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건 외로운 거예요? 사랑이 아니에요? 김형진(행정 18) 삿포로에 갈까요, 같은 말을 내게 건네던 사람들은 전부 멸종했다. 앞으로도 영영 없을 것이다. 사랑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으니까, 뭐, 그런 것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다행히 녹지도 않고 쌓이기만 하는 눈을 맞으며 카모마일 차를 나눠 마시던 순간은 영화처럼 박제되었다. 누군가 내게 사랑해 본 적 있느냐고 물으면 침착하게 이 비디오테이프를 내밀면 되었다. 그 영화에서 나는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나체인 채로 애인에게 안겨 있었다. 어깨에는 눈보다 하얀 이불을 두르고. 밤에
이명 이예찬(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8기) 날카로운 송곳니가 신경을 후비자 죽은 소리 생을 얻는다 독 오른 뱀은 음절과 음절 사이에서 부닥치며 나지막이 노래를 속삭인다 연신 혓바닥을 날름거리던 다리 잃은 짐승 깊은 겨울을 나기 위해 어둡고 습한 곳을 찾는다 달팽이관을 가로 선 얇은 고막 앞에서 조금씩 신음 섞인 독을 흘리며 속귓길을 따라 들어가는 소리에게 미로를 선물한다 사방 막힌 밀실에서 뱀은 똬리를 틀 것이다 어디서 시작한 메아리인지 알 수 없는 소리들의 합창이 들리면 어느새 나도 소리가 되어 음절과 음절 사이에서 요동
성대문학상의 시 부문 응모는 작년에 비해 크게 늘었다. 작년 91명에서 올해 147명이 319편을 응모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대학원생에서부터 외국인 학생까지, 인사캠, 자과캠, 의과대학생 또는 만학도까지 다양한 학생들이 시조, 서정시, 산문시 등 다양한 목소리를 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통제되었던 열정과 몸짓이 시를 통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압박되었던 감정이 너무 깊었던지 시적 언어나 형식을 갖추지 못한 채 날 감정 그대로 토로하는 시가 많았다.릴케는 “시는 욕망이 아니고 사물에 대한 애걸이 아니다”라고 했다. 즉 자기의
가나와 레더라박민혁(사학 14) 00.그것은 낙서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아름다운 무언가였다. 01.가나는 입에 볼펜 크기 정도의 손전등을 물고 있었다. 하얀 불빛이 어두운 굴다리 안에 어른거렸다. 치익, 치이익. 쉬지 않고 스프레이를 분사하는 가나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콘크리트를 뭉쳐 만든 벽에 순식간에 겨울 풍경이 나타났다. 풍경의 안쪽은 비어있었다. 그 위에다가 가나는 하얀 꽃들을 그렸다. 하얀 꽃은 종류가 많았다. 목련과 아까시, 라일락....... 풍경이 꽃들로 가득 찼다. 하얀 꽃은 전부 눈꽃이라고 가나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노다겸(경제 20) “그런데, 어디 있니?” 최은경 씨의 핸드폰으로 또 알림톡이 왔다. 은경 씨는 이제 그 사근사근한 멘트를 외웠다. 아니, 다 외웠을 뿐만 아니라, 똑같은 시간에 온 그 ‘까똑!’ 소리에 “그런데, 어디 있니?”라고 대꾸하기까지 했다.최은경 고객님! 우체국입니다. 윤주선 고객님의 부재로 배달하지 못한 택배가 반송되었습니다. 대구달서우체국. 월성동에 사는 덕분에 달서우체국이 코앞이라 반송 완료 알림이 아침부터 빨리 오는 건 또 누구 속 터지라는 친절인가. 은경 씨는 국밥집에서 밤새 시달린 다리를
체리김주빈(영상 18) 꼭지까지 새빨간 당절임 체리는 꼭 가짜 같았다. 향도 맛도 어딘가 플라스틱 같은 식감도. 사과나 딸기 같은 열매들이 띄는 붉은색은 인간의 부교감신경을 자극해 식욕을 느끼게 한다는데, 케이크 위에 올라간 체리를 보고 있으면 그 부자연스러운 빨간색이 주는 불편함만이 남았다. 어렸을 때는 케이크를 열기가 무섭게 그 체리로 손을 뻗는 동생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많은 어린이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걸 알게 된 건 그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동생은 늘 나를 이겨 먹고 싶어 하는, 전형적인 질투심 많은 계집
빨간 우체통정지상(국문 21) 은선은 자신에게 주어진 안락함을 사랑했다. 그는 부모님의 지원 덕분에 돈 걱정 없이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 그의 가정은 화목하고 평안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들의 대화에서 가정 폭력이나 이혼 이야기가 종종, 주요한 화제는 아니었지만, 맴돌곤 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은선은 가정에서의 평범함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친구가 은선의 안락함을 은근히 부러워할 때, 은선은 말끝을 흐렸다. “그런가.... 이번 아르바이트는 어때, 괜
팬데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코로나19와 함께 살아가는 일은 이제는 새삼스러울 게 없는 평범한 일상이 되고 말았다. 대학도 활기를 회복하고 있다는 것을 작년과 비교해 성대문학상 소설 부분 응모작이 두 배나 증가한데서 느낄 수 있었다.응모작 전편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성장'이었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타자와의 갈등, 낯설고 위협적인 환경을 향한 불안과 공포, 끝내 돌파하고 이겨내지 못했을 때의 퇴행과 분노의 심상을 읽을 수 있었다. 이를 서사화하며 SF, 호러 등의 장르적 상상력을 시도한 작
사랑, 은폐와 소멸의 경계-박찬욱 감독의 영화 (2022)을 보고 고윤숙(일반대학원 유학동양한국철학과 박사과정·5기) 영화의 “눈동자” 바위 꼭대기에서 그 아래로 추락한 기도수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형사 해준의 시선은, 시신 바로 앞에서 응시하듯 카메라 줌렌즈에 의해 매개된다. 시신의 눈동자는 이미 사물을 감각할 수 없지만, 카메라 렌즈는 시신의 눈동자에 비친 형사의 모습을 시각화할 수 있다. 영화적 시선만이 은폐된 진리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음을 선언하듯 영화가 시작된다. 이 영화의
죽음의 세상 속 기억의 생명력- 김멜라 『제 꿈 꾸세요』, 김애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김소희(국문 19) 1. 들어가며 마침내 죽음의 세상이다. 죽음의 얼굴이란 잔인하리만큼 조용하고도 막강해서 전염병의 이름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다 순식간에 우크라이나 국토를 거치고 매일 밤이면 고독하고 슬픈 자들의 방 한구석에 안착한다. 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 생을 마감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나열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알 수 있다. 현시대에는 도처에 죽음들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자살을 극복하기 위한 자살-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 후기 작품론 서론.포르투갈 영화들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이후 젊은 영화광들 사이에서도 페드로 코스타, 미구엘 고메쉬 그리고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 등의 언급이 잦아지고 있다. 이들 사이를 연결하는 포르투갈 영화미학의 계보 중심에 바로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가 있다. 이 글은 계보학의 관점에서 올리베이라를 다른 감독과 연결하는 것을 넘어 감독의 여러 작품들을 유영하며 작가 고유의 텍스트를 통찰해본다. 본론.올리베이라가 80년대 이후로 보여준 영화들은 시간만으로 인물들을 도륙하며 나아
올해 성대문학상 평론 부문에는 열두 명이 쓴, 열여덟 편의 글이 투고되었다. 작년과 비교하면 응모자 수에 있어서나, 응모 편수에 있어서, 모두 두 배 이상 늘었다. 새롭게 탈바꿈한 성대문학상의 평론 부문이 학생들 사이에 알려지고,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 매우 기쁜 마음으로 응모작을 읽었다.문학평론이 다섯 편이었고, 영화평론이 열두 편이었다. 영화를 대상으로 쓴 평론으로 문학상 응모가 가능한가란 질문을 던져볼 수밖에 없었다. 그 답은 비평의 대상이 문학인가 영화인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 쓴 사유의 표현이라는 비평의
김진숙(중문 20) S#1 정오. 도로. 매미우는 소리 청희(여, 27세), 무연(남, 25세) 각각 배낭을 멘 채 캐리어를 하나씩 끌고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 청희, 짧은 탈색 머리를 했고 유행이 지난 낡은 원피스를 입었다. 무연, 히피처럼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딱 붙는 검은 나시티를 입었다. 더운 날씨 탓에 두 사람의 얼굴은 물가의 바위처럼 반들반들 빛난다. 자꾸 뺨에 달라붙는 긴 머리카락을 때어내는 무연. 혈색 좋게 탄 팔을 들어올릴 때마다 겨드랑이의 무성한 털 보인다. 청희와 무연, 들뜬 목소
김현정(영상 18) S#1 2200년, 대학 고고학과 실험실 세 명의 고고학자가 실험실 책상 가운데 놓인 유물을 놓고 연구하고 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형태로 분해된 기계 부품들. 책상의 좌우에 마주보고 앉아 있는 사람들. 예섭(40대)이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으며 그의 말을 옆자리에 앉은 지산(30대)이 받아 적는다. 반대편 빈자리 옆에 앉아 있는 효진(20대). 제 나름대로 노트에 뭔가 그리며 골몰한다. 이내 고개를 든 효진의 시야는 실험실의 북쪽의 수납장으로 향한다. 수납장 한 켠에 자리한
차서영(연기예술 20) *희곡은 사무엘 베케트 원작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오증자 역, 2012, 민음사)를 오마주하는 장면을 포함하고 있다. *극 중 밴드 ‘화성이주반대집회’의 노래는 미미시스터즈의 ‘우리 자연사하자’(2018) 이다. 해당 노래를 모티브로 하여 장면이 창작되었다. *희곡은 안드레이 스나이르 마그나손의「시간과 물에 대하여」(노승용 역, 2020, 북하우스)을 인용하고 있다. 현재 이곳 극장에 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극장에서 해수면 상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그것이 잔소리가 되면 어떠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상투적이기 때문이다. 상투적인 교훈은 의식을 마비시키고 도덕을 썩게 만든다. 루초 폰타나는 조각가였다. 평생 쌓고 세워 무엇을 만들던 그가 어느 날 캔버스 앞에 서서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날카로운 칼로 화폭을 그었다. 작품가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러자 캔버스는 사람의 움직임이 들어가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로 바뀌었다. 화가가 텅 빈 캔버스를 대하며 무엇을 그려야 할까 고민하는 모습은 마치 암담한 현실을 마주한 우리의 처지를 닮았다.
다음 주면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더라. 곧 겨울이다. 사람들은 초겨울이면 낙엽이 죄다 떨어져 마음이 싱숭생숭 하다던데. 날이 추워지면 마음이 오히려 짱짱해진다.11월이면 트는 캐럴처럼, 겨울에는 겨울의 몫이 있다. 반으로 접어 두르는 체크 목도리도, 보들한 니트도, 밖에 나올 때 코를 찡긋거리며 찬 공기 냄새를 맡는 것도, 손을 잡으며 ‘너 손이 왜 이렇게 차니’라고 건네는 말도 모두 겨울의 몫이다. 겨울이 갖고 있는 것들은 꼭 마음에 드는 것만 있어 날이 추워지면 마음이 들떴다. 차가운 공기에 짱짱해져 마음이 잘도 튀어 오른다. 조
19세기 초반 각국 정부가 대학을 사회에서 명민한 구성원들을 양성하는 연구와 교육의 전당으로 탈바꿈시킨 이래, 대학의 연구, 교육 기능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정부와 기업, 그리고 동문들이 대학에 상당한 자금을 투자, 연구자와 교육자들의 대담한 활약을 뒷받침하며, 대학당국은 강의평가와 업적평가를 통해 대학교원의 연구와 교육의 질을 높이는 압력을 행사한다. 대학은 전문직업인, 기업인, 관료와 교원을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학문이 진보함에 따라 때로는 기존 직업의 성격을 현저히 변화시키거나, 아예 새로운 직업을 창출하기도 했다. 의사
‘아프간을 떠났다. 우리 9중대는 작전을 완수했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가 지키려던 조국이 사라지고 훈장도 무용지물이 되리란 걸.’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다룬 2005년작 러시아 영화 의 끝을 맺는 주인공의 독백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제작된 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소련군 병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냉전의 후반부였던 1979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내 친소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 개입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4일 대규모의 소련군이 국경을 넘어 아프가니스탄을
1959년 7월 17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한 언론사가 주최한 '시민 위안의 밤’ 행사가 열렸다. 가수, 배우, 코미디언 등이 공연을 펼치는 일종의 지역 축제였다. 평소 직접 보기 힘든 연예인들이 다수 출연하는 까닭에 3만 명에 달하는 부산 시민들이 행사장에 운집했다.행사가 진행 중이던 밤 8시 15분경 갑자기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단 하나밖에 없는 폭 5m의 출입구(정문)로 쇄도하였다. 무대 뒤로부터 정문까지는 약 150m의 내리막 경사길이었는데 조명을 전혀 설치하지 않아 밤이 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