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시간이 아깝지 않을까?’ 내겐 아직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남은 날이 더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떠나보낸 후일지라도, 이 물음에 썩 괜찮게 대답하는 모습은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는다. 꽤 오래전부터 든 생각이기에 어떻게 보면 맘에 드는 답을 찾는 게 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단지 멋진 그 한 마디를 위해, 스무 살 여름 내가 찾은 곳은 신문사였다. 처음에는 신문 몇 번 읽고 섣불리 발을 들였다고 생각했다. 좋은 글을 읽는 것은 쉬웠지만 읽기 쉬운 글을 쓰는 것은 어려웠다. 한 가지 생각을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한다. 필멸자의 운명이란 영원에 비하면 찰나의 반짝거림, 그 반짝거림은 때론 눈물만큼 여리고 불꽃놀이만큼 아름답다. 영화는 검은 스크린 위에 명멸하며 쇼트가 되는 광채로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필멸자다. 시는 언어의 너머를 더듬으며 자기의 세계를 찢어내고 전연 존재하지 않던 세계를 열어보이는 언어 위 필멸자다. 그래서 다시 사랑해야 할 목록은 채워진다. 오즈 야스지로, 장 뤽 고다르, 스티븐 스필버그, 웨스 앤더슨 그리고 정지용, 윤동주, 김수영, 최승자, 진은영 등 결코 채워지지 않는 목록들. 그
성대신문에 들어오기 위해 논술 고사와 면접을 치렀던 게 어제 같은데, 벌써 3학기의 임기가 끝났다. 부서장은 꿈에도 생각한 적 없었던 내가 이번 학기 보도부 부서장을 맡게 되며 고난과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벌써 올해의 마지막 호, 나의 마지막 성대신문 기사를 준비하다니 조금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하지만 남을 생각은 전혀 없다. 한창 신문사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을 때 하루에 나갈까 말까를 5번씩 고민한 적도 있다. 마지막 취재 후기를 쓰고 있는 지금, 나가지 않고 버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생각해보면 성대신문을 통해 새
안녕, 어둠, 내 오랜 친구여.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이다. 가사 내용도 우울하고, 노래의 진행도 씁쓸함을 자아내는 노래다. 왜냐하면, “내가 잠든 새에 어떤 환상이 살며시 내 꿈 속에 찾아와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그리고 내 머릿속에 심어진 그 환상은 여전히 침묵의 소리 가운데 남아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외로움을 노래하는 이 노래의 분위기는 따뜻하고 포근하다.지금까지 오래 버텨왔다고 느낀다. 이제 마지막을 달려가고 있는 신문발간의 후반에서 나의 기사를 총론으로 마치니 기분이 내심 새롭다. 물론 다음 주 모모이가 남기는 했지만, 심
처음 수학과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주위 사람들은 내 선택에 혀를 차기 일쑤였다. ‘수학과 가서 밥 벌어 먹고 살겠냐’, ‘그런 과가 무슨 가치가 있냐’. 4년 정도 지나 문헌정보학과를 복수전공하기로 결정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전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문헌정보학과는 뭐하는 학과냐’, ‘사서나 해서 먹고 살겠냐’. 이는 내가 신문사를 하기로 결정했을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의 선택은 늘 주위 사람들의 의문을 품게 하였다. 사실 이 정도면 남들과 다르게 살고자 선택하는 고질병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내가 추구한 가치는 무엇일
프로이트의 『에고와 이드』에서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했을 때 나타나는 심리 반응은 두 가지다. 첫번째, 애도(mourning) 작업을 통해 상실의 대상을 나로부터 밀어낸다. 그에게 투자하던 리비도를 이제는 회수하고, 빈 자리를 다른 것으로 메꾼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식의 매정한 극복이다. 그러나 두번째, 우울증은 떠난 대상을 정말로 떠나보내기는커녕 보유하려 한다. 그것을 스스로에 은신시키고, 끊임없이 내면화하며, 에고와 합체해버림으로써 에고의 일부로 만든다. 그런데 우울증은 무의식적이어서 정확히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알지 못한
기사를 쓰는 것은 늘 낯설고 어렵다. 기사는 사실과 의견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가령 '꽃이 피었다'고 말하지만, 이 문장에 의견은 쉽게 개입된다. '꽃은 피었다'고 한 글자만 바뀌어도 이 문장은 의견의 세계가 된다. 기사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양면성을 가진다. 독자는 기사를 징검다리 삼아 언어 너머 진실로 간다고 믿지만, 다리를 지탱하는 인간의 언어는 한없이 불순하고 불완전하다. 아무리 정제된 언어도 진실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기사의 신이 있다면 객관성이다. 기사는 주
개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두들 아직은 여유로운 날들을 보내던 지난 3주 동안 나는 오히려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바쁜 날들을 보냈다. 방학 동안 4번의 발간 준비는 마쳤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을 들이면 들일수록 오히려 욕심이 나서 쉽사리 기사를 놓을 수가 없었다. 첫 주에는 기사가 두 개였다. 인터뷰도 2주 전에 끝냈고, 기사 초고도 금요일이 되기 전에 나왔다. 그런데 오히려 첫 기사 때보다 훨씬 늦은 시간인 토요일 새벽 4시가 돼서야 퇴근을 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주는 기사가 없으니 괜찮겠지, 생각했던 안일한 나는 그 다음 주에도
학술부는 르포 기사 쓸 일이 없다. 이를 핑계로 특집팀 르포를 쓰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호기롭게 내린 결정이었지만 모든 게 낯설었다. 게다가 장례식장이라니. 취재 가는 날은 온몸에 힘이 바싹 들었다. 검은 바지에 검은 티셔츠까지 갖춰 입고 밖을 나섰다. 이르지 않은 오전의 혜화는 조금 더웠다.경로를 여러번 꼼꼼히 살핀 후 버스에 올라탔다. 북적북적한 버스는 올림픽대로를 따라 달렸다. 버스 창 너머로 보이는 한강공원에 사람이 바글거렸다. 김포 시내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고 택시를 잡았다. 마을버스의 배차 간격이 터무니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호 발간 준비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광고팀 수습모집 포스터 촬영, 시각면, 모모이, 취재 후기, 그리고 몇 개의 사진 요청들이 겹쳐 신문사 생활 중 가장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단순한 일이 절대적으로 많은 것은 괜찮다. 밤을 새우는 것은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은 지난 학기와는 달랐다. 사진부의 부서장을 맡게 되었고 부서 동기가 학군단 하계 훈련에 끌려가 의지할 곳이 없었다.해낼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지 못하면 고통스럽다. 하루는, 반나절을 투자하고도 사진을 단 한 장도 건지지 못했다.
표사유피인사유명(豹死留皮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다. 남긴다는 건 무엇일까. 흔적이다. 자신의 흔적은 누군가에겐 반추하고 싶은 추억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겐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겠다. 돌이켜보니 나는 참 흔적 남기는 걸 좋아한 것 같다. 그 흔적은 내 이름이 될 수도 있고, 내가 썼던 자리가 될 수도 있지만, 이곳 성대신문에서는 내 기사가 바로 그런 흔적이 될 것이다. 기사가 나올 때마다 내 바이라인이 달려 나옴과 동시에, 후련하고, 뿌듯한 감정도 같이
왼쪽 모모이는 지난 학기에 까였던(?) 기획이다. 지면에 싣기 위해 기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화요일 편집회의. 더 좋은 내용의 기사를 위해 영양가 높은 피드백이 오가지만 혹평을 받을 때 속상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난, 재도전했다. 귀찮아서 기획을 ‘재탕’한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절대 아니다. 꼭 쓰고 싶어서 쓴 것이다.이번 학기 사진부의 기획들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부서장으로서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열심히 일한 만큼 모모이를 비롯한 시각면, 보도사
미세먼지가 종종 하루를 망치는 여느 봄날과는 달리 맑은 하늘과 무더움이 가득한 4월의 주말이었다. 답안지에 한 줄이라도 더 채우기 위해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을 뒤로하고 710번 버스에 카메라와 함께 몸을 실었다.시민평화법정이 열리는 성산동의 문화비축기지는 버스종점에 가까웠다. 표준어와 사투리 경계에서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 기자에게 월드컵경기장의 등 뒤에 폭 숨어있던 이곳은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독특한 외관이 눈에 먼저 띄었지만 명명 역시 예사롭지 않아 곱씹게 됐다. ‘문화’와 ‘비축기지’에 얽힌 사연이 있지 않겠냐는 물음에 입구의
집에서 학교가 있는 혜화까지 2시간 15분. 매일 4시간 반이라는 시간을 지하철에서 보내는 나에게 사실 성대신문 기자로서의 삶은 조금 벅차다. 오랫동안 머리를 싸매 수요일과 금요일, 황금 같은 공강을 만들었지만 현실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 6일 통학. 가끔은 정말 자취가 간절해지고, 지하철에서 버려지는 하루의 일부가 싫다. 좌석에 앉지 못해 내내 꼼짝없이 서서 오는 날은 더욱 그렇다.기획 기사를 위한 인터뷰를 하러 가던 나의 모습이 생생하다. 하필 퇴근 시간이라 몰려드는 인파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았던 2호선.
신문은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모든 지면에는 오로지 신문을 만들겠다는 뜻으로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전에는 신문을 볼 때마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집으로 매주 배송되던 신문을 보면서 ‘또 왔네’라는 생각에 그칠 뿐 그 신문을 위해 누군가는 끼니도 거르고 잠을 줄여가며 발로 뛰었을 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저 기자가 노력하면 뚝딱 완성되는 거구나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집으로 배송된 신문을 망설임 없이 줍듯 누군가의 수고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하지만 대학에 들어와 경험
인터뷰를 갔던 목요일에는 비가 내렸다. 개강 후 세 차례 인터뷰를 다녀왔는데, 매번 비가 왔던 것 같다. 공기가 촉촉하다 못해 축축했다. 우중충한 날씨에도 베스트셀러 작가를 만난다는 생각에 살짝 들뜬 상태로 버스에 올랐다. 신문사 생활을 한 일 년 동안 열 번이 넘는 인터뷰를 다녀왔다. 인터뷰에 익숙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하지만, 약간의 걱정과 긴장은 지울 수가 없었다. 무의미하게 이어지던 상념이 더 떠오르지 않게 될 무렵 도착한 평창동 스타벅스에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의 저자 채성호 작가님을 만났다. 인터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작년 12월이었다. 도서관에서 만난 그는 곱슬거리는 사자 머리에 퀭한 눈, 푹 패인 주름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늘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으며 안경을 쓸 때도, 벗을 때도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모두 그와 대화하기 원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눈빛에 넘쳐나는 아우라는 내가 동경해오던 예술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알베르토 자코메티다. 그에 대한 기사를 쓰기로 마음먹고 나서 방학 내내 매달렸다. 그의 작품에 관해서 6권이 넘는 책을 읽었고 수많은 기사와 영상을 봤다. 그는 알
이번 기사는 나에게 평생 잊지 못할 기사가 될 것 같다. 정기자가 된 후 처음 쓴 기사인데다가, 고등학생 때부터 좋아했던 프로배구 팀 한국전력의 김철수 감독님을 인터뷰한 기사기 때문이다. 신문사에 들어올 때부터, 아니 배구로 유명한 우리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혹시 선수들이나 감독님을 만날 기회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었다. 성대신문에서 스포츠 기사를 쓰면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스포츠 팀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면서 만날 수 없을 것이라 단념했다. 하지만 기회가 왔고, 망설임 없이 한국전력 구단에 연락해 감독님과 인터뷰 날
총학생회장단 당선자 인터뷰까지 끝내고 나니 정말로 마지막에 다다랐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마지막을 맞아 돌이켜보면 신문사에서의 마지막 학기였던 이번 학기는 유달리 힘들었었다. 첫 발간부터 취재 과정 중 어려움이 있었고, 그 후로도 연달아 실수하면서 많이 위축됐었다. 기획을 준비하고 기사를 쓰면서 많이 울었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음에도 혼자 힘들어하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도 있었다. 다섯 번째 발간 때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발간에 아예 참여하지 못했었다. 할아버지께선 부지런히 살고 조심해서 다니라 손 흔들며 말
수습 기간을 제외하고 학보사 기자로 제대로 활동한 지 꼬박 1년이 됐다. 그래서 지난 일 년은 후회가 없다. 사실 신문사에 진지한 마음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얕은 지식과 관심으로 가볍게 시작한 활동이었기 때문에 부담도, 또 열정도 적었다. 하지만 수습 기간이 지나 직접 기획과 취재를 시작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내 이름으로 기사가 나오고, 신문이 나오기 전까지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우리, 그리고 나뿐이라는 사실이 신기하고 색달랐다. 그리고 신문사에 대한 재미도 점차 커졌다.항상 재밌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쓰고자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