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후기를 작성하기 위해 수습일기를 다시 열어봤다. 내 수습일기는 이미 준정기자분들의 수습일기들에 밀려 저 아래에 있었다. 신문사에서 제대로 활동한 기간은 한 학기밖에 되지 않지만 굉장히 오랜 시간이 지난 느낌이다. 몇 년 전에 써놓고 까먹은 일기를 구경하듯 나의 거창했던 포부를 읽어내려갔다. 내 이름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기사, 그것을 나의 이름를 쌓아가는 첫 단계로 생각하고 내 이름에 실례가 되지 않도록, 내 이름에 걸맞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이 적혀있었다.성대신문 홈페이지에서 내 이름을 검색하면 총 16개의 기사가 나
처음 취재를 나갔던 날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찬 바람이 매섭던 2021년 2월, 지난 학기 개강호 나의 첫 기사 소재는 ‘팀빌딩과 온라인 입학식’이었다. 당시 팀빌딩에 참여한 21학번 학우의 멘트를 얻고자 프레스증과 명함을 챙기고서 무작정 자과캠으로 향했다. 그때의 자과캠은 낯설어서인지 긴장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더욱 춥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프레스증을 목에 건채, 한 손에는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새 명함을 다른 한 손에는 멘트를 녹음할 휴대폰을 쥐고 후문에서 1시간가량을 서성거렸다. “안녕하세요 성대신문 보도부 기자 이현정
Der Augenblick은 눈 깜짝할 사이, 순간 또는 찰나를 뜻한다. 모든 시간은 찰나같이 지나가니 매 순간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에서 이것을 내 성대신문 이메일 아이디로 만들었다.사람들은 시간이 매우 빠르게 지나간다고 한다. 나도 성대신문에서의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길 바랐고 그렇게 지나갈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다. 그러나 일 년을 돌이켜보면 그 시간이 짧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지난학기 시각면 취재를 위해 사진부 기자들과 전통시장에 갔던 것은 삼 년 정도 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입학 후 학교 공부만 했던 작
올해 2월 이후, 9개월간 총 열두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취재후기가 실리는 지면에 함께 담길 특집 총론은 내 열세 번째 기사다. 나름대로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고 생각하면서도 확신이 없다. 나는 2월의 내가 바랐던 만큼 우리 사회의 귀퉁이를, 구석진 모서리를 잘 돌아보고 다녔나? 기사를 쓰는 내내, 내가 생각하는 기사의 정의에 대해 고민한다. 정확한 사실과 적확한 언어. 수습일기에도 적었고 취재후기에도 또 적는다. 하나 더 있다. 소수자의 목소리.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모습의 소수자가 존재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지면에 담으려고 애쓸
나는 건축을 전공한다. 건축학과에서는 집을 어떻게 지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익히는 과정을 반복한다. 나는 동시에 성균관대 학보사 성대신문 보도부의 기자이다. 기자는 기사라는 글을 어떻게 지을지 고민하고 직접 적는 과정을 반복한다. 두 역할에서의 나는 ‘짓기’를 한다.내가 하는 짓기라는 행위에는 여러 특징이 있다. 먼저, 짓기에는 사실 상대방의 이해가 전제된다. 이에 관련해서 전공 수업때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이 있다. “설계는 너 마음대로 해, 대신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어야 좋은 설계야.” 아무리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는 집을, 글을
어렸을 때부터 의미 부여하는 것을 좋아했다. 평소처럼 맛없는 급식에도 농담 삼아 ‘다시 없을 수능 2주 전 화요일 자 급식’이라며 소중히 한술 뜨라 했던 기억이 난다. 참고로 그 주 내내 그러고 다녔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아무 일도 없는 날에 의미를 담으면 왠지 특별해지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떤 의미도, 이유도 찾지 못한 일은 너무 싫었다. 우리가 더럽힌 교실은 우리가 치우는 것이 맞지만, 교무실 청소를 왜 학생이 하지? 귀한 가르침을 청소로 보답한다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기사 작성으로 밤을 지새울 때
코로나 학번으로 입학한 나는 수업을 위해 학교에 오는 날보다 신문사 일을 위해 학교에 오는 날이 더 많았다. 주변에선 내가 입학한 게 아니라 꼭 입사한 것 같다며 바쁘게 뛰어다니는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어느 정도 각오했던 일이지만 신문사 생활은 정말 힘들었다. 처음에는 억울했다. 이렇게나 바쁘다니! 끝없는 회의와 취재, 기사 작성과 첨삭 과정이 발간이 있는 주마다 반복됐다. 첫 번째 기사가 있던 주에는 며칠 만에 몸무게가 확 줄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내 억울함은 점점 안타까움으로 변해갔다. 이렇게나 열심히 썼는데
‘안녕하세요 성대신문 보도부 조소희 기자입니다.’ 내 이름 석 자 뒤에 따라붙는 기자라는 호칭이 익숙해질 때 쯤 성대신문 정기자가 됐다. 나도 모르게 기사가 술술 써지고 피드백이 쏙쏙 보인다는 신비한 정기자의 경지. 드디어 정기자로 승격한 발간 1주차였다. 준정으로 시작할 무렵 한글 파일에 썼던 내 글이 기사 지면의 모습으로 탄생한 pdf를 보고 신기해서 몇 번이고 들여다본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정기자다. 정기자가 된 것만으로도 실력이 늘었길 내심 기대한 것 같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정기자로서의 1주차는 순탄치 않았다. 코로나19
‘아껴 읽혀지는 글’. 수습기자를 마무리하며 쓴 수습일기의 제목이다. 그 당시에는 스스로 뿌듯해하며 썼던 글이지만, 지금 읽어보면 제목부터 맞춤법을 틀렸다. 준정기자때만 해도 의무학기인 3학기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매일 소재를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피드백을 덜 들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어느덧 정기자가 되어 마지막 의무학기를 바라보는 시점에 서 있다.솔직하게 신문사를 하며 시간이 빠르게 흐르진 않았다. 준정기자로 있었던 작년 한 학기도 그렇고, 앞으로 정기자로서 해나갈 마지막 학기도 사실은 멀게 느껴진다. 소재를 고민하고, 인
얼마 전, 수습기자 생활을 마칠 때 썼던 수습일기를 꺼내 읽었다. ‘취재후기를 쓰게 될 시기가 돌아왔을 때, 내가 더 값진 열매를 얻은 기자가 되어있길 기대한다’는 마지막 문장이 자꾸 눈에 아른댔다. 프레스증을 반납한 뒤, 내 손에는 무엇이 남아있을까.돌이켜보면 나는 신문사 동료 중에서도 가장 많이 ‘발품을 판’ 기자였던 것 같다. 인터뷰하기 위해 왕복 6시간 거리인 진주를 당일치기로 다녀온 적도 있었고, 인천의료원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 서울도 강남과 강북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화상회의나 이메일로 인터뷰하면 되지, 왜 굳이
정기자가 되면 꼭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취재후기였지만, 막상 컴퓨터 앞에 앉으니 한참을 고민해도 글이 써지지 않았다. 문건이 없는 글이 오랜만이어서였는지, 아니면 정말 마지막인 것 같아서였는지는 모르겠다. 결국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취재후기를 써 내려간다.“너는 기자가 꿈이야?” 성대신문에 들어온 이후 수십번도 더 들었던 질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으니까.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겠다는 막연한 마음으로 성대신문에 지원했던 것 같다. 성대신문 보도부 기자 김예
무엇이든 첫 발을 내딛는 것이 가장 어렵다. 기사를 쓸 때도 주제 잡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처럼. 광주에서 서울로 통학하며 트레이닝에 참여해야 했던 신문사 입사를 고민했던 작년 3월엔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트레이닝을 시작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나는 대학생활에서의 첫 발을 잘 내딛을 수 있었다.모든 인터뷰이 컨택은 쉽지 않았다. 내 마지막 기사였던 1678호 명품 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걱정이 많은 탓에 컨택이 안 되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심지어 기사를 펑크낸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신문사에서 무사히 3학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