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운(정외11)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대성로 자보판을 지나다보면 한때 고급찌라시 열풍을 일으켰던 곳에 평소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책자가 ‘미생(未生)’이라는 이름으로 놓여있다. 조선시대 같은 디자인의 표지에 바둑용어에서 따온 이름까지 어우러져 바둑 주간지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정헌 교지편집위원회’라는 명의를 찾을 수 있다.
처음 정정헌이라는 이름을 들은건 내가 새내기였던 2011년 4월쯤이었던 것 같다. 당시 페미니즘에 관해서 학글 과제를 하고 있던 내게 페미니즘에 관련된 책을 빌려주겠다며 선배가 나를 정정헌 편집실로 데려갔었다. 사실 당시엔 그 후레한 방이 도대체 뭐하는 곳인지 몰라 선배에게 물었더니 여성주의 교지를 만들던 곳이라고 했다. 그때 여성에 대한 억압을 고발하는 대학생의 목소리였던 정정헌을 언젠가 다시 살려보겠다는 선배의 원대한 포부를 듣기도 했다.
미생의 머리글에도 나와 있듯이 ‘정정헌(貞靜軒)’은 대감집 내에 여성들이 모여서 그들만의 담소를 나누던 공간을 이르는 말이다. 성균관에서 정정헌을 이름으로 한 교지가 처음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71년이었는데 한국에 있는 대학에서는 최초의 여성주의 교지라 한다. 정정헌을 처음 만들었을 때는 페미니즘에 대한 학술적인 글 보다는 성균관을 다니는 몇 안 되는 여학우들의 고충과 생각을 나누기 위한 교지로 다양한 이들의 수필과 여성주의에 관련된 기사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80년대에 들어 여학우들이 늘어나고, 대학 내에 페미니즘이라는 학문이 전파되면서 보다 학술적인 내용을 담게 되었고 70년대에 담았던 개인적 내용을 넘어서 사회에 존재하는 많은 성차별 문제들에 대해 심도 있고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하는 교지가 되었다.
‘무려 40년이 넘었는데 왜 우린 처음 보느냐’ 의아해할 수도 있다. 당시 학교를 다녔던 선배들의 말에 의하면 인력이 부족하고 학교의 지원이 끊기면서 2003년부터는 간간히 소식지를 냈을 뿐 사실상 정기호를 내기에는 무리였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지금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우들은 정정헌을 접하기가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지난 여름방학 내게 정정헌을 소개해준 선배로부터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교지를 출판해줄 출판사와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정정헌과 계약한 출판사는 사회문제를 고민하지만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학 교지를 싼 값에 출판해주는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출판계약에 이어 삼성과의 광고계약도 따내면서 출판비용까지도 확보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편집자들이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여 드디어 정정헌 정기 33호가 탄생한 것이다.
과거의 정정헌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하고, 정정헌 편집위원이 아닌지라 그 의도도 알 수 없지만 이번 33호는 이전의 학술적이고 어렵던 정정헌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여휴의 진실’과 같이 성균관을 다니는 여성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하지만 공개적인 자리에서 터놓고 얘기하지는 못하던 ‘명륜동의 밤길’과 같은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담고 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여성상위시대라는 말이 들려도 정작 그 단어가 우리들의 가슴에 와닿지 못하는 불편한 진실에 가하는 일침이 읽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지금 정정헌은 편집위원 두 명과 한 명의 편집장, 이렇게 세 명만으로 운영되고 있어 정기호 하나를 내기에도 빠듯한 상황인데다가 두 명의 졸업이 코앞이라 이들이 가고 나면 가까스로 부활한 정정헌은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지금 정정헌에서는 편집위원을 모집 중이라고 하는데 아직 정정헌을 접해보지 못한 학우들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난항을 겪고 있는 것 같다. 정정헌 위원이 되어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정헌의 취지에 동의하는 한 학우로서 나와 같이 33호 미생을 읽어보고 문제에 공감한다면 편집자들이 계속해서 힘낼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보내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