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톡톡.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가 우산을 두드린다. 간혹 우산을 피한 빗방울이 나를 때리면 내 마음은 빗물 모양대로 움푹 팼다. 한 폭의 기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신경을 쏟고 나면 몸과 정신은 액체괴물이 된다. 미술시장을 취재하면서 기뻤던 일은 기뻤던 모양대로 자국이 남고, 힘들던 일은 힘들던 모양대로 자국이 남았다. 자국은 오래도록 남아 생각할 거리를 만든다.[맨발의 박 기자] 중앙대 이 교수를 만나는 과정은 낭만적이었다. 그의 논문을 접하고 꼭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었다. 두 차례의 메일을 보내도 답이 없자 학교 행정실에 전화했다.
이번 미래학 기사를 쓰기 위해 박성원 국회미래연구위원을 인터뷰하러 국회에 다녀왔다. 미래학에 대한 더 깊은 지식을 얻기 위해 인터뷰하러 간 것이다. 그런데 인터뷰 이후, 미래학에 대한 궁금증은 풀렸지만, 우리 사회가 어떤 비전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인터뷰이는 ‘미래학의 가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하던 도중 나와 사진기자에게 우리는 미래에 대해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냐고 물었다. 지금까지 현재에 집중해서 살아왔기에 사실 그 질문을 들었을 때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어떤 답을 해야 하지?’라는 생각에
어느덧 이번 학기 마지막 발간이 됐다. 마지막 발간의 취재후기를 쓴다는 부담감에 쉽게 글을 시작할 수 없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알기에 더욱더 괴로웠다. 몇 글자 되지 않지만 그 속에 진득한 메시지를 담고 싶었고, 울림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글은 꼬여만 갔고 마감 시간은 다가왔다. 3학기 동안 신문사 활동을 했다고 글 실력이 나아지지는 않았나 보다. 결국 기사 마감 압박에 못 이겨 지금껏 썼던 글을 다 지우고 나에게 ‘성대신문’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적어보려 한다.우선, 지금까지 쓴 기사를 다시 살
1650호 보도부 기획을 준비하며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기획을 잡는 것을 시작으로 취재하고 기사 초고를 작성하며 체크를 받는 것까지 어느 하나 순탄하게 지나가지 않았다. 시간이 부족해 수업 도중에 취재를 가고 기사 주제가 명확하지 않아 마감 당일 기사를 다시 작성하는 등 기자로서 나의 자질에 대해 한계를 많이 느꼈다.지난해 3월 기자를 하고 싶다고 마음먹고 복학과 동시에 성대신문을 지원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쓴 적이 없어도 ‘하면 된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성대신문을 하며 내가 안일하게 생
최근 몇 년 동안 성대신문에서 두 기자가 한 기사를 같이 쓴 적은 없었다. 사진기자가 글기자와 동행해 취재하거나,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텀을 나눠 기사를 쓸 때는 있었다. 그러나 소재 선정부터 취재, 기사 작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두 기자가 함께한 적은 없었다.이번 호부터 새롭게 내보인 코너인 ‘반촌돋보기’에서는 두 기자가 함께했다. ‘반촌돋보기’는 우리 지역사회의 문제점을 파헤쳐 기사를 쓰는 코너다. 취재범위가 넓어 한 명이 모든 일을 하기 힘들기에 두 기자가 함께했다.그렇게 박성환 기자와 함께 ‘반촌돋보기’를 맡았다. 우리
참치를 이용해 참치 통조림을 만들지만, 참치를 보지 않고 참치 통조림만 본 사람은 참치의 본 모습을 알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기사 역시 마찬가지다. 독자들은 기사를 통해 진실에 다가갈 수는 있겠지만 진실에 도달할 수는 없다. 기자는 객관을 수집하고 그것을 주관으로 가공해 객관적인 양 세상에 내놓는다. 참치 통조림을 참치를 본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지만, 기자는 기사를 통해 독자들이 세상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내가 수습기자일 때 가장 먼저 썼던 글이 ‘바른 기자상’이었다. 지난해의 나는 진실만을 보
내가 알고, 보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시절이 있었다. 그와 더불어 ‘글을 남들보다 조금 잘 쓰는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만심이 나를 성대신문으로 이끌었다. 호된 수습 트레이닝을 겨우 버티고 임명식을 할 때 “진실만을 전하는 기자가 되겠습니다”라고 당당하게 외쳤다. 그때는 몰랐다. ‘진실’이라는 단어의 무게를.준정기자 때는 피해를 보는 쪽, 동정 여론을 얻고 있는 쪽을 대변하면 진실하고 정의로운 기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성대신문 사회부 위상에는 ‘사회적 약자의 권익 향상을 위한 소수
사소하게 신경 쓰이는 것들이 있다. 발 사이즈보다 5만큼 더 커서 발뒤꿈치에서 달랑거리는 235 신발, 매번 인형이 바뀌지만 내가 원하는 인형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인형 뽑기 기계, 작고 흔한 맛이지만 항상 사람들이 복작복작한 마카롱 가게.신문사도 그 정도만 신경 쓰이는 일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머릿속에서 잠깐 까먹었다가도 오래지 않아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것이었다면 조금 더 편하게 생활하지 않았을까,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그만큼 신경 쓸 일이 많은 신문사 생활이었다. 기사를 잘 쓰는 것도, 인터뷰를 부탁드리는 것도,
‘어떻게 살아야 시간이 아깝지 않을까?’ 내겐 아직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남은 날이 더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떠나보낸 후일지라도, 이 물음에 썩 괜찮게 대답하는 모습은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는다. 꽤 오래전부터 든 생각이기에 어떻게 보면 맘에 드는 답을 찾는 게 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단지 멋진 그 한 마디를 위해, 스무 살 여름 내가 찾은 곳은 신문사였다. 처음에는 신문 몇 번 읽고 섣불리 발을 들였다고 생각했다. 좋은 글을 읽는 것은 쉬웠지만 읽기 쉬운 글을 쓰는 것은 어려웠다. 한 가지 생각을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한다. 필멸자의 운명이란 영원에 비하면 찰나의 반짝거림, 그 반짝거림은 때론 눈물만큼 여리고 불꽃놀이만큼 아름답다. 영화는 검은 스크린 위에 명멸하며 쇼트가 되는 광채로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필멸자다. 시는 언어의 너머를 더듬으며 자기의 세계를 찢어내고 전연 존재하지 않던 세계를 열어보이는 언어 위 필멸자다. 그래서 다시 사랑해야 할 목록은 채워진다. 오즈 야스지로, 장 뤽 고다르, 스티븐 스필버그, 웨스 앤더슨 그리고 정지용, 윤동주, 김수영, 최승자, 진은영 등 결코 채워지지 않는 목록들. 그
성대신문에 들어오기 위해 논술 고사와 면접을 치렀던 게 어제 같은데, 벌써 3학기의 임기가 끝났다. 부서장은 꿈에도 생각한 적 없었던 내가 이번 학기 보도부 부서장을 맡게 되며 고난과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벌써 올해의 마지막 호, 나의 마지막 성대신문 기사를 준비하다니 조금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하지만 남을 생각은 전혀 없다. 한창 신문사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을 때 하루에 나갈까 말까를 5번씩 고민한 적도 있다. 마지막 취재 후기를 쓰고 있는 지금, 나가지 않고 버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생각해보면 성대신문을 통해 새
안녕, 어둠, 내 오랜 친구여.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이다. 가사 내용도 우울하고, 노래의 진행도 씁쓸함을 자아내는 노래다. 왜냐하면, “내가 잠든 새에 어떤 환상이 살며시 내 꿈 속에 찾아와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그리고 내 머릿속에 심어진 그 환상은 여전히 침묵의 소리 가운데 남아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외로움을 노래하는 이 노래의 분위기는 따뜻하고 포근하다.지금까지 오래 버텨왔다고 느낀다. 이제 마지막을 달려가고 있는 신문발간의 후반에서 나의 기사를 총론으로 마치니 기분이 내심 새롭다. 물론 다음 주 모모이가 남기는 했지만, 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