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수빈 기자 (newbien@skkuw.com)

 

2012년 12월 21일이 다가오고 있다. 소문에 의하면 이날이 바로 지구가 멈추는 날이라고 한다. 이 지구 종말설은 마야 사람들의 달력에 근거한 것이다. 올해에 맞춰 지구가 과연 어떻게 멸망할 것인지에 대한 추측이 무성하다. 누군가는 갑자기 지구의 극이 단번에 뒤집혀 망할 것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거센 태양 폭풍이 지구를 휩쓸고 지나갈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밖에도 △운석 충돌 △치명적인 전염병 △핵 등 무수히 많은 멸망 시나리오가 존재한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은 21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띄워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우리는 21일 다음날부터에 대해서는 많이 고심해보지 않은 것 같다.

현대의 묵시록
비록 대중매체가 멸망 ‘이후’를 멸망보다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룬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류 아래서는 ‘세계는 망했다. 그렇다면 그다음에는?’이라는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대답을 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리고 이 산물이 바로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라는 장르이다.
아포칼립스라는 말은 ‘계시’, 즉 신에 의해 비밀이 드러난다는 말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포칼립시스(apokalypsis)에서 유래한다. 또한 이 말은 기독교 성서의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이 세상의 종말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아포칼립스는 세상의 종말이라는 뜻을 갖게 됐다.
여기에 ‘이후’를 뜻하는 포스트(post-)가 붙어 포스트 아포칼립스, 말 그대로 세계 멸망 이후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 말에는 기존 아포칼립스라는 표현이 갖고 있던 종교적 색채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기존 공상과학 장르가 아포칼립스라는 표현에 세계 종말이라는 뜻만을 추출해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는 공상과학 장르의 하위 장르로 ‘세계 멸망, 문명 붕괴 이후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이야기는 △기후의 급격한 변화 △로봇 반란 △세계 대전 △외계인 침략 △자원 고갈 △전염병 등 멸망의 가짓수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이 장르의 원형으로 생각되는 작품은 1826년 출판된 메리 셸리의 최후의 인간이다. 치명적인 전염병이 세계를 휩쓰는 가운데 병에 면역력이 있는 주인공을 다룬 이야기다. 책이 나왔던 그 시대에서는 혹평을 피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19세기 영국 사람들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가져올 긍정적인 미래상을 그리고 있었다. 이런 낙관주의 풍조 속에서 ‘우울한 이야기’는 1960년대까지 조용히 묻힐 수밖에 없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가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인지도를 얻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더 나은 미래를 보장했던 과학 기술은 핵무기를 만들어냈다. 핵은 인간 문명의 붕괴 가능성을 현실로 끌어당기는 역할을 했다. 핵뿐만 아니라 △환경오염 △생물 종의 멸종 △자연재해 △자원 고갈 등은 현실적인 문제로 사람들에게 다가왔고, 시대의 비관론적 전망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드러난다.

그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문명은 그 자신의 질서와 함께 붕괴했다. 그렇기에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은 무질서하다. 나름의 질서가 있다 하더라도 약육강식의 ‘야만적인’ 질서가 세계를 지배한다. 주인공은 문명의 잔해가 드문드문 남은 황량한 땅을 돌아다니며 악당, 조력자를 만난다. 그래서 서부극과의 유사성 때문에 이 장르를 SF 서부극으로 여기기도 한다.
최근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가장 자주 다뤄지고 인기 있는 소재는 핵위기와 좀비 소재다. 이 두 말 뒤에도 아포칼립스라는 말을 붙여 각각 뉴클리어 아포칼립스, 좀비 아포칼립스라고 부른다. 뉴클리어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잘 드러낸 예로는 <폴아웃 시리즈> 게임이 있다. “전쟁,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폴아웃 시리즈>의 ‘폴아웃’은 방사능 낙진을 뜻한다. 플레이어는 이 게임에서 핵전쟁 이후의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황무지에서는 △방사능 △변이 생명체 △생화학 병기가 목숨을 위협한다. 그렇다고 핵을 피하기 위해 지어진 ‘볼트’라는 방공호도 안전하지 못하다. 어떤 방공호에서는 그 안에 갇힌 사람들에게 끔찍한 실험을 자행하거나, 이들을 감시하기 때문이다.
좀비 아포칼립스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지만, ‘좀비는 전염병의 일종’이라는 도식을 도입한 작품 <나는 전설이다>가 아마 가장 유명할 것이다. 범람하는 좀비 아포칼립스 작품은 그것만으로도, △인간의 오만 탓에 누출된 좀비 바이러스 △주인공과 대치하는 적대적 생존자 △좀비에 물린 상처를 숨기는 동료 등 숱한 클리셰를 낳았다.
그러나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가 마냥 우울하기만 한 세계만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멸망했지만,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간다. 그리고 희망도 살아있다. 이 주제의식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 코맥 매카시의 더로드다. 이 작품은 최악의 순간에서도 인간성과 희망을 잃지 않기를 주문한다. 아니, 그런 순간에서야 희망이 더 빛을 발할 수가 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보여주는 부서진 문명의 세계는 묘하게 매력적이다. 물론 그런 때가 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