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영재 편집장 (ryuno7@skkuw.com)

 가을은 멜랑콜리의 계절이다. 어느새 차가워진 밤공기와 칙칙한 색으로 변해가는 나뭇잎들은 죽어 있던 우리의 감성을 몰래 되살린다. 페이스북 담벼락에는 요즘 들어 우울하다고 호소하는 글들이 부쩍 늘었다. 물론 누구나 멜랑콜리만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꽉찬 느낌을 들게 하던 여름이 지나고 세상에 빈 공간을 조금씩 만들어나가는 가을이 왔기에, 그 허전함을 무엇으로라도 채우고 싶어 선택한 것이 숙고와 성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올 가을에 선택한 주제는 바로 ‘믿음’이다.

필자는 예전부터 ‘다 의심해!’라는 철학자들의 조언에 매료됐다. 그들이 말한 의심이라는 것은, 인간의 무지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지적인 욕구를 채우는 방법이었다. 또한 순진한 믿음이 깨질 때 생기는 큰 상실감과 좌절감을 대비하는 예방주사로 여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의심도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오남용을 할 때는 믿음이 지니는 가치를 전혀 활용할 수 없고 삶이 한없이 무기력해지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단어 자체가 지니는 부정적인 어감도 무시할 수 없다.
 
이에 비해 믿음이 지니는 가치는 무엇인가 하면, 편리함과 효율성과 같은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다. 믿음의 가치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염려하느라 하지 못하는 모든 활동의 가치를 모두 합한 것과 같다. 누군가가 오늘 죽을 경우의 수는 너무나도 많은데(교통사고부터 심장마비까지 수많은 요인이 있지 않은가), 그런 요인을 모두 그리고 매일같이 염려했다간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믿는다. 그런 끔찍한 사고는 전부 남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나쁘지 않다. 그런 사고방식이 비로소 우리에게 조금은 안락한 생활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렇듯 믿음과 의심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잘 배합해서 사용해야 한다. 둘의 성격은 의약품과 같아서 경우에 따라 적절히 사용하면 매우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적절한 배합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역사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의 몇몇 집단에서도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하곤 한다. 한 예로, 몇몇 종교의 종교인들이 비판을 받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의심이 허용되지 않는 절대적인 믿음 때문에, 즉 외집단에 대한 관용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관용’의 어원이 종교에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지 않는가). 사회 전체적으로도 효율성에 높은 가치를 두는 경향이 있어서인지 의심보다는 믿음에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 같다.
 
20대의 중요한 관심사인 연애로 주제를 잠시 옮겨보자(20대와 가장 가까운 소재가 연애가 아닐까하는 생각에서다). 나는 상대방을 진정 사랑하는지, 상대방은 나를 진정 사랑하는지, 연애를 한다면 당연히 궁금하지 않은가. 그런데 왠지 모르게 그 무엇도 의심해선 안 될 것만 같다. 또 그러는 게 편할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이 서로에 대한 무한한 믿음으로 이뤄진다는 말은 연애를 한층 더 아름답고 환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믿음이 불가침의 영역으로 변한다면, 그것은 실금에도 전체가 무너질 위험에 처하는 허약한 것이 되고 만다. 과도한 믿음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집착’이 된다. 왜 사랑하는지 자꾸 묻다보면 간단한 봉합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처가 가끔 생길 수 있다. 그렇지만 나중에 회복시킬 수 없는 치명상으로 나타날 확률은 훨씬 낮아진다. 믿음의 원리는 바로 이런 것이다.
 
물론 믿음을 한 발짝 뒤로 옮기는 것은 처음에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사랑에서의 믿음을 조금 해제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결코 여러 발 뒤로 옮길 필요는 없다. 한두 발짝부터 옮겨보면 어디쯤에 발을 둬야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 흥미로운 주제부터 시작하는 편이 좋다. 지금이 바로 기회의 시간이다. 가을이다. 말(馬)뿐만 아니라 사고도 살이 찌고 풍요로워지는 계절이다. 수많은 생각의 주제들 중에 ‘믿음에 관하여’를 넣어보고 다른 것들과 조합해보면, 아마도 훨씬 즐거운 가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