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에 걸친 축제가 막을 내렸다. 언제나처럼 올해도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로 교정이 인산인해를 이뤘고, 양 캠퍼스에서 각기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많은 학우가 수원과 서울을 오가며 행사에 뛰어들었다. 곳곳에서 녹색 옷이나 소품으로 무장한 이들을 찾는 일 역시 어렵지 않았다. 지난 6일, 입하(立夏)와 함께 초여름의 시작을 알렸던 녹음은 우리 학교의 색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뤘다. 개강 후 다소간의 시간이 지나 한결 한적해졌던 캠퍼스에도 다시금 활기가 맴돌았으며, 공연을 보거나 부스에 참여하기 위한 긴 줄에도 학우들은 서로 장난치고 웃으며
선선한 초여름을 뜨거운 젊음으로 가득 채우는 대학 축제 시즌이 다가왔다. 화려한 축제 시즌의 포문을 여는 건 다름 아닌 우리 학교다. “요즘 축제하지 않니?” “나 학생 때도 싸이가 왔는데.” 흐뭇하게 과거를 추억하는 어른들의 초여름에도 축제의 기억이 배어있나 보다. 풀 내음이 풍겨오면 잔디밭에 슬슬 설치되기 시작하는 무대장치처럼 우리 삶은 변치 않는 것투성이다.변치 않는 것은 오랜 친구처럼 안락함을 준다. 이맘때가 되면 벚꽃이 피겠지, 여름이 오면 하루하루가 맑아 기분이 좋겠지. 당연히 오리라는 믿음과 함께 기대도 설렘도 찾아온다
춥고 두꺼운 벽을 뚫고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며 올라오다.
세차게 비가 오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쨍쨍한 날씨가 이어진다. 변덕을 부리는 봄날의 날씨처럼 하루를 살아가는 나의 태도도 이랬다저랬다 하는 요즘이다. 어느 날은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함이 찾아오다가도, 때로는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싶다는 갈증이 샘솟기도 한다.변덕스러운 날씨, 오락가락하는 내 기분과 다르게 시간은 진득하리만큼 정직하게 흘러간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였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학원 강사 알바를 하러 지하철에 올랐다. 그때부터 꽤 긴 시간을 가야 했기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1년간의 신문사에서의 여정이 끝났다. 막상 마지막이라고 하니 더 열심히 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남는다. 성대신문이라는 그릇을 내가 채우기에는 너무 컸다. 내 능력이 뒷받침 해주지 못했다. 그만큼 부족하고 어린 나였다. 다행히도 선배 기자들과 동료 덕분에 성대신문에서 큰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선배 기자들은 나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주었다. 편향되고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던 나에게 매번 진심 어린 목소리로 내 생각을 수정해 줬었다. 또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쓸 때에도 선배 기자들은 나의 그릇된 생각에 대해서 다그치지 않고 올바
요즘 넷플릭스에 방영되는 “나는 신이다”가 유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음의 질문을 하는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필자는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높은 자살률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종교가 자살률에 미치는 영향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서구의 많은 연구 결과들은 대체로 종교가 자살 생각이나 행동을 줄여주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종교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종교별 차이는 있는지, 그리고 종교를 가진 사람이 낮은 자살률을 보이는 구체적인 이유
'이 세계는 작은 보물로 넘쳐난다. 이 사실을 의식하며 지낸다면 삶에는 늘 보물찾기의 설렘이 함께할 것이다.'-모리사와 아키오『사치스러운 고독의 맛』 중.
‘정중동’은 필자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배운 한자성어이다. ‘정’은 조용함을 의미한다. ‘동’이야 모두 알테지만 움직인다는 뜻이다. 정중동 – 조용함 속에 움직인다는 뜻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정중동'을 요란하지 않되 깊게 흐른다는 뜻으로 새긴다. 사려가 깊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다. 함부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다. 정중동의 사람이 반드시 과묵한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중동'의 가치는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결정할 때 필요한 가치이다. 평소에 말이 많고 떠들석한데 중요한 판단과 결정에서는 사려가
강아지는 자기를 버리고 간 보호자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나의 실수로 보호자를 놓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난달 25일, 작은 돼지 한 마리가 화두에 올랐다. 대구 북구 대현동에서 이슬람사원 건축을 둘러싸고 지속되던 갈등 탓이다. 이슬람사원의 건립을 막고자 하는 의사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교의 교리가 이용된 것이다.이 충격적인 모습은 단지 이번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2021년 2월에 공사 중지 행정명령이 내려진 이후, 대구에 위치한 이슬람사원 건축 부지는 줄곧 법적 공방의 무대였다. 이슬람사원을 건립하고자 하는 신자들과 이를 막고자 하는 주민들 사이의 갈등은 지난해 9월에 이르러 공사를 막지 말라는 대법원
너무도 당연해 그것이 일상이라 느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너무 당연했던 것이었기에 그 소중함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존재할 수 있다. 당장 내일부터 내 모든 일상을 영위할 수 없는 상태에 직면한다면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앞으로의 삶을 위해 어떤 선택을 내릴까.영화 의 주인공 윌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다. 그가 사랑하던 모든 일들은 이제는 더 이상 그의 일상이 될 수 없었다. 그가 사랑하던 자신의 일, 즐겨하던 운동 등 그를 채워온 당연했던 모든 것들은 이제 그의 삶을 채우지 못했다. 그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악기로 서로 다른 음을 내고 그 음들은 하나의 곡으로 수렴한다. 엉망진창이던 첫 합주에서 몇 번의 합주를 거쳐 완벽하게 들어맞는 박자와 음정을 몸소 느낄 때면 짜릿하다. 밴드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2년 전에 동아리에 들어와 그저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처음 베이스를 잡았다. 처음 베이스를 잡았을 땐 내가 맞는 소리를 내고 있는지, 제대로 된 자세를 잡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악보가 지시하는 대로 손을 프렛에 가져다 댄 채 줄을 튕겼다. 나는 그럴듯하게 연주는 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였다.작년
제목 그대로다. 발간 주 수요일 밤, 내 방에서 시도했던 첫 번째 취재후기가 산산이 부서졌다. 지금까지 써온 수많은 내 기사들처럼 편집회의를 거치지도, 체크를 받지도 않으며 단지 내 생각을 적어 내려가는 것인데도 말이다.자자 다시 집중해 보자. 내 취재후기의 제목이 ‘세 번째 취재후기’가 되는 건 전혀 원하지 않는 방향이니까. 여느 때와 같이 발간 주 금요일이 가는 줄도 모르고 내 마지막 부서 기사를 마친 뒤에 마주한 토요일 새벽, 이는 분명히 내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다.돌이켜보면 평범했다. 하루하루 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
저는 지난 30년간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공학의 경이적인 발전을 지켜보았습니다. 짧은 전공지식으로만 알고 지내던 정보들이 거의 불가능할 것 같은 영역까지 진보하는 공학의 성취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습니다. 특히 최근 인공지능 분야의 발전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경지로 발전해가는 추세입니다. 이런 추세는 공학자와 과학자를 자신의 직업적 영역에 좀 더 깊숙하게 매몰시킵니다. 하지만 제가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된 것은 성공적인 직업적 성취만이 인생의 성공이나 행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직업
"Light of Korea"
대학가에서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였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시점이 시험공부로 바빠지는 때와 매년 겹쳤다. 올해 벚꽃은 중간고사 한참전인 3월말에 폈고, 꽃이 거의 진 다음에야 때늦은 벚꽃축제를 진행한 지자체들도 있었다. 동해에서 잡은 명태는 밥상에서 사라졌고, 겨울날 개천에서 썰매 타던 추억도 먼 과거의 일이 되었다. 기후변화는 우리가 일상의 예를 쉽게 찾을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장기적인 기온상승의 원인은 무얼까? 지구에 엄청난 에너지를 보내주는 태양의 활동성이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과거 1만 년 전부터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또래 친구들의 주된 대화 주제는 단연 ‘개그콘서트’였다. 일요일 저녁이면 졸린 눈을 비벼가며 텔레비전 앞을 지키고 앉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시절 개그콘서트는 친구들의 대화에 끼고 싶으면 반드시 시청해야 하는 필수 프로그램이었다. 한 주라도 건너뛰는 때에는 월요일 아침에 쏟아지는 친구들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그 시기를 거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웃음이 곧 문화라는 걸 이해할 터다. 이야기를 나눌 소재, 공감대의 형성, 파생되는 요소들에 대한 향유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비슷한 타이밍에 웃음을
본 칼럼은 영화 의 내용과 결말을 담았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영화 은 감상 직후에는 그 여운이, 다른 매체를 통해 전문가의 해석을 들은 뒤에는 해석에 의한 충격이 크기 때문이다. “아빠한테는 뭐든지 말해도 되는 거 알지? 아빠도 다 해본 거니까 뭐든 얘기해도 괜찮아. 그런 일 있으면 말해줘, 알았지?” 두 부녀가 떠 있는 아름다운 바다와도 같이, 부모의 아량은 한없이 넓다. 이 장면을 보며 나의 삶에 절대적인 지지자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말을 남긴 뒤 아빠가 떠나버린다면
음악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지면이 주어졌다. 음악에 대해 쓸 것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음악이 왜 멋진지 설명해보도록 하자.음악은 어떤 시간을 붙잡아버린다. 지금 핸드폰을 들어 음악을 틀어보자. 3분이든 5분이든 8분이든, 일정한 시간이 제시되고 그 시간 동안 음악은 재생된다. 지정된 시간 동안 지정된 속도로 펼쳐진다. 글을 읽거나 그림을 보는 것과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음악에는 ‘속도’라는 속성이 내재해있다. 글이나 그림은 감상자 자신이 임의로 정하는 속도에 맞추어 흘러가고, 이를 통해 작품이 감상자의
조급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