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두(철학11)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았을까. 차곡차곡 쌓인 보아옴들은 늘 어떤 공간을 동반했다. 그리고 그 공간들은 이제 너무나 익숙한 모습으로 내 주위에 있다. 책상, 의자, 높은 빌딩, 벽, 공기, 지구조차도 난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상상은 ‘보아옴’이 그랬듯이 공간을 전제한다. 이러한 공간감이 없으면 나는 제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있는 아니쉬 카푸어의 조형물들은 내가 쌓아온 공간감을 무시하고 있었다. 상상해 본 적도, 아니 상상할 수도 없었을 작품들. 그 앞에서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기묘한 기분들은 작품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자꾸만 그 앞을 서성이게, 바라보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작품 중 무제는 이어폰의 고무캡처럼 생긴 세 개의 짙은 파란색 물체였는데, 기묘하게 벽에 붙어 있었다. ‘기묘하게’라고 한 것은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면서도 바닥과 떨어져 볼록한 끝 부분만 벽에 닿아있었기 때문이다. 짙은 파란색이 주는 그 무게감으로는 도저히 벽에 붙어있을 수 없는 그 느낌으로. 그것은 물이 있다고 생각하고 들어 올린 빈 컵의 가벼움처럼 나를 당황하게 했다. 하지만 더 당황한 것은 그 짙은 파란색 구조물의 내부와 마주했을 때다.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짙은 파랑이 만들어 낸 어둠은 그 어둠의 경계가 내부에 닿기도 전에 희미해져 안쪽에 시선을 두는 것이 불가능했다. 만져보고 싶었다. 정말 비어있는 걸까. 묘한 느낌.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음이 자극하는 호기심과 공포감의 이중감정. 하지만 작품은 만질 수 없었고, 결국 그 묘한 느낌은 다시금 외부를 관찰해 해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 내부를 보면 그 거대한 깊이감이 외부에서 확인한 것을 불신하게 했다. 외부의 확인이 주는 해소감과 내부의 확인이 주는 불안감의 순환. 왜 그 순환 속에서 나는 전율을 느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가 그 작품 앞에서 느꼈던 모순된 느낌들을 내가 이해했기 때문인 것 같다. 무거워 보이면서 동시에 가벼워 보이는, 깊이를 알 수 없으면서도 알 수 있는 모순들. ‘숭고’의 감정이 이것일까. 깨달음. 모순된 것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
아니쉬 카푸어의 전시에는 이 구멍 말고도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을 왜곡하는 전시물들이 많았다. 딱딱하고 두껍지만 찢어진 벽. 튀어나온 벽.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 보이는 쇠구슬 탑 등. 일반적으로 사람이 쌓아온 공간들과는 전혀 다른 공간 속에 존재하는 조형물들. 그 조형물들은 우리를 다른 세계로 보낸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임을 자각할 때 그곳에 아니쉬 카푸어가 창조해낸 새로운 공간이 있다. 그리고 그 공간들을 응시하는 동안 공간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그 지평 속에서 느끼는 이 기묘한 기분이 숭고라면 아니쉬 카푸어는 숭고의 공간을 창조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두(철학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