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수빈 기자 (newbien@skkuw.com)

도구적이고 계산적인 이성을 전 세계에 획일적으로 보편화시키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논리에 대항할 수 있는 철학적 보편주의는 과연 가능한가?
-송상기, <엔리케 두셀의 해방철학과 전지구화 시대의 비판윤리>에서

▲ "희생자들은 그들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현 정치질서의 문제들을 폭로하는 자들이다."/ⓒcommons.wikimedia.org
인식론적 지도를 그려본다면 돋보기에 댄 듯 유난히 커다랗게 보이는 땅이 있을 것이다. 바로 북아메리카와 유럽이다. 상대적으로 덜 이해된 땅은 더 작을 수밖에 없건만, 여기에 라틴아메리카는 새로운 지도를 그려내려고 한다. 물론 그 시도만으로도 자신들의 위치를 다지고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궁금하다. 그들은 서구중심적인 정치·경제적 체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실험으로 끝날 것인가? 한국도 이따금 라틴아메리카를 눈여겨 보지만, 그 관심이 정치·경제적 분석에 쏠려있다. 그 실험의 부분이자 바탕이 되는 라틴아메리카의 철학에 대한 논의는 아직 너무나도 부족하다.
전지구적으로 서구중심적 담론을 극복하려는 라틴아메리카의 고민, 지금 학계의 최전선에는 엔리케 두셀이 있다.

근대 가로지르기
흔히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상징하는 자아의 시작점으로 여긴다. 두셀은 그것보다 한 세기를 더 옛날로 되짚는다. 그는 스페인 약탈자들의 “나는 정복한다”의 ‘나’에서 근대의 자아를 찾는다.
그 시절 서구는 인식의 틀을 만들었다. 이성적이고 발전된 서구는 따라야 할 보편적인 지향성이라고. 그래서 서구 이외의 나머지는 미개하고 야만적이다. 이들은 계몽 받아야 한다. 서구는 이성과 자본이라는 절대 법칙을 만들었고, 타자에게 그것을 강요했다. 그래서 타자는 보편성, 거대한 체제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탄압받고 희생된다. 이 와중에 서구는 자신들의 논리적 틀을 지키기 위해 타자들이 고유하게 갖던 합리성을 무시한다. 따라서 정복의 자아는 근대식 이성의 자아보다 앞선다. 그것이 바로 식민주의고, 근대성의 폭력이다.
2차 세계대전을 겪고서야 서구인들은 비로소 근대성의 폭력적인 모습에 주목했다(이것도 유럽중심적인 인식이었을까?). 근대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근대의 이후라는 뜻의 포스트모더니티가 등장했다. 접두어 ‘포스트’라는 표현은 근대와 자신을 시간적으로 완전히 구분 짓고, 때로는 이성의 존재 자체를 청산하고자 한다. 그러나 두셀은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 그가 내놓은 것은 트랜스모더니티다. 횡근대성, 초근대성으로 번역되는 트랜스모더니티의 ‘트랜스’는 근대와의 완전한 단절을 말하지 않는다. 트랜스는 근대를 가로지르고 숙고하는 사유다. 따라서 역사적 맥락을 가진다. 또, 트랜스모더니티는 ‘근대화’의 폭력성은 극복해야 하지만, 이성이 시도한 보편, 합리적 체계까지 버려야 한다고는 않는다. 라틴아메리카연구소의 조영현 교수는 “서구의 이성에도 일리가 있는 면이 있다. 다만 균형감을 상실했던 것”이라며, “근대화가 간과했던 수많은 타자의 이성에 귀를 기울이기를 주문하는 것”이 트랜스모더니티라고 설명한다.

▲ 그들은 서구중심적인 정치·경제적 체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fotopedia.com

‘산 노동’ 강조하기
그렇다면 타자와 중심부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더 나은 삶을 위해 논의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두셀은 그런 이상적인 모임을 가정하는 것은 타자가 처해있는 경제·정치적으로 불평등한 현실을 은폐한다고 주장한다. 두셀은 수탈로 얼룩진 라틴아메리카의 경제 현실을 짚지 않고 넘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근대가 낳은 훌륭한 발명품인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여기서 이뤄진다. 그는 마르크스를 창조적으로 독해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경제적 개념은 바로 ‘산 노동’(Living being)이다. 노동자의 피와 살로 이뤄진 산 노동은 가치를 생산하는 진정한 주체다. 그러나 자본주의, 나아가 세계화 속 제국주의는 노동력을 단순히 거래 대상, 상품으로 여긴다. 그래서 산 노동이 갖는 생명성은 배제된다. 두셀의 말에 따르면 오히려 자본주의는 개념적인 시장과 자본을 살아있는 신으로 착각했다.

초근대적 보편성 찾기
근대가 아직 생생하던 시절엔 모두가 따르고 나아가야 할 청사진이 있었다. 그러나 근대와 근대가 낳은 식민성을 극복하려면 새로운 청사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중심으로 둘 것인가? 자본주의는 말한다. 각자의 이익이라고. 상대주의자들은 말한다. 중심은 없다. 두셀은 대답한다. 생명이라고. 그의 철학은 이성과 상징, 언어와 논증이라는 추상을 위해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사유의 궁극적인 목표는 삶과 생명이다. 그가 단지 유럽중심주의만을 비판하고, 세계사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끌어들이는 데서 멈췄다면 그가 대륙 바깥에서도 광범위하게 논의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주변부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만이 미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세계가 지향해야 할 보편성은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 생명이란 추상적인 진리를 넘어서는 생동감 있는 삶 자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산 노동’과 근대성의 폭력을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엔리케 두셀이 던진 문제에 뜨끔할 사람은 서구인뿐만이 아니다. 다시 세계 지도를 그려보자. 한국인의 사유 속에서 서구는 얼마나 커다랗게 그려질까? 식민 시절 한국은 근대 속 일본식 서구중심주의를 강요받았던 것이다. 눈에 빤히 보이는 식민주의는 사라졌으나 식민성은 남았다. 한국은 엄연한 타자지만, 타자라는 위치에서 체제를 극복하려는 시도 보다는 거대한 세계 체제를 쫓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한국에 남아있는 식민성이다. 그러므로 타자성, 그리고 무엇을 진정한 보편성으로 삼아야 할지를 묻는 두셀의 철학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