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자유나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 문자로 기록해 지면에 남기는 경우는 더 그렇다. 한번 종이 위에 잉크로 찍고 나면 정정하기 어려운 게 글이다. 그래서였을까, 한 학기 동안의 수습 활동과 한 달에 걸친 방중 활동 동안 설렘과 고됨보다 먼저 찾아온 건 책임감이었다.수습 기간은 말 그대로 배우고 익히는 일의 연속이었다. 모르는 용어들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낯선 절차에 익숙해지기 위해 발버둥 치며 보낸 나날들이 기억에 선명하다. 이 지난한 과정도 언젠가 지나갈 테지, 그리고 나면 길이 보일 테지, 하며 자신을 위로했지만 이름 석 자
성대신문에 지원할 때의 마음은 가벼웠다. 뭔가 유의미한 활동을 하고 싶었고,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좋아하는 미드에서 주인공이 학보사에서 일하던 것도 떠올렸다. ‘프레스증이 생기면 나도 멋있어 보이겠지?’라는 생각도 했다. 첫 수습 트레이닝을 진행했을 때도 그랬다. 표기 준칙을 받아들고 괜히 멋져 보여서 종이가 닳도록 넘겨보았다. 그때의 나는 성대신문이라는 이름만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그래서인지 수습기자 트레이닝은 당황의 연속이었다. 당장 소재로 뭘 써야 할지부터 ‘문건’이 무엇인지, 8매는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지…. 신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신문사에 들어왔다. 수습 트레이닝을 받고 방중 활동을 하며 느낀 점은 기자는 글 쓰는 걸 좋아하고 잘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글 쓰는 것 외에 매우 많은 능력이 필요한 것 같다. 신문사 일은 마치 20명이 넘는 사람들끼리 하는 조별활동 같다. 현재로서는 나만 잘하면 될 것 같다. 기획회의 때 문건을 가져가면 어떤 피드백을 받을까 무섭기도 하지만 동시에 설레기도 한다. 그런 피드백들이 기사를 더 좋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드백을 많이 받지 않고 싶으면서 동시에 많은 피드백을 받고
대학 합격의 기쁨도 잠시, 2020년, 특히 상반기는 온 지구에 역병이 돌아 대학생활은커녕 일상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한 해였다. 1학기에 온라인 수업을 들으며, 나름 고등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혹은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을 배우고 이에 대해 생각해보는 경험은 좋았다. 그러나 어딘가 구멍이 난 듯 공허함에 빠져있었다. 가면 갈수록 매너리즘과 무료함에 빠지고, 사는 지역의 곳곳에서 코로나 19 확진자가 거의 매일 나와 외출을 하지 못해 무언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흘러가는 대로 살아갔었다.2학기에는 다행히 학교를 방문하여 수업을 들을
성대신문에 입사한 후, 지난 학기 트레이닝을 거쳐 이제 방중활동을 마친다. 수습일기의 "수습"이란 앞으로 기자로 활동하며 필요한 업무들을 배워 익히는 것을 뜻하지만 나에게 수습은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저번 학기와 이번 방학은 나에게 내 선택에 대한 수습, 벌어진 사태를 거두어 바로잡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원서를 작성하며 호기심과 열정이 가득했던 초심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못했고, 권리보다는 책임과 의무가 많은 이 일이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문득 ‘왜 사서 고생을 하는 것인가’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내가 구매한 자발적
갑자기 찾아온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외부 생활이 중지되었다. 입시를 끝내고 처음으로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갖게 되었지만,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알지 못했다. 공부나 대외활동 등의 희미한 의무들은 뒤로하고, 피아노만 연주하며 한 학기를 보냈다. 그렇게 오선지만 붙들고 있던 도중, 문득 무의미하게 사라지는 시간이 허무하다고 느꼈다. 먼지에 뒤덮이는 듯한 하루하루였기 때문이다.이제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바이러스를 핑계로 아무것도 도전하지 않는 게으름을 멈추고자, 성대신문에 첫 발을 내디뎠다. 문화부 준정기사로
2020년 봄, 길고 긴 수험생활을 마무리하고 대학생이 됐다. 그런데, 캠퍼스를 밟아보기도 전에 너무나 큰 적수를 만나버렸다. 이름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코로나 19’였다. 코로나는 내 모든 대학 로망을 부숴버렸다. 혹시 차은우를 볼 수 있을까 기대했던 입학식도, 이름만으로도 설렜던 OT도 전부 물거품이 됐다. 그렇게 많은 것들을 빼앗긴 나에게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무력감이었다. 새벽같이 모의고사를 대비하고 수행평가를 준비하던 그 시절의 나는 없었다. 매번 공부, 시험, 입시처럼 남이 정해준 길을 잔말 않고 따라갔던 나여서 그럴까?
약 3주간의 방중 활동을 마치고 천천히 되돌아보니 이전에 많은 기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수습기자 모집이 마감되기 한 시간 전까지 나는 고민하며 망설였다. 후회하기 싫어 떨리는 마음으로 지원서를 제출했지만, 면접을 보러 가는 날도 내 마음속엔 역시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설렘보단 그저 두려움이 가득했다. 이후 혹시 합격이 될까 하며 연락이 오기만을 전전긍긍 기다렸던 모습도 이제 떠오른다. 바라고 또 바랬던 학보사 기자가 되었고 막연하기만 했던 내 목표에 한 걸음 다가섰다. 출발선도 찾지 못해 헤매던 나에게 첫 시작점이 생긴 느낌이
너는 남들 다 졸업하는 나이에 무슨 학보사를 들어가냐? 출근 문제로 기숙사에 올라와 따로 살던 내가, 학교에서 또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는 것에 대한 아빠의 반응은 그랬다. 나도 그 생각에 적잖이 동의했던 건 사실이다. 그때까지도 공시를 볼지, 언론고시를 준비할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그렇게 한 학기의 수습기자 생활이 끝나고, 어느새 방중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새로운 일에 슬그머니 익숙해지는 중이다. 어디서나 늘 띄어 쓰던 콜론(:) 표시를 습관적으로 붙여서 쓸 만큼. 수습 기간도 일로 본다면 본의 아니게 투잡을 뛰며
대학에서의 첫 학기를 집에서 보내고 든 생각 ‘나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나?’ 나는 워낙 집순이에다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긴장하는 탓에 외출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면 온라인으로 진행된 한 학기 동안은 거의 고3처럼 집에서 강의 듣고 과제만 하는 식으로 살았다. 정말 “사이버”대학에 다닌 것이다.1학기가 끝나고 친구들을 만나니 누구는 밴드 동아리에 들어가 곧 있으면 공연을 한다고 하고, 누구는 반수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생각이 들며 다음 학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한다. 보통 이 말은 언론의 영향력과 그 책임이 강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나는 수습기간을 겪어오며 이 말을 조금 다르게 해석해도 될 것 같다고 느꼈다. 작년 9월에 수습기자로 들어왔을 때만 해도, 단순히 ‘잘 해보자!’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내 마음가짐을 고쳐야 했다. 그렇게 추상적인 열정만 가지고 부딪히기엔 성대신문의 체계는 날카롭고 꼼꼼했다. 매주 월요일(혹은 수요일)에 트레이닝을 받다가 부서별 과제를 할 때는 초반부에 가졌던 내 마음가짐을 돌아보며 절망감을 느
코로나로 세상이 멈춰버린지 반년이 되는 때 나는 성대신문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흔히들 농담처럼 ‘사망년’이라고 부르는 삼학년이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하기 시작해야한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이러한 불안과 별개로 뭐든 시작할 때 남들이 한 번 생각할 것을 열 번 더 생각하는 성격이라 성대신문에 지원서를 내기까지에도 많은 고민이 있었다. 스스로의 능력에 대해 의심했고 힘들다고 소문난 학보사 일을 과연 끝까지 해낼 끈기를 가졌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과 고민들을 딛고 나는 시작해보기로 결심했다. 본격적인 트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