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년 내내 생활기록부 장래희망 칸에는 언론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진학한 학과와는 무관해 보이지만, 학창 시절 언론에 관심이 많았다. 언론이 제대로 기능한다면 우리 사회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에 언론인을 꿈꿨다. 지금은 언론인의 꿈을 잠시 접어둔 것은 다른 진로를 생각해보고 싶었고, 궁극적인 목표인 더 나은 사회는 다른 직업으로도 이룰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사회에 대해 관심을 갖고, 깊은 생각을 했던 학창 시절과는 달리 대학생이 된 후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 신문과 책을 멀리했으며 놀기에 바빴다. 이런 삶이 스스로
나는 언제나 읽는 쪽이었다. 시인의 멋진 문장을 노트에 옮겨 적어본다거나, 어느 책의 배경에 있는 역사적인 사건을 찾아본다거나, 감상문을 쓰면서 글에 대한 평가를 내려 보는 식이었다. 그렇게 읽히는 글은 모두 완성체로서 일종의 권위를 갖고 있었다. 감히 내가 개입해서 글을 뒤틀거나 문장의 순서를 바꿔보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쓰기와 읽기의 영역은 언제까지나 철저하게 구분되어 왔다. 그 구분만큼 느끼는 단절이 있었다. 금잔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눈에 띄면 챙기는 신문도 마찬가지였다.성대신문에 들어온 데
‘친구 따라 강남 간다’ 우리는 이 속담을 좋은 뜻으로 쓰지는 않는다. 이 속담의 사전적인 정의도 ‘자기는 하고 싶지 아니하나 남에게 끌려서 덩달아 하게 됨을 이르는 말’인 것을 봐도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어찌 보면 내가 성대 신문에 들어오게 된 것도 ‘친구 따라 강남 간다.’와 느낌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정확히는 하고 싶지 않았다기보다 망설이고 있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항상 했던 생각이 체계적이고 번듯한 학교 활동을 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친구가 성대신문에 들어오라고 권유했을 때, 이렇게 가벼운 마음가짐
신문사의 막내가 된 지도 얼추 한 달 반.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다. 마음은 아직 수습에 머물러 있는데 내 몸은 얼결에 준정기자 직함을 달고 기획 문건을 쓰고 있다. 쓰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건지, 삽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긴가민가하며 괜히 선배들의 기획 문건 엿보는 실력만 늘었다. 그래도 매일 신문사에 출근 도장을 찍고 선배 기자들 옆에서 흉내라도 내면 익숙해지기라도 할 텐데 설상가상 들이닥친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마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사태에 대책을 마련하고자 동분서주하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제야 비로소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실 성대신문에 들어온 계기는 꼭 성대신문 활동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대학교에 들어와 생활한 1년 동안과 지원 당시 방학이었던 나의 생활을 돌아볼 때 이룬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달았다. 이러한 나태함을 끝내고 싶어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에 들어온 것이다. 추가수습이었기에 3주 동안 대부분의 일정이 신문사 위주로 돌아가는 것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트레이닝 과정을 밟으면서 그 마음이 점점 사라졌고 마지막 트레이닝 시간에는 드디어 끝난다는 해방감과 이제 준정기자가 되었다는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물었다. 신문사에 왜 지원했냐고. 나의 대답은 항상 길고 거창했지만 핵심은 없었다. 속으로는 ‘그냥’이라고 답하고 싶었다. 모든 일에 확실한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경우도 있다. 나에게 신문사란 그런 곳이다.가벼운 시작은 가벼운 끝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수습 기간 동안 매주 수원에서 서울로 시간 맞춰 이동하고 과제를 제출하며, 하루에 지쳐 집으로 이동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거의 10시가 다 되었을 때 도착하는 일상은 결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글
안녕, 나 지우야! 첫 편지니까 오늘은 내 하루를 전부 차지해버린 성대신문 너! 네게 내 마음을 고백해보려 해.널 만나기 전 사실 오랜 휴학생활로 지쳐있었어. 학교 열심히 다닐 때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는데, 휴학하고 오래 쉬니까 오히려 더 피로하더라고. 역시 나는 바쁜 게 잘 맞는 사람인가 봐. 운명처럼 너를 만나게 돼서 이제 난 더 이상 힘들지도 않고, 살맛 나. 행복해.사실 가끔은 네게 서운했던 적도 있어. 수습 트레이닝으로 많은 과제를 줬던 너... 그 땐 해야 할 게 너무 많다 보니 아주 잠시 우리의 관계가 쉽지 않겠다고 생
이전 기수의 수습일기를 읽으며 지원을 고민했던 게 벌써 6개월 전이다. 3번 고민 끝에 지원했고, 수습기자 트레이닝을 하며 바쁘게 2학기를 보냈다. 원래 이 시기는 방중 활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코로나 19’ 때문에 일정이 변경됐다. 좋은데 슬프다. 고등학교 때 수면 패턴을 따라야 한다는 점과 출근 시간에 지하철을 타야 한다는 점이 처음엔 부담됐다. 그러나 곧 ‘통학러’의 숙명임을 받아들이며 익숙해졌는데 정기 출근이 없어지다니. 공지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럼 이제 뭘 해야 하지?’였다.익숙한 물음이다. 무계획의
“다른 건 몰라도 기자는 안 해요.” 명절마다 뭘 하고 싶냐는 가족의 물음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어쩌면 치기였다. 사회적 성공에 연연치 않으리란 주문이었을지도 모른다.그리고 지금은 성대신문에 있다. 학교에 대한 관심, 글을 쓰고 싶은 마음, 속하고 싶은 분위기를 따라오니 성대신문이었다. 나는 지금 기자가 되고 싶다. 호기심을 원동력으로 틈 없이 확인하는 모습을 지니고 싶다. 무엇보다도, 늘 닳으면서도 이상을 품는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아 벌써부터 자랑스럽다.한 학기 동안 배우며, 닮고픈 모습을 많이 마주쳤다. 끌어
어느 순간부터 내 인생은 담대함의 연속이었다. 수능을 볼 때도, 논술 시험을 치를 때도, 성대신문에 지원할 때도 온 마음을 다해 간절히 바란 것은 하나였다. 늘 담대할 것. 내 앞에 놓인 상황을 담대하게 헤쳐나갈 수 있기를, 비록 결과가 좋지 않아도 담대하게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랐다.어린날의 치기가 더 이상 없는 지금, 어느 순간부터 내 앞으로 불쑥 다가온 현실이 무서웠다. 그래서 내가 더 담대해질 수 있기를 바랐다.준정기자로 지면에 내 이름을 싣는 진정한 신문사 생활을 하기 직전에는 사실 설렘보다 걱정이 더 앞섰다.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기를 품고 사는내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다. 어느 순간부터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는한 권의 책이며 참으로 다채롭다고 생각하게되었다. 그 안에 슬픔이 담겨있을지라도 품고 사는 이야기는 용감하고
나는 하고 싶은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는데, 앞이 막힌 것처럼 보이지 않는 느낌에 무력감에 빠졌었다. 사실 아직도 그 느낌이 생생해서 쉽게 돌아가 버리진 않을지 무섭다.하지만 지금은, 아주 조금이라도 몇 발자국 떨어져서 그때를 돌아보는 느낌이 든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 속에서 알고 있는 대로만 생각하니까 정말 세상이 좁아지더라. 그런 조그만 독방 같은 곳에서 사실은 너무너무 나오고 싶었다.나는 하고 싶은 게 없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해보면서 아직 너무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