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메트로 2033』 리뷰

기자명 권세진 기자 (ksj4437@skkuw.com)

전쟁으로 지구 위에 핵폭탄이 떨어져 지상에는 사람이 살 수 없게 됐다. 인류가 숨어들어 간 곳은 다름 아닌 지하철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메트로 2033?은 핵전쟁 뒤 방사능과 방사능 오염으로 생겨난 괴물들을 피해 모스크바의 지하철 노선에 서식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책의 서문에는 지하철 역사에 붙은 벽보 내용이 등장한다. “모스크바 시민 여러분, 그리고 모스크바를 찾은 관광객 여러분! 모스크바 지하철은 평상시에는 교통수단으로 쓰이지만 비상시에는 대피소로 쓰입니다.” 저자 드미트리 글루코프스키는 복잡하게 얽힌 모스크바의 실제 지하철 노선도를 바탕으로 지구 멸망 후의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켰다.
책 속에서는 대부분의 인류가 핵폭탄에 의해 싹쓸이되고, 살아남은 소수의 인간만이 시궁창의 쥐처럼 지하에 옹기종기 모여 살아간다. 번영의 시절 지구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문명의 이기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질긴 생명력을 가진 인류는 다시 원시상태로 돌아가는 대신 새로운 지하 제국을 만들어냈다. 지하철 역사 하나하나 마다 자치권과 고유한 문화를 가진 도시국가가 발생한다. 이 도시국가들은 동맹을 맺기도 하고 교역도 하지만, 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지하세계에는 국가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파시즘, 기독교 등 인류가 역사를 거치며 발명해왔던 각종 이데올로기와 종교도 재등장한다. ?메트로 2033? 속의 한자동맹은 중세시대 독일 상업 도시 간의 동맹이었던 ‘한자동맹’의 이름을 본떴다. 몇 개의 지하철역들은 이 동맹에 속해 무기와 약재 등을 교역한다. 자본주의가 핵전쟁 이후에도 명맥을 이은 것이다. 한편 ‘붉은 라인’에 속한 역들도 있다. 지하세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연맹이다. 책에는 마르크스를 필두로 한 국제 노동자 조직 ‘인터네셔널’의 정신을 이은 혁명단체인 ‘인터스테이셔널’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민족주의적인 파시즘, 기독교 등 인류 정신사의 주요개념들은 지하철 노선 속에서도 그대로 펼쳐진다. 인간의 생명력이 끈질긴 것과 마찬가지로 사상과 종교 또한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인류를 지탱해온 제도나 이념들이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긴 하지만, 지구 멸망 이후의 세계는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있다.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지하 세계 속에서 방사능에 오염된 각종 괴물, 커다란 쥐떼의 습격에 대한 공포는 그곳에 살고 있는 인간을 항상 불안에 떨게 한다. 바로 다음 순간의 목숨조차도 확실하지 않은 이런 상황 속에서는 양심이나 배려와 같은 가치가 사치스럽게 여겨진다. 살아내는 것만 해도 버거운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아르티옴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면 생존 욕구가 왕성한 만큼 그의 ‘인간성’ 또한 쉽게 흐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르티옴은 부당한 폭력에 희생된 타인의 죽음에 분노해 총을 빼든다. 또 사소한 친절함에 감사하고 보답할 줄 안다. 우연히 지상에 올라가 난생처음으로 별이란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무한’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하기도 한다. 핵전쟁 이전의 아름다움에 대한 노인들의 옛이야기에 감동하는 순수함도 가졌다. 그의 내면에서 이뤄지는 이 모든 작용은 우리가 ‘문명적 인간’에게 기대하는 자질들이다. 하지만 ?메트로 2033?에 따르면 인류의 문명이 핵전쟁으로 날아간 다음에도, 여전히 이것은 우리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
책은 인류 멸망 이후를 이야기함으로써 인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진 뒤에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상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12년 12월 21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문이 자자해 겁먹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메트로 2033?이 시사하는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지구가 멸망하든 안 하든 우리는 인간이었고, 인간이고, 인간일 것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