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학생회장단 당선자 인터뷰까지 끝내고 나니 정말로 마지막에 다다랐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마지막을 맞아 돌이켜보면 신문사에서의 마지막 학기였던 이번 학기는 유달리 힘들었었다. 첫 발간부터 취재 과정 중 어려움이 있었고, 그 후로도 연달아 실수하면서 많이 위축됐었다. 기획을 준비하고 기사를 쓰면서 많이 울었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음에도 혼자 힘들어하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도 있었다. 다섯 번째 발간 때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발간에 아예 참여하지 못했었다. 할아버지께선 부지런히 살고 조심해서 다니라 손 흔들며 말
수습 기간을 제외하고 학보사 기자로 제대로 활동한 지 꼬박 1년이 됐다. 그래서 지난 일 년은 후회가 없다. 사실 신문사에 진지한 마음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얕은 지식과 관심으로 가볍게 시작한 활동이었기 때문에 부담도, 또 열정도 적었다. 하지만 수습 기간이 지나 직접 기획과 취재를 시작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내 이름으로 기사가 나오고, 신문이 나오기 전까지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우리, 그리고 나뿐이라는 사실이 신기하고 색달랐다. 그리고 신문사에 대한 재미도 점차 커졌다.항상 재밌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쓰고자 하는 것
문장을 쓰는 것은 어렵지 않다. 누구든지 문장을 쓸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당연히 몇 마디의 글을 쓰는 것 역시 쉬운 줄로만 알고 살아왔다. 펜을 들고, 쓰면 된다. 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문득 첫 기사를 맡았던 때가 떠오른다. 문건을 쓰고 검사를 받았다. 편집회의에서 문건을 읽고 피드백을 들었다. 학교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내가 교직원을 만나 인터뷰랍시고 질문을 했다. 알지도 못하는 학우에게 다가가 멘트를 땄다.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고 일러스트 신청도 했다. 고작 8매를 쓰려고 펜을 손에 쥐기 전까
기자가 되고 싶었다. 세상을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 방법으로 나라는 사람을 내던져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어디 위치하는지조차 몰랐던 호암관 3층 성대신문사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학생‘기자’랍시고 하는 기자활동을 통해 나름의 기자 경험을 쌓아가며 기자의 한계가 느껴졌다. 오로지 사실로만 기사를 구성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기자가 사실로써만 세상을 바꾸고 변화를 가져오기가 쉽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이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가진 엄청난 사건이지 않
이번 건기제가 학우들에게 어떤 축제로 기억되길 바라나요? 나의 질문에 김현준 자과캠 총학생회 사무총괄국장은 남은 임기 동안의 마지막 큰 행사인 만큼 아름다운 마무리가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어느새 총학생회에게도 마지막이 성큼 다가왔다. 그의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꽤 오랜 시간 머릿속에 맴돌았다. 우리는 일상에서 늘 시작과 마지막을 경험한다. 그리고 마지막을 맞이하며 지난 과정을 복기하다보면 후회라는 단어가 따라온다.인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있는 한 할아버지가 말했다. “생각해보면 살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다름 아닌 나였습니다.
피아노를 배웠던 적이 있다.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의 시작은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음표들이 빽빽이 나열된 피아노 교본인 하농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화려한 변주가 담긴 연주곡을 연습하고 싶었던 내게 반복적인 멜로디를 하나하나 정확히 연주하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연습을 반복하는 것은 지루했다. 반복적인 연습으로 정확한 음을 짚어내는 기본기를 다지는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초라하고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매주 기획안을 구상하고, 취재를 다니고, 기사를 작성하는 일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과 매우 많이 닮아 있다. 지난 학기의 나를 되돌아
수습 기간 내내 고민하다 결정적으로 사진부에 지원하게 된 계기는 바로 모모이 코너 때문이었다. 한 장의 사진과 짧은 문구로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선을 가져다주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냥 지나칠 수 있던 일상적인 순간들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심오했다. 사진부 기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가 느꼈던 감정과 느낌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지난달 거미줄에 맺힌 물방울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유리구슬처럼 맑고 영롱한 물방울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저녁에 거미가 거미줄을 치기 시작할 때는 분명 허공이었다. 깜깜한 새벽에 묵묵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별 볼 일 없는 나에게 이러한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을 보면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번 호 시각면을 제작하면서 새삼 더 느끼게 되었다. 사진부 부서장이라는 명함이 나를 짓눌렀고 시각면에 대한 부담감은 더해져만 갔다. 시각면을 제작하면서 많은 장소로 떠났었다. 서울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경기도로 떠나기도 했다. 아이디어도 몇 번씩이고 엎었다. 모두 지치고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잘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서 힘들었
또 일이 밀렸다. 토요일 하루 안에 문화면 기사와 배너 문구를 쓰고, 일러스트 세 장에 성대문학상 레이아웃을 짜고 취재 후기까지 쓰게 됐다. 변명은 있다. 어제는 성대문학상 일러스트를 그렸다. 정작 그림을 그린 시간은 두 시간뿐이지만 구상한다고 머리를 쥐어짜는 데 오래 걸렸고, 기사를 쓸 시간도 사흘이나 있었지만 쓸 말이 마땅치 않으니 취재가 끝날 때까지 일단 기다린 것뿐이다. 나는 나름대로 바빴다.사실은 똑같은 변명을 두 학기째 하고 있다. ‘미루지 말자’고 좌우명도 정했건만 조금도 성실해지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일을 미
쓰는 건 쉽지 않다.조판은 늦은 시간에야 끝난다. 집으로 돌아가려면 한강을 건너야 한다. 택시를 타고 강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날. 자정이 넘어서야 현관문을 연다. 아침은 금방 온다. 몇 시간 잠들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다. 나는 돈 버는 게 좋다. 솔직하게 돈 버는 게 좋다. 어느 날은 계산대 앞에 서서 졸았다. 졸면서도 돈 버는 게 좋다.인터뷰를 가면 사람들의 말씨를 곧장 따라 한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눈동자를 꼼꼼히 보고 또 본다. 그때는 잠깐씩, 돈 버는 것보다도 사는 게 좋다. 누군가의 말마디를 따라 삶을 들여다보
나는 인간관계에 있어 존중(尊重)이라는 단어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높이어 귀중하게 대한다’라는 의미다. 이러한 존중은 나의 도량이 좁은 탓에 상호간의 기브엔테이크가 가능한 관계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또한, 이는 몇몇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성인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누군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존중하는 마음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누군가를 존중하는 일은 내가 존중받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하다. 그런 나의 일상에 혐
성대신문에 들어온 지 3학기 째, 나는 사회부의 기사를 준비할 때면 무거운 마음이 앞선다. 내가 직접 정한 주제로 지면을 채운다는 것은 영광스럽다기보다 꽤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 주제를 가지고 이런 방향으로 기사를 쓰는 것이 과연 독자에게 가치가 있을까?’ 기사를 준비할 때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나는 독자에게 가치 있는 기사를 쓰는 것이 학보사 기자로서 해내야 하는 의무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기자인 내가 가진 힘이기에 남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신문이 대다수의 학우에게 중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