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경(국문10)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내가 <미드나잇 인 파리>라는 영화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작년 이맘때, 그러니까 2012년 5월이었다. 문학과 우울, 지적 욕망을 습관처럼 앓던 소녀들 몇이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모임을 자그마하게 만들었었는데, 5월은 오스카 와일드와 유미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방금 막 터진 벚꽃마냥 늘어놓던 때였다. 나는 오늘날의 (번역어로서의) 예술이 갖고 있는 함의가 너무 거대하게만 느껴진다고, 심지어 가끔은 그것이 무책임해 보일 지경이라고 토로했다. 다다이즘과 팝아트 이후의 전위예술, 기술시대의 복제과정을 거치며 예술은 그저 혼란스러워졌을 뿐이라고. 그를 사생아로 배척할 수도 그렇다고 그를 장자 삼을 수도 없는 곤혹스러움에 대해 차라리 회화의 프레임과 악보의 음표들이 ‘미술’, ‘음악’을 명명해주던 전근대가 현명하진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영화에 푹 빠져 영화를 공부하던 한 친구가 언제나 ‘황금기-과거’를 호명하는 것이 우리의 무의식적인 신경증은 아닐지 조심스레 얘기를 꺼내며 <미드나잇 인 파리>를 언급했다. 그녀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아쉽게도 국내에는 아직 개봉되지 않은 영화’인 <미드나잇 인 파리>는 언젠가 꼭 겪어보고 싶은 ‘사건’으로 내 안에 자리 잡게 됐다.
그리고 <미드나잇 인 파리>는 계절처럼 내게 왔다. 학교 앞 영화관에서 독립영화나 해외 영화제 수상작들을 편성해 상영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여름이 시작되고 <미드나잇 인 파리>가 올라온 것이다. 소낙비가 내리는 새벽이면 비 내리는 -가장 아름다울- 파리를 상상하며 몇 번이고 이 영화를 봤고 결국 한 번 더 계절을 겪은 후에 겨울의 파리로 훌쩍 떠났다. 영화의 주인공 길 펜더가 시간여행을 떠나게 되는 판테옹 뒷 편의 생 테티엔 뒤옹 성당(Saint Etinne du Mont)은 ‘관광명소’가 되지는 않았는지 지극히도 일상적인 골목이었다. 어둑한 골목 계단에서 바라보는 코블스톤 보도는 카페에서 아페리티프를 마시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주황빛 가로등 빛을 한 조각 씩 반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보여진 파리’에는, 사람들의 내면 깊숙한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감정선을 건드리고 결국은 표면으로 왈칵 차오르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로 접하는 예술과 예술인’이라든가 ‘미화되는 과거, 혹은 환상 그리고 사랑이라는 제재들, 혹은 그 어던 분석적인 프레임을 가지고 보아도 <미드나잇 인 파리>는 여전히 장면 마다 매력적인 것이다.
그렇게 다시 계절이 바뀌어 봄이 되었고, 같은 영화관에 우디 앨런의 42번째 작품이자 유럽기행 신작인 <로마 위드 러브>의 개봉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봄날의 강아지나 꽃봉오리같이 무작정 설렜던 작년처럼, 타자화되고 환상화-된 또 다른 유럽의 모습이 이번 영화에는 어떻게 녹아 있을지 기대해보지 않을 수 없다.

▲ 장인경(국문10)