리 선생님이 유서를 써오라고 과제를 내주신 적이 있다. 그래도 내 인생의 마지
생각은 자유나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 문자로 기록해 지면에 남기는 경우는 더 그렇다. 한번 종이 위에 잉크로 찍고 나면 정정하기 어려운 게 글이다. 그래서였을까, 한 학기 동안의 수습 활동과 한 달에 걸친 방중 활동 동안 설렘과 고됨보다 먼저 찾아온 건 책임감이었다.수습 기간은 말 그대로 배우고 익히는 일의 연속이었다. 모르는 용어들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낯선 절차에 익숙해지기 위해 발버둥 치며 보낸 나날들이 기억에 선명하다. 이 지난한 과정도 언젠가 지나갈 테지, 그리고 나면 길이 보일 테지, 하며 자신을 위로했지만 이름 석 자
성대신문에 지원할 때의 마음은 가벼웠다. 뭔가 유의미한 활동을 하고 싶었고,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좋아하는 미드에서 주인공이 학보사에서 일하던 것도 떠올렸다. ‘프레스증이 생기면 나도 멋있어 보이겠지?’라는 생각도 했다. 첫 수습 트레이닝을 진행했을 때도 그랬다. 표기 준칙을 받아들고 괜히 멋져 보여서 종이가 닳도록 넘겨보았다. 그때의 나는 성대신문이라는 이름만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그래서인지 수습기자 트레이닝은 당황의 연속이었다. 당장 소재로 뭘 써야 할지부터 ‘문건’이 무엇인지, 8매는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지…. 신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신문사에 들어왔다. 수습 트레이닝을 받고 방중 활동을 하며 느낀 점은 기자는 글 쓰는 걸 좋아하고 잘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글 쓰는 것 외에 매우 많은 능력이 필요한 것 같다. 신문사 일은 마치 20명이 넘는 사람들끼리 하는 조별활동 같다. 현재로서는 나만 잘하면 될 것 같다. 기획회의 때 문건을 가져가면 어떤 피드백을 받을까 무섭기도 하지만 동시에 설레기도 한다. 그런 피드백들이 기사를 더 좋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드백을 많이 받지 않고 싶으면서 동시에 많은 피드백을 받고
대학 합격의 기쁨도 잠시, 2020년, 특히 상반기는 온 지구에 역병이 돌아 대학생활은커녕 일상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한 해였다. 1학기에 온라인 수업을 들으며, 나름 고등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혹은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을 배우고 이에 대해 생각해보는 경험은 좋았다. 그러나 어딘가 구멍이 난 듯 공허함에 빠져있었다. 가면 갈수록 매너리즘과 무료함에 빠지고, 사는 지역의 곳곳에서 코로나 19 확진자가 거의 매일 나와 외출을 하지 못해 무언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흘러가는 대로 살아갔었다.2학기에는 다행히 학교를 방문하여 수업을 들을
성대신문에 입사한 후, 지난 학기 트레이닝을 거쳐 이제 방중활동을 마친다. 수습일기의 "수습"이란 앞으로 기자로 활동하며 필요한 업무들을 배워 익히는 것을 뜻하지만 나에게 수습은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저번 학기와 이번 방학은 나에게 내 선택에 대한 수습, 벌어진 사태를 거두어 바로잡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원서를 작성하며 호기심과 열정이 가득했던 초심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못했고, 권리보다는 책임과 의무가 많은 이 일이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문득 ‘왜 사서 고생을 하는 것인가’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내가 구매한 자발적
갑자기 찾아온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외부 생활이 중지되었다. 입시를 끝내고 처음으로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갖게 되었지만,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알지 못했다. 공부나 대외활동 등의 희미한 의무들은 뒤로하고, 피아노만 연주하며 한 학기를 보냈다. 그렇게 오선지만 붙들고 있던 도중, 문득 무의미하게 사라지는 시간이 허무하다고 느꼈다. 먼지에 뒤덮이는 듯한 하루하루였기 때문이다.이제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바이러스를 핑계로 아무것도 도전하지 않는 게으름을 멈추고자, 성대신문에 첫 발을 내디뎠다. 문화부 준정기사로
2020년 봄, 길고 긴 수험생활을 마무리하고 대학생이 됐다. 그런데, 캠퍼스를 밟아보기도 전에 너무나 큰 적수를 만나버렸다. 이름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코로나 19’였다. 코로나는 내 모든 대학 로망을 부숴버렸다. 혹시 차은우를 볼 수 있을까 기대했던 입학식도, 이름만으로도 설렜던 OT도 전부 물거품이 됐다. 그렇게 많은 것들을 빼앗긴 나에게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무력감이었다. 새벽같이 모의고사를 대비하고 수행평가를 준비하던 그 시절의 나는 없었다. 매번 공부, 시험, 입시처럼 남이 정해준 길을 잔말 않고 따라갔던 나여서 그럴까?
약 3주간의 방중 활동을 마치고 천천히 되돌아보니 이전에 많은 기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수습기자 모집이 마감되기 한 시간 전까지 나는 고민하며 망설였다. 후회하기 싫어 떨리는 마음으로 지원서를 제출했지만, 면접을 보러 가는 날도 내 마음속엔 역시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설렘보단 그저 두려움이 가득했다. 이후 혹시 합격이 될까 하며 연락이 오기만을 전전긍긍 기다렸던 모습도 이제 떠오른다. 바라고 또 바랬던 학보사 기자가 되었고 막연하기만 했던 내 목표에 한 걸음 다가섰다. 출발선도 찾지 못해 헤매던 나에게 첫 시작점이 생긴 느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