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말도 없이 탕수육 위에 소스를 붓는다면, 아마 난리가 나지 않을까? 중국집에서 밥 한 끼를 먹을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화해야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보다도 중요한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우리의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대화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여기, 다름을 배우고, 이야기하는 한 동아리를 소개하려고 한다. 바로, 성균관대 토론동아리 SKFC다.학기 중 매주 수요일, SKFC는 경제, 정치, 법 등 다양한 주제로 토론한다. 민감한 주제도, 생소한 주제도, 복
학생들과 유교철학을 주제로 수업에서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학생들과 함께하는 프로젝트를 고민할 때마다 나는 유교철학을 공부해 온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이 공부를 하면서 무엇을 배웠는지 생각해 보곤 한다. 실용적 적용력이 떨어진다고들 생각하는 인문학에서도 철학, 게다가 철학 안에서도 마이너리티라고 여겨지곤 하는 유교철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또 사회문제를 마주하면서 나라는 사람의 사유 방식과 접근방식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나만의 특이함이 내가 공부
사람들은 언제나 내가 모르는 노래를 듣는다. 정신을 차려보면 시간이 많이 늦었고 집까진 너무 멀다. 모든 게 내일이면 전부 데포르메될 것을 안다. 어설픈 윤곽만 “여기에 외로움이 있었다” 하고 남겠다.그러나 무언가 심하게 불타고 나면 항상 자국이 생기고, 그걸 지우기는 지독하게 어렵다.이것은 끔찍할 만큼이나 지독한 외로움이다.
내가 유학생으로서 1999년 처음 도착한 베를린에서 서울은 보이지 않았다. 멀어서 보이지 않았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서울을 들어본 사람들은 있었지만,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면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길에서 누군가 다가와 일본사람인지 중국사람인지 물어보는 경우는 있었지만, 한국인인지 물어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독일에 유학 온 어떤 한국인 학생이 박사논문 주제를 결정할 때 실제 일어났던 일이다. 학생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와 관련된 논문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외국인이 그렇게 어려운 주제를 선택하는 것을 보고 지도교수
2학년을 시작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생겼다.그럴듯한 대회와 학회에 무작정 지원했다. 그리고 벌여 놓은 일을 수습하는 마음으로 활동에 참여하며 약력을 한 줄씩 늘려갔다.성대신문 수습기자 모집 공고를 봤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지원해서 활동하면 뭐라도 얻어가는 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처음 성대신문에 들어와 뉴미부 수습기자로서 활동한 한 학기동안은 크게 부담되는 일이 없었다. 그간의 문건과 영상들을 보며 내가 언젠가 하게 될 일이라는 막연한 느낌만 있었다.하지만 준정기자로 방중활동에 임하자마자, 학보자 기자라는 자리가
답이라고 생각하며 오랜 시간을 준비했던 고시 공부를 포기하고, 다른 길의 출발점에 서니 막막했다. 아무것도, 심지어 학점조차도 준비가 되지 않았던 내가 과연 기자라는 새 길로 잘 나아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그래도 뭐든지 한 번 해보기로 했다. 그 첫걸음이 성대신문이었다.민망하고, 불편했다.다들 졸업하는 나이에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점이 참 민망했고, 그런 나를 동료들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마음이 참 불편했다.그러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다들 나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주었고, 각자의 속마음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누구도 내게 왜 지
처음에는 그저 멋있어보인다는 막연한 관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학교의 모든 게 신기할 1학년 때, 교내에 있는 성대신문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대학언론의 형태는 물론, 발간과정 전체를 잘 몰랐던 터라, 정말 기성신문 같은 외관에 '진짜' 신문 같다고 생각했었다.그렇게 몇 달 후, 유튜브에 업로드 된 성대신문 수습기자 모집 홍보영상을 접했다.그러던 어느 순간, 성대신문 유튜브의 다른 브이로그 영상들까지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재미를 가진 영상이면서도 자신만의 생각을 담고 학보사의 가치를 챙기는 영상을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수습
지금까지도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억이 있다. 스무 살 무렵에 나는 밖에서 사람들과 옷깃을 스치며 걷는 것조차 힘들던 시기를 겪었다. 그런 시기의 나를, 나와 네 살 터울인 언니는 그림 재료를 사러 화방을 가는데 함께 가자며 안국동으로 데려갔다. 언니는 우울감이 나아지는 방법을 나보다 먼저 알았던 것 같다. 그렇게 나를 이불 밖으로, 집 밖으로 끌어내줬다.처음 가본 안국동에서 나는 화방도 처음 가보게 됐다. 어릴 때 언니가 미술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이면, 연필의 흑심 냄새, 먹 냄새 같은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
경험은 사람을 노련하게 하지만, 동시에 틀에 가두기도 한다.스물셋 평생을 글 좀 쓰는 애로 살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별별 활자를 다 끼고 산 탓이다. 학창시절엔 교내외 글쓰기 대회에서 종종 입상했고, 대학 입학 문도 논술로 뚫었다. 2년을 바친 학생단체에서는 사람 몇백 명을 운용할 대행사 기획서를 썼고, 신문사에 들어온 직후 한 학기의 수습 트레이닝도 큰 문제 없이 마무리했다. 웹하드에 첫 수습 웹기사 완고를 올리던 순간까지 생각했다. 아, 이거 괜찮네. 생각보다 할 만한데? 그렇게 나도 모르게 다져 온 편협한 틀을
지금껏 내게 글쓰기는 얄궂은 일이었다. 나의 글은 너무 추상적이고 감정적이라 느꼈다. 그래서인지 남이 쓴 글은 매번 흥미롭게 읽으면서도, 내가 쓴 글은 스스로 보기에 부끄러웠다....지난 겨울방학에 추가 수습기자 지원을 앞두고 무수히 고민했다. 7학기를 바라보는 내게 신문사 활동은 약간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이 아니면 더 망설여질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 하나로 성대신문에 입사했다. 방중의 끝에 다다른 지금에는, 앞으로 펼쳐질 신문사 활동이 나의 대학 생활에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되리라
준대구인이요.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항상 덧붙이는 말이다. 대구에서 태어나고 대구에서 쭉 살았음에도 나를 완전한 대구인으로 소개할 수 없는 건 고등학교 3년을 안동에서, 대학교를 서울에서 진학 중인 탓이다. 완전한 사투리도, 완전한 서울말도 구사할 수 없는 난 현재 이도저도 아닌 제3의 언어를 구사 중이다. 상경한 지방 사람들의 특징처럼 나 역시 사투리를 남들에 비해 안 쓰는 편이라는 알량한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그치만 한편으론 사투리가 언젠가 완전히 사라지게 될 미래를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도 들기도 한다.준(準). 어떤 명사
나는 늘 오늘보다 내일의, 내일보다 내년의, 내년보다 10년 후의 내가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어쩌면 아-주 막연한 기대를 품고 살아왔다. 이런 막연함은 만족하지 못한 하루를 보낸 나 자신을 반성하게 만들었고, 현재의 나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다가왔다.그래서였을까, 분명 남들과 다르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자꾸만 내가 부족해보였고 아직도 갓 고등학생 티를 벗은 어린 아이 같았다.별안간 신문사에 지원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막연함이 꿈꾸는 나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보단 나은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