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만화가 윤승운

기자명 권세진 기자 (ksj4437@skkuw.com)

굽이굽이 펼쳐지는 긴긴 겨울밤, 머리맡에 명랑만화를 잔뜩 쌓아놓고 흐뭇해한 적이 있는가? 뜨뜻하게 데워놓은 장판 위에 배를 깔고, 손가락에 침 묻혀가며 만화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기쁨을 기억하는가? 낄낄거리며 귤이라도 까먹으면 금상첨화다. 이 기억 한 켠에는 아마도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겨울밤의 지루함을 달래주던 말썽쟁이 학동들과 맹꽁이 훈장님은 윤 화백의 펜 끝에서 탄생했다. 『맹꽁이 서당』외에도 △『겨레의 인걸 100인』 △『두심이 표류기』 △『요철 발명왕』 △『탐험대장 떡철이』 등 어린이를 위한 명랑만화를 40년 넘게 그려온 윤 화백을 만나봤다.

김지은 기자 kimji@
권세진 기자(이하 권) : 어떻게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셨는지.
윤승운 화백(이하 윤) : 나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어른들이 그러시더라. 옛날에는 애가 벽에 낙서해도 안 지우고 놔두는 게 보통이었다. 내가 초등학생이 됐을 때도 집 벽에 그림이 남아있었던 기억이 난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미술 시간이 제일 기다려졌다. 미술 빼고는 산수고 뭐고 공부는 다 싫어했다. 하지만 따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개구쟁이처럼 장난치고 싸우기도 하고 자유분방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림으로 먹고살아야겠다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한 것은 중학교 이후였다. 당시에는 만화를 그리다 들키면 공부 안 한다고 담임선생님한테 따귀도 맞고 그러던 시절이다. 그래도 그림을 꾸준히 그렸고, 어떻게 알게 돼 신문에 독자투고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만화가 뭔지도 모르고 그려댔다. 그러니 몇 달을 보내도 안 실리더라. 일단 재미가 없으니까. 초짜들 실력이 거기서 거기 아니겠나. 처음에는 신문에 나오지도 않다가 6개월 정도 꾸준히 만화를 보내니까 성의가 갸륵한지 실어주긴 하더라. 한 5년 독자 투고를 했다. 그러다 <아리랑> 같은 대중 잡지에 만화를 연재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권 : 24년간 연재하신 『맹꽁이 서당』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윤 :
『맹꽁이 서당』은 어영부영하다 운이 닿아 그리게 된 것이다.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일이다. 할아버지 댁에서 지내다가 책꽂이에 꽂힌 역사책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역사책이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이때부터 조선왕조에 대해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어렴풋이 들었다.
하지만 데뷔 초기 20여 년간은 현대물을 했었다. 아이들이 동네에서 놀면 공놀이하다 옆집 유리창도 깨고, 담장도 넘어가고 하는 장면을 그려온 것이다. 그러다 아파트 세대가 시작되며 언제부턴가 이 풍경이 없어졌다. 그런 만화를 더는 그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고전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갓과 상투를 그릴 줄 알고, 역사적 지식만 있으면 꾸준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웃음)
그러다 <보물섬>이라는 잡지에서 청탁이 들어왔다. “시대적인 것 한번 그려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더라. 그래서 이성계 얘기를 그려 갔다. 처음에는 사실 위주로 조금 건조하게 그렸다. 그런데 재미가 없다며 퇴짜를 놨다. 그래서 생각한 게 만화 속에 서당을 만들어 훈장님이 옛날얘기 해주듯 하는 방식이었다. 서당 애들이 말썽부리는 것도 집어넣어 재미를 더했다. 그게 ‘맹꽁이 서당’이다. 82년에 시작된 것이 15권까지 이어졌다. 길게 연재하리라는 생각 없이 그냥 출발했는데, 하다 보니 이렇게 오래된 것이다.

권 :『맹꽁이 서당』 주인공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나요?
윤 :
등장인물을 자식으로 치면, 나 같은 경우는 그려놓고 내팽개친 축이다. (웃음) 예를 들어 『맹꽁이 서당』에 장쇠라는 아이가 나온다. 서당에 늦깎이로 들어온 덩치 큰 학동이다. 그런데 깜빡하고 한동안 장쇠를 등장시키지 않아 독자들로부터 “왜 장쇠를 안 그리느냐”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맹꽁이 서당』 주인공들을 아주 사랑한다.
등장인물은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훈장은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살이를 하던 사람으로, 조정에서 바른 소리를 하다가 미움받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선비로 캐릭터를 잡았다. 훈장 하면서도 애들 야단 많이 치고, 회초리로 때리고 하는 것을 보면 고지식한 성격이 드러난다. 내가 유기견들을 데려다 키우는데 벌써 열다섯 마리다. 늙은 개도 있고 젊은 개도 있는데 다 가엾다. 이 개도 예쁘고 저 개도 예쁘다. 만화 등장인물도 강아지 새끼하고 똑같은 것 같다. 서당 훈장, 학동들, 박 첨지 하인 마당쇠. 다 똑같이 사랑한다.

ⓒ웅진 주니어

권 : 만화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윤 :
나는 어린이를 위한 명랑만화를 계속 그려왔다. 내 뇌리에는, 만화라면 어린이가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박혀있다. 아이들이 만화 속 학동들의 장난과 말썽을 보고 웃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선배 만화가들이 그렸던 것을 보고 웃었던 기억이 머릿속에 있다. 그걸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거다. 보고 재밌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웃음만 남지는 않았으면 한다. 만화에는 왕조의 역사도 들어 있지만, 종종 숨겨진 인물을 조명해볼 때도 있다. 의롭게 살던 사람, 불의한 사람, 고지식하게 자기 일을 하는 사람 등 실존 인물의 면면에 관해 이야기한다. 공자가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 했다. 세 사람이 같이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뜻으로, 어디라도 자신이 본받을 만한 것은 있다는 말이다. 만화 속 인물들의 좋은 면, 나쁜 면을 보고 어린이들이 느끼는 점이 있었으면 좋겠다.

권 : 요즘의 만화가, 혹은 만화가 지망생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윤 :
과거의 만화와 현재의 만화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요즘 만화가들을 보면 우리 사고방식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 같다. 그 중에는 양영순의 <누들누드>, 김진태의 <시민쾌걸> 등 “우리도 저렇게는 못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만화도 있다. 그런 것들은 그림이 크고 시원시원해서 좋다. 우리 때는 만화 속에서 이야기 늘어놓기를 잘했는데 요즘은 글자가 적어지고 그림이 많아졌다.
당부하고 싶은 점은 ‘오리지널리티’, 창의성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본 만화 화풍을 따라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스스로의 만화적 아이디어가 풍부한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으면 좋겠다. 초짜일 때는 나나 여러분이나 생각하는 수준이나 그리는 수준이 다 비슷비슷하다. 천재 같은 것은 없다. 나도 스무 살 무렵에는 고민이 많아 <꺼벙이>를 그린 선배 만화가 길창덕 씨한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만화를 그리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그런데 다 자기 노력에 달린 것 같다. 노력해도 작가가 안 된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쓸 수 있는 정력은 다 쏟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이 운이다.

김지은 기자 kimj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