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해균 충무공 리더십센터 안보교육담당관

기자명 조영훈 기자 (yhc0821@skkuw.com)
▲ 김은정 기자 ej1001@

1977년 바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고 외항선에 탑승한 학업선원은 선장이 돼 전 세계를 누볐다. 그런데 2011년 1월, 그가 운항하던 ‘삼호 주얼리 호’는 소말리아의 무장 해적들에게 납치당하고 만다. 자칫하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그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삼호 주얼리 호는 지그재그 운항을 반복했고, 청해부대와 정보를 주고받았다. 구출 과정에서 그는 총상을 입었으나 기적적으로 눈을 뜬다. 이후 조타기를 놓아야 했던 그는 육지에서 ‘청소년 지도자’로서 인생2막을 열려 한다. 지난달 19일, 올해 방송통신대 청소년교육학과에서 새내기 생활을 시작하는 석해균(60) 선장을 만났다.

 

Q. 선장직을 맡기 전까지 어떤 일생을 보냈나
해군에서 5년간 근무하면서 바다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게 됐다. 비록 해사전문학교를 졸업한 것은 아니지만, 1975년 8월에 제대한 이후 이 일이 적성이라고 확신했다. 1977년 처음 외항선을 타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학업선원으로 있으면서 실무를 배워나갔는데, 배를 타면서 일에 흥미를 느끼고 배 안에서 항해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틈틈이 혼자서 공부했다. ‘기왕 해양 생활을 시작했으니 배를 운항하는 선장이 돼보자’는 것이 목표였다.

Q. 선장으로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때는 언제인가
선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90년대만 해도 외국에서는 ‘코리아’라는 나라를 몰랐다. 아시아 사람이라면 일본과 중국을 먼저 떠올리던 시기였다. 한 번은 남아프리카공화국 희망봉에 다다랐는데, 한 흑인이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미리 가져간세계지도를 펴놓고, 동북아시아의 한반도를 가리키며 “코리아에서 왔다”고 알려줬다.
그는 한국인을 처음 만났다고 하는데, 한국을 홍보하는 민간 대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큰 보람을 느꼈다.

 

Q. 아덴만 사건 당시, 피랍 직후 어떤 생각을 하게 됐는가
사실 항상 해적 우범 지역을 통과할 때를 대비해 미리 1달러 지폐 수십 장을 넣은 봉투를 금고에 가득히 채우고 다녔었다. 수만달러를 잃지 않기 위한 속임수였다. 자고 있는데 해적이 칼을 들이대고 금고를 열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들은 그 부피가 커 보이는 봉투를 가지고 갔는데, 그들은 수고비만 가져간 셈이었다. 당했음에도 기분은 좋았다. 이렇게 미리 앞선 상황에 대해 철저히 대비했기 때문에 해적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아덴만 사건은 이전 사건과 달랐다. 총을 가진 해적은 처음이어서 당황스러웠다. 허벅지를 꼬집어보고서야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순간 ‘정신을 차리자!’라고 생각하고 냉정함과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선원 20명이 내게 달려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리더인 나까지 당황하면 조직이 와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Q. 긴박한 상황에서 해적 본거지로 가는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노력했는데
해적에게 굴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들의 인솔 하에 조종하던 도중 한 해적이 국적을 물었다. ‘코리아’라는 말을 듣고 그들은 “우린 한국이 좋다. 돈을 많이 주기 때문이다. 가만히만 있으면 한국이 우리에게 돈을 줄 것이고, 그 후 풀어주겠다”고 회유했다. 한국을 돈줄로 취급하고 나를 돈으로 취급한 것이다. 자존심이 상했고, 이 악순환을 내가 끊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틀이면 소말리아에 도착하지만, 공해 상에 배를 돌리면서 맨몸으로 두뇌 싸움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해적들이 나를 총살대에 두 번이나 세우고 협박했다. 하지만 이미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다. “죽여라”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나를 죽이지 못했다. 그들 앞에서 빌지도,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런 내게 겁을 먹었다.

Q. 아덴 만 사건이 많은 언론에서 조명된 바 있는데
이 사건 이후 ‘영웅’이라고들 부르는데 영웅시되고 싶다는 마음에서 배를 지켜낸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아마 죽음을 각오하지 못했을 것이다. 선장이고 리더이기 때문에 주어진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마음밖에 없었다. 더불어 한국인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Q. 앞으로 승선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지
사건 이후 후유증으로 배를 타지 못하게 됐다. 지금도 왼손을 완전히 쥘 수 없다. 천직이었던 해상에 대해 미련이 남지만, 바다에서의 일생을 정리하는 단계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껏 바다생활만 했었던 나는 ‘사회 초년생’이었다. 지난해는 제2의 인생을 위한 선박을 건조하고 인생항로를 개척하기 위한 시기였다. 올해는 이제 내가 만든 배를 타고 육지에서의 ‘말단 항해사’로서 첫 항해를 시작하고 있다.

 

Q. 전국을 돌아다니는 강연활동이 힘들지는 않은지
이 경험은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본다. 이 경험을 조직사회와 학교에 접목해 인내심과 도전 정신을 일깨우는 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해군 충무공리더십센터에서 군장병에게 안보교육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강연활동에 발을 들이게 됐다. ‘힘들다고 보면 힘들지만 베풀 것은 베풀자’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다. 총상을 입었을 때 수많은 이름 모를 국민의 성원에 힘입어 살아났다. 국민이 필요로 하는 곳에 보답한다고 생각하면 피곤할 새가 없다.
Q. 청소년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청소년들이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그들에게 누군가 조금만 희망과 용기를 준다면 절대 자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방송대 청소년교육학과에 진학한 만큼 졸업 이후 방황하는 청소년을 올바른 방향으로 선도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 청소년을 위한 등대처럼 길을 인도해주고, 좌절하지 않도록 나침반처럼 올바른 방향을 알려주고, 외로울 땐 갈매기처럼 그들 곁에 서 있겠다. 인생의 항해사로서 청소년들이 새로 출발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Q. 리더로서의 덕목은 무엇인가
해적의 협박을 견뎌내면서 얻은 경험을 풀어놓고자 한다. 첫 번째로, 아무리 어렵고 최악의 상황이 닥치더라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물고 늘어져야 한다. 두 번째로, 그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도전이 없으면 성공도 없다. 세 번째로, 고통을 정신력으로 견뎌내야 한다. 정신력은 힘든 상황을 헤쳐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아무리 파도가 거칠어도 조금만 견뎌내면 곧 잔잔한 바다가 펼쳐진다는 사실을 바다생활에서 경험해냈다. 마지막으로, 희생정신을 가져야 한다. 내 몸을 사리면 리더가 아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말이 있듯 죽음을 각오해야 살 수 있는 것이다.
대학생들도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당장 어려운 상황이 닥쳤다고 해서 무너지면 안 된다. 정신력이 없었다면 나도 이미 죽었을 것이다. 절대 포기하지 않기를 당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