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은 수많은, 스쳐지나가는 생각들 중 몇 가지의 꼬리를 잡고 흔들어 다시 내 쪽을 향하도록돌려세우고 내 모든 궁금한 것들을 꼬치 꼬치 캐물으며 결국엔 그 생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나의 감정을 발견하고 마침내 그 어떤 감정들 보다도 순수한, 자아 의식과 마주하는 것이다. 자아 의식과 마주하기 까지 수많은 복잡한 생각들로 인해 혼잡스러운 상태였을지라도, 내 자아는 여전히 순수하다. 글로서 순수한 자아들은 교감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고 싶다. 나를 둘러싼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 하지만 그것들은 내가 아니다.
전국 최초로 소방 관련 자격증 3개 분야에서 전부 1급을 취득해, 이름하여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소방관으로 불린다. 어떤 계기로 이 같은 도전을 했는가. 시민들은 잘 모르지만, 소방관은 사실 구급대원, 구조대원 그리고 화재진압대원 총 세 개의 전문 분야로 구성돼 있어요. 현장에 나갈 수 있는 전문 대원들의 수가 분야별로 모두 많다면 가장 좋겠지만, 소방 인력은 현실적으로 많이 부족합니다. 이 때문에 현장에 있는 소방관으로서 골고루 전문성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예를 들어 구급대원이 출동했을 때 화재가 잇따라 일어나거나
자유로운 확장성은 지리학 최고의 장점‘헬조선’ 탈출하려면? 답은 지리적 상상력!지리학은 어떤 학문인가. 저는 지리학을 ‘말랑말랑’한 학문이라 말하고 싶어요. ‘말랑말랑’이란 수식어는 지리학이 가진 ‘자유로움’이란 특성을 강조하는 표현이죠. 인간은 살아있는 한 공간에서 존재합니다. 따라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간 삶의 모든 것은 지리학의 연구 대상이 되며 지리학자는 자신이 연구하고 싶은 주제와 지역을 마음대로 선정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죠. 다른 학문이 대부분 연구에 있어 구체적인 방법론이 있고 그 형식을 지켜야 학문으로서 인정
우리 사회, ‘공간적 감수성’ 열악해학문 분야 상관없이 함양하자지리학은 어떤 학문인가. 제가 생각했을 때 지리학은 공간적 관점을 제공해주는 학문입니다. 근대 이후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학문은 뚜렷한 연구 대상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딱 두가지 예외가 있는데 바로 역사와 지리입니다. 역사와 지리는 다른 학문과 달리 정해진 연구 대상을 갖지 않습니다. 역사학자와 지리학자는 다양한 대상을 연구하죠. 역사와 지리는, 그 자체로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보는 ‘관점’인 것입니다. 특히 역사는 시간적 관점, 그리고 지리는 공간적 관
지리학은, 산 너머에 혹은 강 건너에 사람이 살고 있는지 그 사람은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묻는 학문이었다. ‘거기 있는 너’는 누구인지를 궁금해하는 학문이었다. 거기 있는 너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며 비로소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학문이었다. 그저 우리 삶을 이야기하는 학문이었다. 때문에 어려울 수 없고 지루할 수는 더더욱 없는 학문이었다.아쉽게도 과거형을 쓰는 것은지금은 아니라는 말인데, 이후 만날 두 명의 지리학자,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왜 과거형을 쓸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지리학자들은
『왜 지금 지리학인가?』 HOT BOOK 코너를 맴돌던 기자의 눈에 포착된 이 질문은, 외면하기에는 강렬했다. 하지만 이내 소비자로서 합리적 의심을 해본다. 교양 도서라는 수식어를 달고 나온 수만 가지 속에서 눈에 띄려면, 강렬한 제목 정도야 뭐. 과장되게 말하자면 HOT BOOK이 갖춰야 할 미덕과도 같다. 때문에 ‘미안하지만 너를 들어줄 순 없겠다!’하고 뒤돌아서려 했으나 왠지 그럴 수 없음에 집으로 데려와 침대 맞이에 모셔놓아 본다.소재다, 소재. 소재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왜 지금 역사인가, 왜 지금 도덕인가도 아닌 왜
보도면 비판해 달라. 1면의 힘이 너무 약해요. 독자가 다음 장을 넘길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 없단 거죠. 1면에선 등록금이나 수강신청같이 독자들의 이목을 확 끌어당길 수 있는 소재를 다뤄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리모델링 소식처럼 단순 사실을 전달하는 기사는 뒷면에서도 다룰 수 있잖아요. 1면에 이런 기사가 있으면 그저 ‘아, 그런가 보다.’ 생각이 들 뿐 다음 장까지 흥미가 생기지 않죠.학술면 비판해 달라. 북한학처럼 우리 학교와 관련이 적은 분야보다는 우리 학교에 개설된 학과, 우리 학교가 연구 중인 분야 같은 주제를 우선으
평소 성대신문을 즐겨 보는 편인가.생명공학관에 있는 프린터기를 자주 사용하는 편인데 그 옆에 성대신문이 비치돼있어 그때마다 종종 신문을 집어 든다. 최근에는 총학생회 선거 관련 기사들을 유심히 보았는데 인사캠 소식까지 전해 들을 수 있어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생명공학관 외에도 접근성이 좋은 곳에 더 많이 비치됐으면 좋겠다.성대신문 기자가 된다면 써보고 싶은 기사가 있나.대계열에 속해있는 1학년 학생들이 전공 진입에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학과마다 자세한 설명을 담은 기사를 써보고 싶다. ‘어떤 과인지 잘 모르고 왔다’고 말하는 학우
왕 위의 왕, 실세 간신조선 전기의 윤원형은, 조선 시대에 권력을 전횡한 대표적인 권신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외척이었다. 외척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권력과 가까운 존재였다. 명종이 즉위한 때부터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20년 동안 윤원형은 권력과 재력을 독점했다. 그의 권력은 국왕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는 이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그때 그가 얼마나 큰 권력을 행사했는지는 명종실록에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하루는 주상이 내관에게 “외척이 큰 죄가 있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라고 말했는데, 윤원형을 가리
흔히 ‘간신’이라 하면 양의 탈을 쓰고 ‘네네!’만 반복하는 예스맨이 떠오른다. 권력의 부스러기라도 주워볼까 하며 알랑대는 2인자 아첨꾼 말이다. 하지만 이런 간신은 간신의 한 분류에 불과했다. 앞서 보았듯 역사 속 간신 중에서도 아첨꾼의 수준을 넘어 왕권을 유명무실하게 만든 ‘실세’ 간신도 존재했다. 군주 한 사람에게 모든 법적인 권력이 부여됐던 전통 사회에서는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외척정치, 환관 정치부터 수렴 청정제가 이뤄지기도 했다. 왕 뒤의 실세 간신들로 인한 폐단은 고스란히 민중들의 몫으로 돌아왔지만, 정치·경제로부
우리 학교에 어린이집 및 수유실 등 학내 구성원이 이용할 수 있는 보육시설이 마련돼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우리 학교에 근무하는 교직원은 2016년 대학정보공시를 기준으로 교원이 5202명(비전임 포함), 직원이 414명(계약직 포함)으로 총 5616명에 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교 인사캠과 자과캠 내에는 교직원과 원우들을 비롯한 교내 구성원이 이용할 수 있는 보육시설이 설치돼 있지 않아 구성원들이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 학교 일반대학원 무용학 박사 과정을 졸업한 한 동문은 “재학 시절 교내에 아이를 맡
시골 소년, 친숙한 것이 좋아 “어린 시절을 떠올리니 문득 할미꽃이 생각나요. 지천으로 할미꽃이 참 많았었죠.” 경북 안동 출신인 이 동문은 말 그대로 시골 토박이였다. “산에서 삼촌들과 토끼몰이도 하고 낙동강 강변에서도 자주 놀았어요.” 어디를 둘러봐도 푸른 자연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어릴 적 꿈은 많은 나무를 키우는 농장주가 되는 것이었죠.”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듯 순수한 꿈을 간직한 시골 소년도 어느덧 대학 진학을 앞둔 청년으로 성장했다. “부모님께선 취업을 고려해 공대 진학을 권유하셨죠. 하지만 제 성격상
수중고고학은 바다를 포함해 △강 △하천 △호수 등 물속에 잠겨버린 유물, 즉 수중문화재를 연구하는 고고학을 의미한다. 그 중에서도 바다에 침몰한 배와 배에 실려있던 각종 유물이 수중고고학의 대표적인 연구 대상이다. 이러한 수중고고학이 고고학의 한 분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불과 약 60년 전이었다. 1943년, 수중 호흡기인 스쿠버가 개발되고 50년대에 이르러 스쿠버 다이빙이 수중 스포츠로서 널리 알려졌다. 그에 따라 깊은 바닷속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된 사람들은 매몰돼있던 난파선과 유적들을 목격했다. 그들은 그 가치를 쉽게 알아
이전에 육상고고학을 연구했다고 들었다. 육상고고학과 비교하여 수중고고학만이 가진 매력은 무엇인가. 수중고고학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유물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이에요. 유기물의 경우, 육상에서는 산소에 노출돼 모두 썩어버리지만, 갯벌에서는 산소가 차단돼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죠. 예를 들어, 마도 3호선 발굴 당시 갯벌에 묻힌 생선뼈가 발견됐는데 생선뼈 사이에 살이 다 붙어 있었어요. 또 신안선에서는 후추랑 여지 씨가 나오고, 곡물을 운반했던 마도 1·2호선에서는 △보리 △쌀 △콩 같은 유기물들이 대량으로 발견됐죠
독일 통일의 뼈 아픈 교훈1989년 11월 10일 아침, 30년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리곤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90년 10월 3일, 동독과 서독은 마침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통일은 서독이 분단 이래 오랫동안 통일을 위해 치밀하게 노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사회에 많은 문제점을 양산했다. 먼저, 실업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사회주의경제 체제에서 살아온 동독인들은 자본주의 기업들이 물밀 듯 들어오는 통일 독일의 사회에서 갑
전통주는 가양주(家釀酒)와 그 문화로부터 비롯된다. 가양주는 말 그대로 ‘집에서 빚은 술’을 의미한다. 전통주의 전성기라 불리는 조선 시대에는 집집이 직접 빚은 술이 있었을 정도로 술은 선조들의 삶, 그 자체였다. 불교 사회였던 고려 시대에는 승려를 중심으로 한 술빚기가 이루어져 사찰에서 빚은 술을 일반에 공급하는 것이 주된 풍토였다. 반면 유교 사회인 조선 시대에서는 조상숭배와 추수 감사제, 명절과 같은 세시풍속을 중시함에 따라 집마다 제사와 같은 가정 행사에 이용하기 위해 술을 빚는 우리의 고유한 가양주 문화가 널리 퍼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