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카를 슈미트

기자명 유수빈 기자 (newbien@skkuw.com)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다. 물론 헌법에 명시된 바는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여긴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일까. 말 그대로 이것은 자유주의를 토대로 한 민주주의를 일컫는다. 그 단어에서는 두 주의가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는 것으로 보이며, 한편으로는 ‘자유주의’라는 어감을 긍정적으로 들리게끔 한다. 그 어감처럼 사람들은 자유주의를 좋은 이념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열린’ 자유주의의 적?
카를 슈미트는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본래는 낭만주의적인 인간이었지만 1차 세계대전이 그의 사상에 변화를 줬다. 전쟁에서 패배한 독일 제국은 몰락했다. 그 자리에는 그 시대 가장 ‘민주적인’ 헌법을 기초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이 나라는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엄청난 양의 전쟁 배상금에다, 물가는 치솟는데 화폐 가치가 폭락하고 있었다. 공화국이 채택했던 의회주의와 정당주의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슈미트는 일련의 연구를 통해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는 의회주의 자체를 문제로 지목했다.
자유주의는 개인적인 것을 옹호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다양한 개별 의견들이 자유롭게 부딪치면 진리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의견들이 충돌하는 곳이 바로 공론장, 즉 의회다. 이곳에서는 공개 토론이 벌어진다. 토론은 원리적으로 상대방에게 공정함과 진리를 이해시키거나 또는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능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 토론 현장에서 궁극적으로 올바름을 지향하는 합의는 이뤄지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거래와 계산, 타협과 교환만이 있다. 왜냐하면 의회를 이루는 사람들은 순수하게 진리를 지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당파와 이해관계에서 얽매여 저마다의 사적인 자유에 따라 토론에 임한다. 그래서 이들은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해서 일반 의지를 구현하지 않는다. 대신 문제에 대한 미봉책만을 내놓을 뿐이다. 슈미트가 볼 때 의회주의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없으므로 사라져야만 한다.
물론 슈미트가 자유주의자들만을 비판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유주의자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 또한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적과 동지의 명확한 구별을 중시하는 슈미트가 보기에, 적어도 레닌식 공산주의자들은 적과 동지만큼은 확실하게 구분할 줄 알았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어떤가? 이들은 개별 의견들의 등장을 권고한다. 그렇기에 개인적인 자유주의는 논리적으로 일관된 특수한 정치적 이념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은 정치적이기를 거부하지만, 정치적인 것을 제거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정치적인 것을 은폐했고, 정치적인 것에 대한 이해와 진솔한 태도를 없앴다.

 

국가 사회주의의 동지
카를 슈미트는 이론적으로 ‘자유주의의 적’으로도 악명이 높으나 그가 받는 비판 대다수는 그의 나치 옹호 활동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나치를 지지했던 것은 아니다. 반자유주의적 정치학자이자 법학자로 유명한 슈미트는 권위주의 국가, 나아가 전체주의를 옹호했다. 그러나 그는 나치당에 제한 없는 표현의 자유를 주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등, 처음에는 나치에 비판적인 행보를 밟았다. 그의 태도가 바뀐 것은 나치당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다. 카를 슈미트는 1933년 당원 번호 2,098,860을 받고 나치당에 가입한다.
이후 그는 나치에 협력한 대부분의 지식인처럼 국가사회주의나 히틀러의 행동을 법률적으로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독일 신문들은 이런 그를 가리켜 ‘황제 법학자’라고 불렀다. 그래서인지 나치 치하에서 그는 △베를린대학 교수 △프러시아 국가평의회 △법학 학술지의 편집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비록 1936년 이후로는 그의 적대자들이 과거 슈미트의 나치당 비판을 물 위로 떠올렸지만 말이다. 나치당 내에서 슈미트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게 됐고, 그는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더욱 국가사회주의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현 시대의 동지인가 적인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가 완전히 몰락했다. 자연히 정권에 협력했던 지식인들도 함께 몰락하고, 슈미트도 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더불어 나치 정권의 피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슈미트 비판이 이뤄진다. 그에게는 ‘나치의 어용학자’, ‘기회주의자’ 등의 평가가 내려졌고, 본인은 남은 말년 동안 자신의 흑역사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는 기존 슈미트 담론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조지 슈왑은 슈미트가 헌법 이론과 정치적 현실을 구별하려고 했으며, 반유태주의자이자 국가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이론가라고만 그를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슈미트 이론의 배경을 짚어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 파울 고트프리드의 『우리 시대의 사상가들(원제 Thinkers of Our Time)』에서는 슈미트가 자유주의가 지닌 ‘전체로서의 가치’를 비판했다는 우호적 평가가 나온다. 텔로스는 이런 ‘슈미트의 부활’의 흐름을 위르겐 하버마스와 롤스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지적 고갈’에서 찾았다.
현대 슈미트 연구의 흐름은 과거처럼 “정치적 자유주의를 명쾌하게 비판했다”는 식으로만 그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를 일관적으로 비판해왔던 경향은 물론이고 슈미트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재해석을 시도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레나토 크리스티는 슈미트가 단순한 반자유주의자라는 해석을 거부한다. 대신 그가 ‘권위주의적 자유주의’를 옹호했다는 인상적인 주장을 펼친다. 크리스티가 보기에 슈미트는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인 ‘사적 소유권’, ‘개인의 자유’ 등을 지키기 위해 권위적인 권력을 지향했다.
카를 슈미트는 아직도 많은 논란의 대상이다. 하이데거처럼 나치에 부역한 그의 행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슈미트의 자유주의 비판 이론은 여전히 유의미하며,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현재 세계의 삶을 지배하는 가치와 사상에 대한 숙고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