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영(사학11)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박노해 시인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에 수록된 시 제목이다. 시가 말하듯 사람들은 오래된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빈티지 스타일을 좋아하고, 김광석과 유재하에 열광하고, 과거의 감성을 사랑한다. 추억을 아름답게 여기고, 기억을 소중하게 여기며, 시간의 흐름을 지닌 것에 아름다움을 넘어서 경외감을 보이기도 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오래된 것은 헌 책이다. 누런 손 때, 특유의 낡은 냄새, 책장 사이사이의 은근한 먼지까지, 헌 책이 지닌 모든 것은 어딘가 모르게 기분을 좋게 만드는 힘이 있다. 혹자는 ‘헌 책을 읽는 것은 과거와 대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게도 헌 책은 과거의 누군가와 시공간을 초월하고 마주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과거의 누군가가 책에 남겨놓은 흔적을 통해 그에 공감하기도 하고 의문을 갖기도 한다. 헌 책은 단순한 독서를 넘어서 보다 넓은 사유의 과정을 경험하게 해준다.
얼마 전 과제에 참고할 책을 빌리기 위해 서고 도서 대출을 신청 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오래된 책이 내 손안에 들어왔다. 서고 도서 대출을 몇 번 해 봤고, 도서관에서 오래된 책을 빌려본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헐어버린 책을 찾은 적은 없었다. 책장은 노랗다 못해 갈색 빛을 띠었고, 양장 제본이 되어 있었지만 세월의 흐름을 정면으로 마주했는지 군데군데 찢겨진 겉 표지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책을 펼치면 종이 낱장들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아슬아슬함을 지녀 함부로 펼칠 수 없었고, 책장 마다 누군가의 연필자국이, 형광펜이, 메모가 남아 있었다. 책의 가장자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 때로 얼룩져 있었고, 군데군데 알 수 없는 자국들이 있었다. 그 책의 맨 뒤에는 도서관 대출 시스템이 컴퓨터화 되기 전, 손으로 쓰여진 대출 카드가 작은 봉투 안에 담겨 있었다. 그 카드 안에는 87년 겨울의 경영학과의 선배님도 계셨고, 91년 봄에 농?경제학과를 다니셨던 선배님도 계셨다.
물론 과제를 할 때 헌책을 마주하는 기쁨은 수 년 전 나와 같은 과제를 한 사람이 적어 놓은 메모, 밑줄, 흔적들로 보다 쉽게 실마리 찾으며 오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헌책의 가장 큰 매력은 앞서 말했듯 잠시나마 내가 생각이란 것을 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태어나지 조차 않은 그 시기에 나와 같은 책을 읽었던 사람들을 헌 책을 통해 만나게 된다. 87년에 이 책을 읽으신 경영학과 선배님도, 91년 봄의 농?경제학과 선배님도, 2012년 가을의 나도 같은 글을 읽는다. 같은 것은 책에 쓰여진 글뿐이다. 모두들 다른 시간에, 다른 공간에서, 다른 생각을 한다. 책의 모습도 시간이 흐르며,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변화한다. 다른 생각을 지닌 여러 사람의 손을 탄 책은 어떤 사람의 삶의 한 조각 중 하나라 말할 수 있다. 거꾸로 책은 많은 사람들의 삶의 조각이 합쳐진 그림이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지금으로부터 딱 30년 전, 그 때 세상에 나온 이 책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라는 생각에 까지 이르게 한다. 이 별 것 아닌, 그저 몇 초에 지나지 않는 생각의 고리는 뭔지 모를 감정으로 나를 벅차게 한다. 헌 책은 사유 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살고 있는 내게 숨통을 틔우는 일종의 매개체가 되곤 한다. 그래서 나는 헌 책이 좋다. 굳이 말하자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달까?
새로운 것이 끊임 없이 창조되는 요즈음이다. 출판계에도 E-book을 비롯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헌 책방이 큰 인기를 끌고 있음을 발견한다. 부산의 보수동 헌책방 거리는 부산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고, 강남역 한복판에는 큰 규모의 헌책방이 생겼으며, 얼마 전에는 대명거리 끝에도 헌책방이 생겼음을 볼 수 있다. 사람들 모두 손끝에 느껴지는 종이 책의 낭만을 잊지 못한 것이 아닐까? 낭만의 계절, 가을이 지나고 있다. 낯 간지럽지만 ‘가끔 종이에 손을 베일 지라도 책장을 넘기기 전의 두근거림이 좋아’라고 말할 수 있는 이 낭만적인 시간이,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 곧 연말이 되면 화려함으로 치장되는 서울의 낭만의 시간은 저물어 갈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이 낭만을 책과 함께 보내는 것은 어떨까? 설사 헌 책이 아니더라도, 얇디 얇은 책이라도, 책과 함께 이 가을의 끝을 맞이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