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의 기분장지영(러문 18) 기도하는 두 손에아무도 모르는 이름이 담겨 있다나는 서투르고 흔들리는 숲을 사랑했다숲의 끝에 간다는 건나무의 마음으로 무릎을 드는 일 사슴들이 같은 잎을 씹을 때 입술 대신 이마가 부딪힌다 달아나기 위해 제 몸을 부서뜨리는 것 같다 빛이 쏟아지고 조각나고 흩어지다가마침내 검은 숲에 안겨 있었다풀숲 사이에서 동물의 춤을 추다 가끔 들키고 싶었다안개 속을 서성이면 잎사귀에 눈물이 고일까 호흡과 맥박 바깥에서 골몰하면 어른이 되는 걸까 사슴의 심장으로 뛰어도 뿔이 자라지 않는다목덜미가 서늘해질 때는 몸을 둥
올해는 123명의 학생이 278편의 시를 응모하였다. 시를 써보려고 언어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는 작품들이 많았는데, 안타깝게도 언어와 열정이 시적 형식을 얻지 못하고 산만해지는 것이 아쉬웠다. 예년에는 자기감정에 도취되어 내면을 토로하는 데 그치는 시들이 많았는데, 올해는 넋두리 같은 발화는 현격히 줄었다. 그만큼 정신력으로 세상을 버텨내며 직시하고 극복하려는 자세로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감정이나 감각으로 서정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사유를 통과하는 통찰의 시가 되기를 바란다. 동화적이고 만화적이고 풍자적인
동물아이김혁진(인과계열 23) 때는 2022년 10월 4일이었다. 피곤한 기분마저 다름없는 평범한 아침에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첫째 딸 아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해 맞춰 놓은 알람소리나 잠에서 깨어난 둘째 아들 재송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일어났을 텐데, 오늘은 기묘하면서도 거슬리는 낯선 소리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언뜻 들으면 오합지졸의 오케스트라가 불협화음을 내는 소리 같다가도, 또 언뜻 들으면 여러 대의 유람선이 동시에 출발하는 소리 같았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며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이 소리
봄은 돌아오지 않는다윤성빈(사과계열 23) —입주를 환영합니다. 완만한 언덕 위, 둔덕진 길을 따라 줄지어 세워진 아파트 건물들을 몇 번이고 올려보았다. 언덕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이편까지 건물의 높이는 점점 낮아져, 각 건물의 꼭대기는 같은 고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곳은 언덕이 아니라 고른 평지에 세워진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인 모습. 두연 그 건물들이 언덕 위에 뿌리내린 거대한 말뚝처럼 느껴졌다. 무딘 흙바닥에 깊이 뿌리내려 이내 나무를 가장한 철근들. 그렇게 나무
인간식물김민석(국문 17) *종이컵 바닥에는 진득한 커피 덩어리가 남아 있었다. 윤 욱은 종이컵 테를 시계방향으로 돌려 씹었다. 절반 정도 씹고 나서 보니 시계는 오후 여섯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천에 이십오라. 이 실장은 연신 눈썹만 긁어댔다. 짙은 눈썹과 동그란 눈, 돌출된 아랫입술. 군인 머리. 괜히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천에 이히 시힙 오호. 이 실장은 콧노래를 부르며 박자에 맞게 수첩을 넘겼다. 보증금 천만 원에 월세는 이십오만 원.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 윤 욱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시선을
신선한 발상의 사고실험이 돋보이는 를 최우수작으로 선정했다. 어느 날 갑자기, 인간 아이들이 온갖 종류의 동물로 변신하는 재난이 닥친다. 인간과 동물의 거주, 서식 구역은 구획 불가능한 상태로 뒤섞인다. 인간 목적을 위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물질, 기계로 동물을 간주하던 시대의 종말을 그려낸 의 세계에선, 서구 철학사를 관통해 온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은 아동학대, 방임, 심지어 살인에 준하는 일로 엄정한 제재가 불가피하다. 그러나 더 이상 ‘동물’과 ‘동물 아이’의 구분조차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고, 이
허위의 안개 너머로 맞춘 시선오현지(인과계열 23) 0.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라캉의 글에서 발췌되어 널리 알려진 위 구절은, 기실 원문의 일부에 불과하다. 생략된 부분을 불러와 다시 해석하자면 이렇다.There is no such this as Woman, with capital W indicating the universal.보편을 가리키는 대문자 w로 쓰인 그런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72p.일부만 놓고 보면 언뜻 모호해 보이지만, 전문을 따지자면 의도는 적확하다
기억-망각의 구조로 재구성하는 3•11 동일본대지진김경민(국문 18) 1. 3•11 동일본대지진의 양가성과 기억-망각의 작동 이 연구는 알라이다 아스만이 밝혀낸 기억과 망각의 상호작용을 토대로 3•11 동일본대지진과 연루된 현지 텍스트들의 기억-망각 구조를 밝혀내려 한다. 알라이다 아스만에 따르면, 기억과 망각은 분리되지 않고 상호 영향을 미친다. 기억과 망각의 구성은 동시에 이루어지고 각자의 구획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따라서 3•11 동일본대지진에 관한 기억과 망각의 구성은 아직도 수많은 문제를 양산한다. 그 중심엔 무엇을 기
놀이의 시, 시의 공동체주예은(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7기) 1. 위반에서 시작되는 놀이—놀이로서 가능성의 열림 밤이 오고 있었다./모두 긴장하고 있었다./갑자기 뒷뜰에서 살구들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낯선 거리에서 복면을 쓰고 종이를 뿌리다가 돌아온 저녁, 우리는 /고우고우 스텝으로 저녁 식탁 둘레를 돌기 시작했다./일곱 마리 새끼를 물어 죽인 해피도 우리를 따라 스텝을 밟고 있었다./아 별들이 모두 고우고우로 떨어지고 있었다./뒷뜰의 살구들도. 해피가 죽인 일곱 마리도.우리들이 던지던 종이 조각도./별 스물 두 개도.
성대문학상이 다시 평론 부문을 공모한 지 네 해째가 되었다. 문학,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 등에 걸친 여러 분야에서 17분이 응모자가 21편의 작품을 보내주었다. 평론이라는 장르에 대한 열정도 열정이지만, 넘치는 문화 산물 속에서 나날이 자기만의 감식안과 해석적인 평가가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평론이란 어떤 글쓰기인가라는 질문은 까다로운 한편 답을 모으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그만큼 자유로운 형식의 에세이로서 지적 장과 그 대상을 넓혀온 장르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합의할 수 있는 것은 비평은 본질적으로 대상이 되는
물고기가 되고 싶어!박해울(아청 18) # 소운의 방, 안, 낮주인공의 방. 주말 오전 아무도 일어나지 않아 조용하고 한적한 모습. 곤히 잠을 자고 있는 소운. 엄마의 책 읽는 목소리 들리며 집 안 곳곳을 비춘다. 동화책이 가득 꽂혀 있는 책꽂이, 뒤쪽 벽에 보이는 푸른색 바다 포스터와 물고기가 그려진 이불, 책상 위에 어항 속 키우고 있는 물고기. [엄마 내레이션]옛날 어느 한 바닷가에는 정말 작은 마을이 있었대. 그런데 신기한 건 그 마을 사람들에게 남모를 비밀이 있었다는 거야. 느긋한 바다거북이, 발이 긴 문어, 거대한 몸집을
사라지는 연습1차서영(연기예술 20)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 나를 뒤흔드는 작품들은 절정의 순간에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