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기자 생활이 끝나고 여름방학이 한창인 이 무렵 다시 방중활동으로 성대신문으로 돌아왔다. 여름 방학이 짧다고 느껴지는 가운데 방중활동이 시작되니 벌써부터 방학은 끝이 난듯했다. 문득 전역도 전에 짧은 머리를 하고 성대신문사 면접을 봤을 때가 기억이 난다. 당시 될 수 있을까라는 마음과 동시에 난 잘 할 수 있을 거야라는 마음을 같이 가지고 있었다. 트레이닝 하는 동안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무사히 내가 원하는 사회부로 들어와 만족스럽다. 특히 머지않아 내가 취재 준비를 하고 쓴 기사가 발행될 모습을 그려보면 정말 뿌듯할
처음 성대신문에 지원할 때에는, 많은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면접을 본다는 것부터가 만만치만은 않았는데, 그 이전에 논술시험까지 봐야 한다니, 부담이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논술 시험이 쉬운 것도 아니었다. 짧은 시간이 주어졌지만, 채워야 할 분량은 적지 않았다. 대입 논술 시험 이후로 처음 펜을 잡은 터라, 더욱 막막하게 느껴졌었다.그럼에도, 꽤나 진입장벽이 높은 성대신문사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은, 기자가 되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사를 써 보고 싶었다. 17년 초반에, 악의적으로 작성된 기사에 상처받는 사람을 가까이서
처음에 접하고 느꼈던 신문사는 조용한 곳이었습니다. 논술 시험을 보려고 찾았던 신문사는 사람 한 명 없고 조용했습니다. 하지만 신문사를 더 알아갈수록 신문사는 결코 조용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기자 분들은 신문사에 모여서 기사도 작성하고 기획에 대해 논의도 하고 밥도 먹으면서 얘기도 나누는 등 제가 지금 겪고 있는 신문사는 한 순간이라도 조용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신문사 생활이 늘수록 신문사에 조금씩 적응해 가고 이 곳에 소속된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또한 총 여덟 번의 수습 교육이 성대신문과 그 신문을 만드는 사람
수습기자 트레이닝을 모두 마치고 준정기자가 되니 수습기자 트레이닝을 열정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학기 중에는 학교 적응과 학업 등 여러 일이 겹쳐 벅차게만 다가왔던 트레이닝이 이제는 너무 빠르게 끝나버린 아쉬운 것 중에 하나로 다가온다. 준정기자로서 신문사 생활을 잘 해갈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서가 배정되니 나도 이제 진짜 성대신문의 기자가 된 걸까라는 생각에 설레기도 한다. 이제 부서도 배정되고 정기자, 준정기자 분들과의 관계도 맺고 역할을 하나씩 맡아가면서 수습기자 때는 그다지 느
수습기자 트레이닝을 마치고 어느새 준정기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회가 새롭다. 처음에는 성대신문 활동이라도 하지 않으면 대학생활에 남는 것이 없을 것 같아 지원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수습기자가 되고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결코 쉽게 볼 일이 아니며, 가벼운 활동으로 여길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수습기자 트레이닝과 과제에 좀 더 의욕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학교 수업 과제와 시험이 많을 때는 특히 활동에 불성실했는데 준정기자로 활동해야하는 시기가 되자 그런 시간들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성대신문 기자 활
처음 성대신문사에 지원을 하게 된 구체적 이유는 없었다. 논술과 면접을 보면서 성대신문사는 굉장히 체계적이고 어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신문사에 들어서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기자 분들이 각자의 일에 열중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을 보면 긴장이 됐다. 또한 처음 기획회의에 참여했을 때에는 대학신문의 기자로서 진지하게 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고 처음으로 스트레이트 기사 체크를 받을 때는 앞으로 겪게 될 성대신문사의 많은 일들이 걱정되기도 했다.하지만 작은 이야기를 통해 많은 기자 분들을 만나 대화를
1학년을 의미없이 하루하루를 노는 것에만 치중하여 살았던 스스로에게 성대신문은 나 스스로를 일깨워준 존재이다. 처음으로 사람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교를 들어오고 나서 한참을 잊고 있었던 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밤낮으로 열심히 기사를 작성하고 교열을 보는 기자 분들을 보니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내가 과연 이 일들을 잘 해낼 수가 있을까라는 걱정부터 무엇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또한 과연 내가 이 만큼의 시간을 할애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 하지만 수습기자를 하는 동
수습기간을 거친 뒤 한 학기동안 준정기자로서 신문사 생활을 마쳤다. 처음에 신문사를 지원한 이유는 학교를 다니면서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활동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어느 정도 힘들 거라는 것은 예상했었지만 직접 신문을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나도 잘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수습기간동안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성대신문을 만들기 위해 기자 분들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고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자는 쓰고 싶은 소재를 취재하고 기사를 쓰기만 하면 된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그 과정 속에 정말 많은 어려움
성대신문은 PD가 되고 싶어하는 나에게 친구가 권유해주어서 들어왔다. 일정이 빡빡하고 업무량이 많다고 들었지만 어차피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나로서는 새로운 사람들도 만날 겸 언론 시험 준비도 할 겸 일석이조 였다. 대부분의 언론사 시험이 논술 시험이었기에 글쓰기 준비를 위해 과감하게 학술부를 1지망으로 선택했다. 트레이닝 일정은 예상보다 더 빡빡했지만 하고 싶은 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그리 힘들지 않았다. 특히 재취재 스트레이트 기사는 생소한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이해하여 다시 내 글로 써내려가는 과정이 뿌듯하기도 했다.대학에
수습기자였던 기간이 짧기도 했고 너무 오래 되기도 해서 뚜렷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많지 않다. 게다가 추가 수습으로 들어와 트레이닝 기간도 짧았다. 2월 한 달 동안 트레이닝 일정이 잡혔는데, 1월 31일부터 2월 21일까지 유럽으로 여행을 다녀 온 탓에 대부분의 트레이닝을 받지 못했다. 재취재 스트레이트와 작은 이야기를 쓰지 못한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여러 호의 지면 평가를 하고, 문제 기사와 성균인 문건을 써 보면서 지면을 어떻게 채워나가는지에 대한 과정을 알 수 있었고, 생각보다 많이 어려운 일이란 것을 깨달았다. 지원할
원래 기자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친구가 같이 시도해보자고 해서 성대신문에 지원하게 되었다. 합격할 줄 몰랐는데 합격하고 난 뒤 생각했던 것 보다 과제도 많고 모이는 횟수도 되게 많아서 힘들었다. 분명 모집 전 부스에서 설명을 들었을 땐 수습기자는 일주일에 한 번만 모인다고 했는데 아니었다. 일주일에 두 세 번씩 만나고 과제도 이렇게 많이 내줄 줄 몰랐다. 기자라는 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기사를 써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서 과제를 하고 과제와 트레이닝을 통해 배워가면서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라는 생각
오늘은 12월 3일 토요일, 조판회의에 참석했다. 아까 5분 늦느라 조마조마하면서 달려왔는데 막상 오니 각자 할 일을 하거나 떠드는 분위기라서 다행이었다. 성대신문 홈페이지에서 트레이닝 란에 내 이름을 검색해 보니 5주동안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올린 문서를 볼 수 있었다. 벌써 11개나 업로드 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기소개와 기자상, 종합보도기사평가, 지면평가, 스트레이트, 브리핑기사, 문제기사, 성균인 계획, 시각 면과 모모이 평가, 재취재 기사 작성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곧 기자 두 분의 작은 이야기를 업로드할 예정이다.
성대신문사에서 일을 하게 되면 정말 바쁘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사실 1학년 1학기에 지원을 할까 고민도 많이 했지만 그때는 자신이 없었다.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도 의문이었고, 민폐만 끼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지원 시기를 놓쳤고, 다른 동아리에 들어가지도 않고 의미 없이 놀기만 하면서 1학년 1학기가 지나갔다. 개강 후, 우연히 지나가다가 성대신문 수습기자 모집 포스터를 봤을 때 떨어져도 좋으니 후회하지 말고 한번 지원이나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논술 시험도 봐야 했고 면접
오늘은 드디어 성대신문 수습기자로서 트레이닝이 마무리되는 날이다. 한 학기동안 그럭저럭 무사히 해온 것 같다. 시간이 정말 금방 지나갔다. 처음엔 내가 신문사를 하는 건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별 일 안하는 것 같을 때도 있었지만 학기 말이 되어가며 점점 과제도 늘어나고 써야 할 것도 늘어나 바빠지는 동시에 재미있었다. 글을 못 쓰면 혼날 줄 알았는데 혼나기는커녕 칭찬도 많이 해주시고 진지하게 조언해주셔서 많이 배우고 유익했다. 거의 보지 않았던 교지를 보기 시작했고 그 안의 기사들을 어떻게 기획하고 어떻게 편집 했을 지에 대해서 생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기자라는 직업에 관심이 있었고 이와 관련된 대학,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여러 가지 동아리, 대외활동을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과정 속에는 왜 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싶은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와 목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1학기에 성대신문에 충분히 지원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았다. 치열했던 고3의 시기를 지나고 다시금 그때처럼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것과 함께 이 활동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성대신문에 대한 미련을 가진 채 여유롭게 한
나는 신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아침마다 배달되는 신문 1면에는 타락한 정치가들의 이야기로 가득했고, 그런 내용은 나에게 너무도 어렵고 무겁게만 느껴졌다. 언론은 이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하나의 집단일 뿐이고 신뢰해야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역설적인 곳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런 반항심에 괜히 신문을 더욱 멀리하게 되었던 것 같다. 신문사에 들어오면서 이러한 반항심은 한순간에 누그러졌다. 사람들은 모두들 최대한 정직하게, 중요한 사실들을 전달하려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으며 그 열정에 나도 함께 동화되었던 것 같다. 처음
“너 언론 쪽으로 진로를 생각하고 있니?”지난 학기, 성대신문 수습기자로 활동한다는 것을 밝히자 주변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내 대답은 이랬다. “뭐, 한 학기 활동하다가 일이 나와 잘 맞으면 그럴 수도 있고...” 사실 지금도 내가 언론직에 적성이 잘 맞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건, 내가 성대신문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학교생활을 누구보다 바쁘고 성실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처럼 동아리도 해보고 이것저것 재밌는 것들을 해봐야지 벌써부터 힘들고 바쁜 기자생활로 고생 하는 것은 아깝지 않느냐고
내 대학생활에는 성대신문이 없을 줄 알았다. 기사 쓰기는커녕 기성 신문을 포함하여 어떠한 글조차 읽지 않는 나에게 이 신문사는 ‘솜’ 같았다. 학교 다니면서 성대신문의 존재감을 체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습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고군분투하니 성대신문은 어느덧 내 관심에 젖어있었다. 그리고 ‘물먹은 솜’의 무게는 나를 짓눌렀다.성대신문은 얕보면 안 되는 곳이었다. 학교의 울타리에 있지만 학생과 학생기자는 달랐다. 기사를 쓰기까지 기획구상도, 취재도, 회의도 그 모든 것들에 장난기 하나 없었다. 회의가 끝나는 시간은 정말 회
글을 쓴다는 것은 수많은, 스쳐지나가는 생각들 중 몇 가지의 꼬리를 잡고 흔들어 다시 내 쪽을 향하도록돌려세우고 내 모든 궁금한 것들을 꼬치 꼬치 캐물으며 결국엔 그 생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나의 감정을 발견하고 마침내 그 어떤 감정들 보다도 순수한, 자아 의식과 마주하는 것이다. 자아 의식과 마주하기 까지 수많은 복잡한 생각들로 인해 혼잡스러운 상태였을지라도, 내 자아는 여전히 순수하다. 글로서 순수한 자아들은 교감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고 싶다. 나를 둘러싼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 하지만 그것들은 내가 아니다.
혼자서 수능을 한 번 더 준비해야 했던 나는 여유로운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모든 계획은 스스로 세워야 했으나 지키지 않아도 혼내거나 잔소리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 잠들고 싶을 때 잠드는 게 습관이었다. 그러나 입학 후,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너무 많은 일을 해야 하는 대학 생활에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었다. 패기와 호기심에 가득 차 뛰어들었던 신문사 역시 어느새 내가 ‘해내야만’ 하는 일들 중 하나가 되어있었다.한꺼번에 많은 양의 추억이 쏟아진 한 학기가 끝나고 겨우 방학이 되어서야 학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