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개인전 스케치

기자명 권세진 기자 (ksj4437@skkuw.com)

<수트레인(Souterrain)> / 아트선재센터 제공
2층 전시실의 입구는 조각난 거울들로 만들어진 낮은 천장의 통로다. 이것은 전시장으로 들어가는 문이자 하나의 작품인 <수트레인(souterrain)>이다. 외부세계와 이불의 작품세계를 잇는 이 조형물을 지나면 앨리스처럼 이상한 나라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전시장을 둘러싼 검은 휘장은 마술쇼를 연상시키며 비현실감을 더한다. 전시장의 천장과 바닥은 모두 거울로 이뤄져 있어 관객은 내가 서 있는 곳이 땅인지 천장인지 헷갈리게 된다. 그곳은 거울들이 향연을 벌이는 공간이다. 사방에 늘어서 있는 거울들은 자신의 형상을 여기서도 저기서도 반사한다. ‘반영’을 주제로 한 전시답게 세 작품에는 모두 거울이 이용됐다.
<벙커(Bunker)>(왼쪽), <수트레인(Souterrain)>(오른쪽) / 아트선재센터 제공

전시실 한가운데 놓여있는 검은 덩어리는 <벙커(Bunker)>다. 내부는 동굴처럼 비어있고 내벽은 조각난 거울들로 뒤덮여있다. 그곳에서 관객은 거울에 비친 수많은 ‘나’를 응시하게 된다. 작품 안에는 헤드셋이 하나 설치돼있다. 그 헤드셋을 끼고 기침을 하거나 발을 구르면 그 소리와 진동이 동굴 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공명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치 무의식의 심연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 작품은 조선의 마지막 왕손 ‘이구’의 삶을 형상화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조선 왕조 복원 사업을 명분으로 미국에서 건축가로 활동하던 그를 강제소환 했다. 평화로운 인생을 원했으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운한 삶을 살다 간 그는 이불에 의해 암울한 검은 덩어리로 재탄생했다. 이 작품을 통해 현재와 과거는 소통하고 있다. 현재에 관객이 내는 소리와 과거 이구의 삶이 서로 공명하는 것이다.
<비아 네가티바(Via Negativa)> / 아트선재센터 제공

<비아 네가티바(Via Negativa)>는 거울로 만들어진 미로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미로는 벽면이 온통 거울로 도배돼있어 더 어지럽게 느껴진다. 그 거울들에 비친,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들 사이에 서 있으면 관객은 ‘진짜 나는 누구인가?’하는 의문에 휩싸일 것이다. 이 미로에 출구가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 때 쯤 미로의 끝이 나온다. 그곳에는 네온사인을 연상시키는 백열전구들이 나열해있고, 거울은 그 형상을 무한히 복사해낸다. ‘비아 네가티바’는 부정(不定)을 통해 일반적이고 관습적인 사고를 뛰어넘는 길을 뜻한다. 여러 명의 ‘나’가 동시에 존재하는 조그마한 미로 속은 초현실적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자신이 알고 있던 익숙한 세계가 부정당한다. 그래서 관객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3층 전시실 내부 / 아트선재센터 제공

3층에는 이불이 그간 기획하고 전시해왔던 작품들의 스케치와 모형 220여 점이 망라돼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가 끊임없이 고민했던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다. 작은 스케치북 위에 휘갈긴 메모들이 그가 치열하게 창작활동을 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일반적이지 않은 소재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특이하다. 예를 들면 기념비를 뜻하는 <모뉴먼트(Monument)>라는 작품이 있다. 기념비라고 하면 보통 생각하는 단단한 재료 대신, 거대한 풍선을 이용했다. 그는 항상 일반적 통념에 부합하는 ‘소재’에 반발하고 그것을 뒤엎는 작품을 기획해낸다.
3층 전시실의 바닥에는 나무판자를 이리저리 끼워 맞춰놓았다. 이는 퇴적 지층인 ‘홍적층’을 상징한다. 그의 창작물들이 이제껏 지층처럼 쌓여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관객들이 지금 서 있는 그 전시실도 언젠가는 이불이 쌓아가는 홍적층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불의 손에 의해 탄생한 그 퇴적층 위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소통하고, 작가와 관객이 공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